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은 고요하다. 어머니 곁에 앉아 함께 숨을 쉰다. 아니 엄마와 함께 숨을 쉰다. 엄마는 종이장같은 가슴을 풍선처럼 만들어 큰 숨을 내리 쉬다가 순간 가슴은 다시 평면이 되어 고요해진다. 한손으로 차가운 엄마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엄마의 얼굴과 이마를 쓰다듬는다. 엄마가 컥 소리와 함께 목에 모아 두었던 숨을 내쉬면 나는 안도의 숨을 쉰다.
저쪽 다른 침대에 누워 이 고요와 숨소리를 허락하며 조용히 주무시는 아버지가 고맙다. 아내가 카톡으로 찬송가를 들려드리라고 음악을 보내왔지만 나는 이 고요가 더 좋다. 아내의 재촉 카톡 소리에 찬송가를 들려 드리지만 어머니는 무반응이다. 엄마도 나와 함께 숨쉬는 게 더 즐거울지 모른다.
엄마가 잠시 안정적인 숨소리를 이어간다. 일어나 창밖을 본다. 누군가 오늘이 어머니날임을 알리는 예쁜 그림과 글씨를 길에 그려 놓았다.
엊그제였던가? 집으로 꽃병 하나 배달이 왔다. 아내와 나는 당연히 딸아이가 보낸 것이려니 했다. 꽃에 꽂힌 카드를 열며 아내가 ‘웬일이야!’하며 소리를 높였다. 우리 내외의 예상을 깨고 아들내외가 보낸 꽃이었기 때문이다. ‘며늘아이가 시켰고만…’ 내가 던진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다 아들녀석 생각으로 헛웃음 짓다 떠올려 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이다.
저녁에
- 김광섭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나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화가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모티브가 된 시이다. 가수 유심초의 노래로 더욱 알려져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내 나이 스물 언저리,옛 명동 국립극장에서 본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연극을 함께 보았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난다.
인연으로 치자면 엄마와 나는 수 억겁을 쌓은 연일 터이고 절대적인 만남의 예정이라면 신이 맺어 준 결단코 뗄 수 없는 만남이다.
고요한 방에서 그 연과 절대적 만남으로 이어진 엄마와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은 가늠하지 말아야 할 축복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시는데 소리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만을 반복한다.
엄마는 이제 별이 되려고 한다. 별이 되기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의 숨조차 다 태우는 중이다.
정말 고마운 일 하나. 별과 사람, 하루와 천년 또는 오늘과 내일 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신을 엄마와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
허나 나는 아직 하루를 센다.
엄마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