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에

손님들이 묻는다. ‘장사 어때?’, ‘견딜만 해?’, ‘가족들은 다 건강하지?’ 나는 마스크 속에서 활짝 웃으며 응답한다.’고마워요. 제가 여기 있잖아요. 당신은요?’ 손님들은 웃으며 떠난다.

손님 뜸한 오후,  가게 밖 하늘에 홀려 빠지다.

흐르는 구름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것을 보면 내 삶의 연식도 제법 되었나보다.

살며 이렇게 반년이 흐른 것은 처음이다.

태초 이래 구름은 늘 변화무쌍이었을 터이지만 내겐 늘 처음이다.

그래 삶은 늘 홀릴만한 게다.

하여 구름에게 감사.

6. 3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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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시대

가게문을 매일 열지만 손님은 여전히 뜸하다. 펜데믹 이전에 비하면 고작 1/3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니 가게에서 내가 할 일들이 별로 없다. 하여 아직은 집에서 보내는 시간들이 많다.

나 나름으로 그 넘쳐나는 시간들을 즐긴다. 펜데믹 비상상황이 선포된 이후 씨 뿌려 볼 생각을 한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참 기특하다. 그 덕에 누린 지난 석달 간의 즐거움은 이즈음도 변함없이 이어진다.

풋배추와 열무 거두어 김치도 담고, 아욱과 시금치로 국도 끓여 먹고, 상추과 깻잎은 이즈음 우리 부부 밥상에 단골이 되었다. 고추, 오이, 호박 토마토 순을 쳐주고 달린 열매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즐거움은 정말 새로운 것이다. 머지않아 양파도 거두고 대파도 한 동안 사지 않아도 될 것 같다.

며칠 전 부터는 콩나물도 키워본다고 엉성한 시루에 열심히 물을 주고 있다. 틈틈이 방마다 마루도 새로 깔고 있고, 뒤뜰 deck도 새로 꾸며보자는 생각으로 머리속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즐거움은 혼자 마음껏 생각의 줄기를 붙들고 노는 것이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대망의 70년대’라는 현수막이 거리 곳곳에 걸리고, 라디오에서는 청룡과 맹호부대 군가가 흐르던 내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선생님들을 떠올린다. 교회 선생님들이다.

‘하나님, 이 아이들이 지금 열심히 공부에 전념할 때입니다. 공부할 시간에 바지 속에 손 넣지 않게 해 주시고….’ 기도하시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지금 너희들 나이야말로 그야말로 golden age다. 귀하게 여겨야 한다. 하루 하루 한시 한시가 귀하다는 것 잊지 말길 바란다.’라고 간곡히 부탁했던 선생님도 계셨다.

한강변 절두산이 바라보이는 풍광 좋은 저택에서 사시던 선생님께서 심각하게 말씀하셨던 이야기도 생각난다. ‘이런 시절에 좋은 풍광 바라보며 즐기며 사는 내 삶이 옳은 것인가?하는 고민이 들 때가 있단다.’ 솔직히 당시 그 선생님의 고민을 이해하지 못했었다만 조금 머리 굵어진 이후 선생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고난 받는 예수’를 침 튀기시며 외치시던 목사님도 생각난다.

돌이켜보면 엉뚱하고 나쁘고 못된 짓 많이 저지르며 살았으되 지금 이만한 부끄러움 안고 그래도 하루 하루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 모두 그 때 그 선생님들의 가르침과 기도 덕이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 일흔 고개를 바라보고 서 있는 지금 내 하루야말로 내 인생에 있어 황금시대가 아닐까?

혼자를 오롯이 곱씹는 시간을 즐기며, 역사라고 말하기엔 거창하고 그저 흘러간 시대와 내 시간들을 돌아보며 감사에 젖고 오늘을 즐기며, 내게 주어진 가늠할 수 없는 남은 시간들과 내 아이들의 내일을 위해 욕심 없는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지금이야말로 내가 누리는 황금시대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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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에

아들 딸 며느리가 밝은 목소리로 ‘Happy Father’s Day!’ 전화 인사를 했다. 난 ‘너희들이 최고다!’라고 내 기쁨을 전했다. 저녁 나절 하루하루 빠른 걸음으로 쇠해 가시는 아버지께 인사 드리다. ‘오늘 하루도 잘 지내셨단다. 그래 또 감사다.

어제 동네 신문 온라인판은 ‘100 DAYS OF PANDEMIC’이라는 제목의 특별 기사를 전했다. 델라웨어주에서 첫 코로나 바이러스 환자가 발생한 이후 지난 백일 동안 동네 사람살이 모습이 변한 과정들을 소개한 기사였다. 그리고 이제 맞이할 사람살이 새로운 일상을 조망하는 글들이 이어졌다.

세상은 누구도 느끼지 못할 만큼 더딘 걸음으로 아주 천천히 바뀌어 나아가지만 때론 한순간 하늘과 땅이 흔들리는 느낌으로 뒤집어지기도 한다.

이른바 ‘new normal’을 이야기하는 이즈음은 마치 혁명같다. 그래 사람들은 이런저런 걱정도 많고 생각 빠른 사람들은 기대도 많다.

모든 혁명의 끝은 실패라는 사람들도 있고, 혁명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이들도 있고, 혁명에는 배반이 따른다는 사람들도 있고…. 돌아보면 그 때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은 누구나 다 옳았다.

나 개인적으로 지난 삼개월여를 경제적으로 따지자면 완전히 파산이다. 나처럼 구멍가게 하는 이들이라면 거의 같은 심정일게다. 뭐 번 돈은 없고 나가는 돈은 일정하니 있는 돈 까먹고 앉아 시간 지나면 파산이지 별거 있겠나? 그래도 그저 고마운 것은 우리 부부 삼시 세끼 먹고 지내는 일 이외에는 크게 돈 들어갈 일 없으니 돈 문제로 걱정하지 않는 나날에 감사가 크다.

이즈음 미국 뉴스들이나 한반도 뉴스들을 보면서 아주 민감하게 걱정하고 날선 비관적 비판들을 하는 이야기들을 듣곤 한다만, 내겐 그리 와 닿지 않는다.

내 짧은 생각으론 그저 모두가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일 뿐이다.

이즈음 내 눈엔 쉽게 드러내기 힘들었던 미국의 아픈 치부들이 치료를 위해 까발려지고 있고, 한반도 역시 제 자리에서 자기 수를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첫 발 내 딛는 시간을 맞이한 듯 하다.

세상일에 그리 밝지 못하다만 그저 내가 믿는 건 단 하나.  신은 사람을 믿는다는 것.

그 믿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언제나 나는 진보이고, 민주이고 통일이고 내일은 희망이라는 것.

내 아이들과 아버지와 내가 서로 간 알지 못하는 오늘의 아픔을 딱히 나누지 않아도… 감사는 이어지듯이.

*** 빛이 있어 꽃이 아름다운 것은 아닐까?DSC00496 DSC00497 DSC00499 DSC00500 DSC00501

뉴스에

뉴스들은 언제나 흉흉하다.

매일매일 호들갑스럽지만 찬찬히 돌아보면 하루도 새삼스러울 게 없다. 짧게는 내가 살아 온 세월이 그러하고, 길게 보면 사람들이 사람살이를 시작한 이래 변함 없었다.

다만 오늘만 사는 우리들에겐 오늘도 호들갑스럽게 흉흉하다.

내 가게가 있는 도시에는 인종 혐오 특히 동양인 혐오 전단지가 뿌려져 범인을 찾고 있다는 소식도 있고, 나같이 동네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은 점점 힘든 세상이 될 수 밖에 없다는 뉴스들도 제법 그럴싸한 자료들을 내밀며 다가서고, 총기사고 등의 사고사건 기사들은 어제만큼 여전히 이어진다.

트럼프나 바이든이나 재어서 우열을 가리기 힘든 노인들이 얼굴로 나선 선거판도 그렇고, 한반도 뉴스들도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허나 따지고보면 이게 어제 오늘만 있었던 일은 아니다. 늘 그렇게 이어져 온 일이다.

시간이 흐르며 변하는 유일한 사실 하나는  사람 또는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아주 더디고 느린 걸음으로 사람다워 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건 내 믿음일수도 있다.

하늘에는 여느 해 유월과 다름없는 초여름 구름들이 나른하게 흐르고, 뜰에는 여름 꽃 봉우리가 트이고, 새들이 노닌다. 뒷뜰 언덕배미에서 풀 뜯던 노루 한 마리 나와 함께 눈싸움하다 슬며시 피해 달아나다.

뉴스들이 여전히 흉흉한 하루가 진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또 하루를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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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觀點)에

이른 아침 첫 손님으로 맞은 Susan에게 물었다. ‘가족들은 어떠니? 이즈음 뉴스들이 너희 가족들에겐 좀 힘들지 않니?’ 내 짧은 물음에 그녀의 대답은 제법 오래 계속되었다. 다음 손님이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그녀는 내 물음에 고맙다는 인사를 끝으로 내 세탁소를 떠났다.

Susan의 남편은 쌍동이다. 남편과 시동생, 쌍동이 형제들의 직업은 경찰이다. 형제 모두 현역에서 은퇴한 상태이지만 여전히 경찰 관련 일을 하고 있다. 두 집안의 아들들은 모두 현역 경찰이다. 이른바 경찰가족들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왈 백인들이다.

그녀는 이즈음 경찰관련 뉴스들이 코로나 바이러스 보다 더 무섭단다.

한가해진 시간에 옛 생각을 더듬는다. 어느새 스무 해가 훌쩍 지났다. 그즈음만해도 내가 참 꿈이 많았었다. 당시만 하여도 내가 사는 동네 다운타운으로 일컫는 윌밍톤시에는 장사하는 한인들이 제법 많았었다. 물론 지금도 여러 분들이 계시지만 그 때에 비하면 많이 쇠락한 편이다.

왈 흑인 거주 지역인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의 피해와 사건 사고들이 종종 일어나던 때여서 그 일을 의논하고자 시장과 경철서장을 만났었다.

그 때 시장이 내게 했던 말이다. ‘왜 한인들은 흑인 밀집지역인 시내에서 장사를 하면서 살기는 왜 여기서 안 살죠?’  내 체구에 비해 거의 세 배나 되는 인자한 모습의 흑인 시장께서 내게 던진 느닷없는 질문에 나는 잠시 망설이다 대답했었다. ‘제 가게가 시내에 있고요, 제 장인 장모가 가게 이층에서 산답니다. 모든 한인이 다 그런 건 아니랍니다.’

생각해 볼수록 비겁한 대답이었다.

물론 내 장인 장모가 당시 시내에 있던 작은 건물에 있었던 내 세탁소를 돌보면서 이층에 살고 계셨던 것은 사실이지만, 시장의 물음에 대한 응답은 적절치 않았다. 그곳에서 장인 장모는 두 번에 걸쳐 권총 강도를 만났었다. 건물을 처분한 지도 오래이고 두 분 이미 돌아가셨지만 그 때 일들을 생각해면  장인 장모에게 지은 내 죄가 크다.

그리고 몇 년 전 아들녀석 장가갈 때 이야기다. 느닷없이 결혼날짜를 잡고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아들녀석에게 나는 주체할 수 없는 화를 다스리지 못했었다. 그렇게 갑자기 만나게 된 며느리는 정말 새까만 얼굴의 흑인이었다. 아마 내 화를 더욱 키운 까닭이었을게다.

몹시 힘들었던 여름이었다.

아들녀석의 가출이 이어졌고, 어느 날 아들놈의 연락이 있었다. ‘우리가 다니는 교회 목사님이 아빠를 한 번 보자는 데 한 번 만날 수 있어?’ 나는 녀석에게 말했었다. ‘이눔아! 이건 내가 해결할 문제지, 목사님이 해결해 주는 게 아니야!’

그 여름에 우리 부부는 기차를 타고 서부 여행을 했었다. 그 여행에서 나는 몹시 부끄러운 내 모습을 만났었고 그 해 늦가을 나는 까만 얼굴의 며느리를 맞았다.

그 어간에 아주 엉뚱한 자리에서 아들 녀석이 말한 그 한인 목사님을 만났다. 그의 이름 이태후 목사. 만난 곳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에서 이다.

며칠 전 그가 신문에 기고한 글을 읽으며 내 마음에 넘치는 감사 하나.

내 아이들이 이런 목사님 영향을 잠시라도 받고 자랄 수 있었다니…. 그저 감사다.

이즈음 나는 며늘아이 얼굴을 보며 아들녀석 걱정을 잊는다. 덤으로 신앙과 교회관 나아가 정치적 관점 역시 엇비슷한 오리지널 까만 얼굴들인 사돈에게 얻는 감사까지.

그리고 이젠 점점 굳어져 가는 생각 하나.

무릇 관점의 핵은 인종도 신념도 이념도 사상도 더더구나 신앙도 다 헛것이라는 것. 다만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는 사람의 관점,  그 마지막 하나 아닐까?

더운 날, 마루 새로 깔다 허리 피며 만나는 새 생명들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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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0803

벗에게

내게도 양복 정장이 몇 벌은 있다만 양복을 입을 기회는 그리 흔치 않다. 물론 한복도 몇 벌이 있다만 그걸 입을 기회는 거의 없다. 그저 늘 캐쥬얼 차림이다.

양복은 거의 사십 년 전에 맞춘 것들이다. 나는 아직도 그 무렵 결혼 예복으로 맞춘 양복을 입는다. 지난해 아내가 큰 맘 먹고 사준 양복 한 벌이 있는데 아직 입어 볼 기회가 없었다.

뭐 내가 검소하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아주 비정상적으로 작고 마른 체구이다. 그 어떤 기성복도 나를 위한 것은 없다. 특히 팔길이도 짧아 어쩌다 몸에 맞는 옷을 찾는다 하여도 아내가 꼭 팔 기장을 줄여 주어야만 한다.

그런 일들이 번거로워 그저 한 번 몸에 익은 옷을 다 떨어질 때까지 입고 산다. 아내는 내가 입는 옷들을 일컬어 제복이라고 부른다.

캐쥬얼 옷들은 비교적 고르기도 편하기도 하고 싸서 좋다. 때론 아동복(?) 코너에 가서 고르면 맞춤 옷 같은 것을 만나기도 한다.

암튼 옷에 대해선 나는 거의 무관심하다.

친구도 마찬가지인 듯 하다.

내 친구들은 거의 모두 오래 전 친구들이다. 물론 얼굴 보거나 만난 지도 몇 십년 된, 그저 그 시절 모습을 기억하고 있는 친구들이다.

내가 딱히 의도한 일도 아닌데 그리 된 것을 보면 다 모자란 내 성격 탓일게다.

이젠 한국에서 산 세월보다 미국에서 산 세월이 더 길어졌지만 여기서 친구라고 부를 사이는 딱히 없다. 하여 때론 슬프다.

이민 초기 몇몇이 있었는데 다들 초라하게 멀어졌다. 이젠 어디 사는 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이들 하고만 가까이 지냈다. 다 내 탓이다. 그게 또 내겐 이상한 일도 아니다. 모두 내겐 참 좋은 친구들이었다.

그러다 어찌어찌 오늘 옛 친구 P가 소식을 전해왔다. 걸쳐 걸쳐서.

내 어머니 돌아가셨다는 소식 전해 듣고 그가 보내 온 인사 가운데 멋진 가죽 점퍼가 있었다. 도대체 내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가죽 점퍼라니? 게다가 정말 내게 어울리지 않는 고가의 상품이었다.

전해 전해서 들은 그가 했다는 말이다. ‘이건 딱 맞을거야!’

그랬다. 가죽 점퍼 사이즈는 내게 딱 맞았다. (물론 소매 기장이야 줄여야 하지만… 이건 누구도 맞출 수 없다. 정말 다행인 것은 내 아이들은 나를 닮지 않았다. 그래 또 감사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이제야 내가 철드나보다. 느닷없이 눈물 한 줄기 뚝.

내게도 친구가 있었구나. 아! 이 행복이라니.

오늘 밤 P에게 내 행복의 90%는 나누어 주고 싶다. 나도 10%쯤은 간직하고….

벗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