예수쟁이

누가 하라고 시켰다면 손도 대지 않을 일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 벌린 일이다. 그저 작게 시작한 일이었다. 헌 것 뜯어내고 새 옷을 입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생각치 않던 일에 더해 욕심이 자꾸 보태진다.

애초 세웠던 계획은 어느새 기억조차 없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면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땅을 파고 땅을 다지며 높이를 맞춘다. 자갈을 덮으며 또 생각이 달라진다. 어느새 그냥 즐기는 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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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뉴스들을 보며 드는 생각 하나.

믿음 또는 교회, 사찰, 종교기관, 조직 또는 체제, 아니 이념 사상 그 무엇이라 부르든 모두 저마다 제 머리 속 크기만한 신들을 안고 살며 벌이는 일들 아닐까?

저마다 제 욕심과 이기 –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 그것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탁소에서 손님들을 맞으며 날아갈 듯 기쁨에 겨워 내 삶에 크나큰 자긍을 맛 볼 때가 있다.

일테면  ‘You have contributed to the health, welfare, and happiness of each person with whom you have come in contact here in Newark. The beautiful photographs you share with us, the poems, both those translated from Korean and those already written in English give comfort, knowledge, and enrichment to all who receive them.’ 인사치레도 기분 좋은 것이지만, 가장 큰 것은 ‘너 예수 믿지!’하는 말이다.

어쩌다 그 말을 들을 때면 하기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잘 살고 있구나’하는 맛을 느끼곤 한다. 나는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한땐 거창하게 허황된 꿈도 많이 꾸고 살았다만, 신이 내게 허락하신 재주 안에서  하루를 그렇게 꾸려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산다.

그렇게 난 예수쟁이이고 싶다.

뭐 특별히 큰 생각 없다.

예수가 선포했듯이 신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고 중간자로 사기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이 믿음, 교회, 종교, 이념, 사상 그 무엇으로 불리우던 간에.

신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것을 가르쳐 준 내 신앙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본회퍼를 능멸한 수준 이하의 잡사기꾼 전광훈이라는 놈 뿐만이 아니다. 교회와 사찰의 크기가 문제도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신과 나 사이에서 착취하는 중간자에게 정신 빠뜨리는 일이 바로 죄이고 악이다.

중간자에게 얼 빠뜨리면 사람이 망가진다. 망가지는 게 나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우리가 망가진다.

예수가 저주하며 혼낸 이들은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 만이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에게 얼빠져 노는 게으른 자, 무지한 자, 오만한 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내 믿음이다.

날 좋은 일요일, 땅을 뒤집으며 고집으로 부려보는 욕심 하나.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그냥 소소한 내 일상 속에서.

웃음에

이즈음  일상 가운데 새롭게 굳어져 정해진 일과가 있다. 매 주 두 차례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고 차려 드리는 일이다.

올 봄에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찾아 온 가장 큰 스트레스는 매 끼니 식사였다. 칠십 년 넘도록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상을 받아 오신 아버지에게 혼자 밥을 해 드시는 것이 제일 두려운 듯 했다. 어머니 덕에 한국식 밥상을 평생 즐겨 오신 아버지에게 노인 아파트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입에 맞지 않으셨다.

하여 나와 누이들은 당번을 정해 아버지의 식사를 책임지기로 했다. 맏딸인 누나가 사흘을 나와 누이 동생이 각기 이틀씩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여 차려 드리기로 정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두어 달 간은 이리저리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던 아버지는 이즈음 많이 편해 지셨고 우리들이 차려 드리는 밥상을  아주 즐기고 계신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즈음 내가 고마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만드는 재능을 물려 주신 것이다. 아내에게 부탁을 하면 아니될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주신 재능으로 가급적 어머니 솜씨를 흉내 내어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는 작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드릴 밥상을 준비하여 아파트를 찾는 저녁 무렵이면, 시원한 그늘이 진 노인 아파트 한 쪽에 할머니 몇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곤 한다.

처음에는 그녀들과 가벼운 눈인사 정도를 나누다가, 이어 손을 흔들게 되었고 이즈음은 아주 지극히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도 여느 날처럼 그녀들은 환한 웃음으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지난 봄 이후 우리들 모두에게 잃어버린 일상도 있지만 새롭게 다가 선 일상들도 있다. 어떤 일상이건 그 일상을 맞이하여 대하는 것은 바로 나다.

아버지가 살고 계신 노인 아파트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의 웃음으로 내가 누리는 작은 천국에 감사하는 하루다.

종종 그 아파트를 나서면 만나는 길인 Skyline Drive에 서서, 지는 석양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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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은 아름답고 뜻있는 시간들이 아닐까?

이제  9월,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

웃음이 이어지는 새로운 한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손님들에게 띄우다.

팔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에.

마스크

낮에 교회 담임목사께서 내 가게를 방문하였다. 그는 마스크 두 장을 우리 부부에게 건넸다. 마스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내에게서 들었다.

마스크는 서울시에서 뉴욕 영사관으로 보냈고, 영사관에서는 관할 지역내 각 한인회로 보냈단다. 내가 사는 델라웨어 한인회는 각 교회 등 지역내 한인 기관들을 통해 법적으로 규정된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란다.

그저 고맙고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영 가시질 않는다.

먼저 서울시와 시민들을 비롯해 우리 부부의 손에 닿기까지 마스크로 이어진 모든 손길들에게 드려야 할 마땅한 감사가 있다. 삼십 수 년 서울특별시민으로 산 적은 있다만, 그 보다 더 긴 세월을 떠나 산 사람이 받는 물건에 대한 감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안함이 더욱 크다. 이즈음 전해지는 뉴스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사에 대한 답과 미안함을 푸는 방안들을 생각해 본다. 서울시에 드리는 감사를 전하려고 서울시 홈페이지를 두루 둘러보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우선 마스크들은 내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 아들 며느리, 딸 세 아이들에게 두 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생각 많은 저녁에.

물소리

반 년 만에 주(州) 경계를 넘나들었다. 주 경계를 넘었다 했지만 고작 집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뉴저지 남단이었다.

이제 세월은 쏜 살이 아니라 방아쇠 당긴 탄환이다. 그가 떠난 지 어느 새 일년이 되어 조촐히 한 번 모이자는 후배의 전언을 받은 것은 두어 주 전 일이다.

장광선선생님은 뉴저지 남단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호수를 낀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Lake Park Cemetery 선생의 쉼터는 그에게 참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에는 오랜 동지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선생님을 먼저 보내신 사모님의 지난 일년 여 시간들이 고스란히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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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했던 벗들에 비하자면 내가 그를 안 세월은 짧다. 벗들은 그를 형님 또는 선배라고 부르지만 내가 그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를 안 세월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가 진정 내 삶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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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짧은 이력이다. <김대중 구출위원회, 5.18 진상규명, 전두환 독재타도 위원회 조직,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수난자 가족 돕기회 간사, 해외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민주연합총무, 재미한국청년연합, 국제평화대행진 활동, 재미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필라델피아 녹두회 등등>

그는 조국의 통일과 민주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깊이 알게 된 때는 고작 스무 해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내가 아주 짧은 세월 잠시 동포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매 주 그의 컬럼을  신문에 싣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의 컬럼이 신문의 얼굴이었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과 강진에서 유소년과 초기 청년기를 지냈던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남도의 바람과 물결, 그리고 사람들 그 터 위에 세우고 꿈꾸어 온 그의 세상을 풀어 놓은 글들이었다.

그가 꿈꾸던 통일과 민주는 모두 함께 주인 된 사람들이 사람처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향하는 도구였다. 그즈음 나는 그의 남도 억양에서 나는 진한 사람 냄새를 맡곤 했다. 때론 그의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많이 뒤쳐진 생각들이 그가 풍기는 사람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두 해 전에 후배들의 성화로 그가 남긴 글들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 책을 여는 그의 말이다.

<밀려가는 물>

나는 델라웨어강 하구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강변에 마을사람들을 위한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해 두어 차례 나는 그 곳에 나가 강변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젖어 봅니다.

어제 지나던 물은 오늘의 물에 밀려 떠나고, 오늘의 이 물은 내일의 물에 밀려 바다로 사라지리라.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 그리고 내일의 물은 지나간 물, 지금의 물, 새로운 물과 다른가 같은가? 다르다면 하염없이 다른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어찌 그 많은 양의 물을 품을 수 있을까?

이제 그는 먼저 바다 되었다.

그가 흐르는 물이었던 시절에 소리쳤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며 오늘의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벗들과 후배들이 있다.

그의 고향 남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을 넘어 전 세계에서 한국어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해 오늘을 흐르는 물결같은 삶을 생각하며.

딱히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늘 문제일 뿐. 그가 오늘 다시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들이 묘지에서 머무르는 내내 매 한 마리  높은 나무가지 위에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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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선생님 일주기에.

폭우(暴雨)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폭우를 맞았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로 쉬지 않고 물을 쏟아 붓는 듯 하였다. 천둥 번개 또한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엊그제부터 이어진 열대성 폭풍우를 몰고 온 허리케인 탓이란다.

동네 슈퍼마켓 주차장이 물에 잠겼다는 뉴스도 보았고, 도로 곳곳이 쓰러진 나무들로 길이 막혔던 며칠 간이었다. 내 이웃집들도 폭우와 바람에 쓰러 넘어진 나무들로 한바탕 소란들을 피운 한 주였다. 다행이라고 말하긴 미안하지만 내 집 뒤뜰 나무들은 잘 버티어 주어  체인 톱을 손에 들지 않고 처리할 만큼만 잔가지들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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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만 하여도 날은 잠시 맑았었다. 가게에 도착하니 평소와 다르게 이웃 가게 앞이 분주했다.  건강 기능식품 판매점인 GNC 소매점이 이른 아침부터 마지막 가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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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옛 가게가 있었던 맞은 편 쪽에서는 공사장 굴삭기 소리가 요란한 아침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아침 준비를 하며 잠시 지난 시간들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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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수년 전 내가 가게를 시작할 무렵엔 지금의 샤핑센터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분주했던 상가였다. 식료품과 하드웨어, 생활용품, 자동차 수리 및 부품을 판매하는 유명 체인점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음식점들과 이미용실, 각종 소매가게들이 꽉 들어찬 곳이었다.

그러다 큰 된서리를 맞은 때가 2008년이었다. 이른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알려진 금융위기를 겪던 시절이었다. 샤핑센터에 있던 가게들 절반 이상이 문들을 닫고  떠난 후 샤핑센터는 시간이 갈수록 폐허처럼 변해갔다. 인근에 새로운 시설의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샤핑센터는 나날이 황폐화되어 갔다.

그 사이 내 업종인 세탁업의 성쇠도 많은 부침을 겪었다. 한 때 우후죽순의 형태로 늘어나던 업소수는 거꾸로 폐업하는 숫자들이 늘어 이젠 손님들이 세탁소 찾기 힘들다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 따져보니 내가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세탁소 점주가 된 듯 하다. 특별한 재주나 능력이 없어 얻어 낸 산물이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 아침에도 세탁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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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은 2008년에 겪었던 충격을 훨씬 웃도는 일인 듯하다. 아직 그 끝을 모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샤핑센터 건물주는 센터의 절반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고 있다. 상가의 상점 수는 한참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1/10 수준도 채 안된다.

이재(理財)에 그리 밝지 못한  우리 부부는 이 나이에도 하루를 일하며 보낼 수 있는 작은 일터가 있다는 것에 그저 만족하며 감사한다.

누구나 살며 그러하듯 우리 내외도 크고 작은 폭풍우와 숱한 천둥과 번개를 마주하며 여기까지 왔다.

내일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늘 그래왔듯 폭풍우란 지나가는 것이고…

아침과 저녁을 맞는 감사를 이어가는 그 날까지는.

집안정리를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내 서재 한구석에 쌓아 둔 상자 두개가 있다. 제법 많은 양의 VHS 테이프들이다.

당시만 하여도 제법 큰 돈을 들여 만들었던 우리 부부 결혼식 영상을 비롯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담아두었던 기록들, 부모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담긴 테이프들이다. 80년대에 비디오를 찍는 가정용 카메라는 가히 이즈음 방송용 카메라 정도의 크기였거니와 한국과 미국을 왕복할 수 있는 비행기 값보다도 비쌀 만큼 내겐 고가(高價)였다. 과감히 그 돈을 들여 담아 두었던 기록들이다.

그냥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쌓아 두자니 부피도 크거니와 딱히 누가 시간 내어 볼 일도 아니어서 그냥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다.

VHS테이프를 디지털화해서 CD나 USB 등에 담아 준다는 광고들은 이따금 보았지만 또 다시 돈 들여 그렇게 남겨둔 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야말로 유기상태로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자들이다.

그러다 맘먹고 내 스스로 VHS테이프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  USB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구글에게 묻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경험들을 찾아본 뒤 파일 변환기와 편집기를 구입해 작업을 시작한다. 따져보니 128기가 USB 하나나 두개면 족할 듯 하다.

저 큰 상자 두개를 내 새끼 손가락 하나 크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세상이다. 물론 이즈음 젊은이들에겐 싱겁지도 않은 일이겠다만.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아직도 날은 뜨겁다. 이제 겨우 팔월 초입이니 이 더위는 한동안 이어질 게다.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큰 변화없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이미 다시 느슨해졌다.

또 다시 찌는 오후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우리 부부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와 장인 장모는 아직 살아 계신다. 우리 부부의 삶에서 느껴야 할 족(足)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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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놀랍게 바뀌고 변하게 마련이지만 아주아주 오래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민들은 여전하고 답(答)도 이미 정해진 그대로다.

누구에게나 똑 같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시간 또는 신(神)의 간섭은.

하여 오늘 하루 누린 시간에 대한 감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