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 21

교회 담임목사님이 장례식순을 보내 주셨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찬송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와 아버지의 뜻인 ‘이 세상 살 때에’를 모두 식순에 넣어 주셔서 감사했다. 다만 ‘고인 약력’ 순서가 내 맘에 걸렸다. 하여 목사님께 전화 부탁을 드렸다. ‘고인 약력’이라는 순서를 따로 넣지 마시고 제가 가족 인사 드릴 때 짧게 함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노라는 부탁이었다.

솔직히 내 어머니의 약력이란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단촐하다. ‘무학(無學)으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다 가셨다.’ 이게 모두다.

어머니가 한글 성경을 읽으시고 오랜 미국생활에서 눈치코치 의사 소통을 하실 수 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한글도 깨치시고 아파트 이웃 노인들과 인사치레는 하시고 사셨다.

그런 내 어머니의 삶이 ‘고인 약력’ 소개하는 말로 덧칠해지는 게 싫었다. 신앙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증손들은 어머니를 ‘왕할머니’로 불렀다. 아이들에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였으니 ‘왕할머니’일 수도 있지만, 진짜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왕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소농(小農) 가정의 삼남 삼녀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오빠 동생들을 챙기며 섬기는 왕 노릇 하셨었다. 73년 함께 사신 내 아버지 삼시 세끼 어머니 손 거른 일, 손가락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섬기셨다. 당신 슬하 일남 삼녀 새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뱃속에서 낳은 손주 증손들까지 당신 생각에 최선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러 섬기셨다.

그렇게 고집 세셨다.

그런 내 어머니 말년에 자주 입에 달고 사시던 말 ‘그저 감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일년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시간이 오락가락 하실 때, 이따금 돌아가 사시던 시간은 6.25 전쟁통과 70년대와 80년 대 초 내가 젊었던 시절이었다.

전쟁통 피난길의 고난과 첫딸을 잃어 버린 아픔 그리고 남편의 부상 등이 평생 어머니의 고통으로 남아 있게 된 시절은 나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순사들이 당신의 아들인 나를 잡으러 온다는 말엔 ‘그 일이 그렇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 스물 나이 어간에 경찰서, 중정, 계엄사 합수부 등에 몇차례 끌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지극히 경미한 일이었거니와 딱히 내가 특별히 한 일도 없어 나는 이젠 다 묻은 일이다만 어머니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시절이었었나 보다.

그리고보니 오늘이 한국 날짜로 5월 18일이다.

내 부모가 겪어낸 한국전쟁으로부터 광주항쟁 최근의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들의 가슴을 후려 파내어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사건들에 내가 이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다 내 어머니 덕이다.

거하게 무슨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어머니보다 더 뼈저린 아픔을 이고 살아간 그리고 또 살아갈 어머니들을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어야 사람이라는 그 맘 하나, 내 어머니가 주셨다.

***오늘 하루 제일 기분 좋은 소식 하나. 지난 며칠 일기 예보의 변화다. 장례일에 비 예보가 80%에서 70%로 다시 60%로 줄더니 오늘은 0% 이따금 흐림으로 바뀌었다. 모두 내 어머니 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