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15

바람과 꽃비와 새소리에 홀려 아침 한 때를 보내다.

이젠 곡기 끊으신 어머니는 내내 주무시다가도 내가 찾아 가면 가는 눈 뜨시고 똑같은 말을 몇 번 반복하시곤 다시 눈을 감으신다. ‘아이고 어디 갔다 이제 오니? 왜 이리 오랜만에…’

덩달아 급속히 오락가락이 심해지시는 아버지는 며칠 전 당신이 꼭 움켜쥐고 계셨던 몇 가지 기록들과 물건들을 내게 건네시며 말씀 하셨다. ‘나도 이젠 다 놓아야겠다.’

오후 들어 비바람이 거세다.

딱히 손에 잡히는 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 알베르 카뮈의 ‘최초의 인간’을 꺼내 들었다. 문득 생각난 ‘아버지를 찾아서’라는 소제목 탓이었다. 언제 읽었더라? 가물하다. 옛날식 번역은 이제 내게도 낯설다.

<광장에서 들려오는 한줄기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야외 음악당 주위 아랍인들의 단단하면서도 무표정한 얼굴, 베이야르의 웃음과 고집 센 얼굴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고 또 폭발의 소리가 들리자 파랗게 질리던 어머니의 얼굴을 가슴을 쥐어 뜯는 듯한 정다움과 슬픔과 함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가 오랜 세월의 어둠을 뚫고 걸어가는 그 망각의 땅에서는 저마다가 다 최초의 인간이었다. 또 그 땅에서는 그 역시 아버지 없이 혼자서 자랐을 뿐, 이야기를 해도 좋을 만한 나이가 되기를 기다렸다가 아버지가 아들을 불러서 집안의 비밀을, 혹은 오랜 옛날의 고통을, 혹은 자신이 겪은 경험을 이야기해주는 그런 순간들,….>

<자기 자신 삶의 관객으로 살 필요가 있다. 거기에다가 그 삶을 완성해 주는 꿈을 보태기 위하여.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삶을 꿈으로 꾼다.  – 최초의 인간 ‘노트와 구상’에서>

누구에게나 하루는 최초의 인간이 되는 순간이다. 내 어머니와 아버지의 시간들 역시.

하루 -14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시늉을 해 본다. 물론 결과는 모른다. 어떤 끝이든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내 나이 값은 해야 하므로. 그저 오늘 하루 흙을 만지며 보낸 하루에 감사하다.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씨앗들, 고작 일 센트에 수십 개를 손에 넣은 씨앗들을 이리 애지중지 귀히 여기고 다루는 새로운 경험에 그저 놀라며 땀을 흘리는 참 이상한 기쁨을 맛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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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질을 하다가 생각난 옛일 하나.

이제껏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매를 맞기는 많이 맞았으되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거의 없다. 거의라는 말을 덧붙여야 하는 까닭은 딱 한차례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으되 부끄러운 적이나 때린 이들에게 져 본 적은 없다는 우김질을 해본다. 적어도 내 생각은 그러하다.

딱 한차례 남을 때려 본 일이 있다. 사십 수 년 전 군대에서 겪은 일이다. 삼십 수 개월 군대생활을 하면서도 맞기는 많이 맞아 보았지만 누군가를 때려 본 적은 없었다. 제대를 거의 앞두고 일어났던 그 일 말고는.

전방 교육사단 말단부대 소총수였던 내 군생활은 그저 밥 먹고 훈련 받고 봄 가을로 땅 파는 일의 연속이었다.  땅 파는 일이란 고지에 교통호를 파고 떼를 옮겨다 심고 벙커를 짓고 하는 일들이었다.

말단 소총수였다고 하지만 나름 열외병으로 다른 병사들과 달리 여러 편익들을 누렸었다. 이른바 문제 학생으로 끌려갔던 군대생활은 초기 한 반년 동안은 몹시 힘들었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적응되다 보니 견딜만하게 되었다. 중대 인원 120여명 가운데 대학 재학중 이상의 학력자가 나 혼자이다 보니 비록 비밀취급인가를 받을 수 없는 처지에서도 여러 열외 조건들을 참 많이 누렸었다. 일테면 각종 위탁 교육들은 도맡아서 다녔고 툭하면 대대급 이상의 부대에 임시 차출되어 가곤 했기에 그리 혹독한 훈련이나 심한 노동에서 제외되곤 했었다. 동료 부대원들에게 미안함도 있었고 그런 까닭으로 많이 맞기도 했었다.

그렇게 제대 한 두어 달 남겨두고 나갔던 벙커 작업이었다. 산 아래 쌓아 둔 자갈과 모래 등을 산 정상으로 옮기는 작업을 맡은 우리 소대원들은 등짐을 지고 오전에 서너 차례, 오후에 서너 차례 산 정산을 등짐을 지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말년이라 텐트지기를 했었을 수도 있었는데 때론 아둔했던 나는 등짐을 지고 그 산을 오르고 내렸다. 그러다 보게 된 일이다.  체격 좋은 울릉도 출신 원일병이 갓 전출 온 이등병 두 명을 마구 때리고 있는 것이었다. 사연을 들어보니 두 명의 이등병이 요령을 피우며 남들이 두 번 산을 오르고 내릴 때 한 번 밖에 하지 않아 군기를 잡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웬지 모르게 화가 나서 원일병을 엎드려 뻗쳐를 시키고 주변에 있던 나무 몽둥이로 그를 몇 대 때렸다.

내가 유일하게 남을 때렸던 일이다.

원일병이 제대하던 날, 그와 동대문 고속버스 터미널 근처 국밥집에서 소주 한잔을 나누었다. 그가 꼭 보자고 했었기 때문이었다.

그 때 그가 한 말이었다. ‘김상병님(나는 만기 제대 상병이었고 그는 예비역 병장이었다.) 내가요, 이젠 울릉도 가면 언제 육지 올지 몰라요. 김상병님 올 여름에 울릉도 꼭 한 번 오셔! 내가 멋지게 모실게요. 김상병님이 나 때릴 때 웃음 나와서 혼났어요.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간지럽더라고요. 암튼 김상병님한테 맞은 건 내게 참 좋은 추억이예요.’

그해 여름 나는 포항에서 거의 열 시간 동안 배를 타고 울릉도를 찾았었다. 도동에서 그의 집까지는 통통배를 타고 반시간여, 고작 이십 여 호 가구들이 이룬 작은 마을이었다. 그 곳에서 보낸 열흘 간의 시간은 지금 생각해 보아도 꿈만 같다.

원일병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원색의 바다 속에 들어가 작살로 잡은 각종 해물 회와 막걸리와 소주로 나를 대접했고, 열합(홍합)밥에 고추장을 썩썩 비벼 내 배를 채워 주었었다.

아! 원일병 그도 이젠 더는 작살질은 못하리라.

삽질에 떠오른 옛 생각에 하루를 웃다.

저녁나절에 미하엘 엔데의 ‘자유의 감옥’을 읽다.

<완전한 자유는 완전한 부자유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루 – 13

삽과 곡괭이를 들고 땅을 뒤집으며 보내는 하루 해는 참 짧다. 솔직히 내가 하는 삽질로 무엇이 바뀔지는 아직은 전혀 모르겠다. 그저 흙을 손에 묻히고 땀을 흘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이즈음 내가 누리고 사는 축복이라는 생각 뿐이다.

내가 엄청 부자라는 것도 이즈음 처음 깨달은 사실이다. 이웃들 눈치 보아야 하는 잔디 밭 빼고도 내 맘대로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땅이 족히 삼백 평이 넘으니 이미 족함을 넘어 사는 삶이다.

유튜브와 구글 신(神)의 도움을 받아 흉내 될 수 있는 일들을 다해 본다만, 모를 일이다. 내가 꽃을 피우게 하고 채소를 거두어 소주 한 잔 할 수 있을런지는.

아무튼 구근들을 심고 모종을 만드는 시늉도 해 보고 씨앗도 뿌려 본다. 언덕받이엔 야생화 씨앗들도 넉넉히 뿌려 두었다.

첫번 째 채마밭은 아직 땅을 고르기도 전에 손님이 먼저 다녀 가셨다. 다람쥐나 토끼는 아닌 듯하고 여우나 사슴일지도 모르겠다. 미처 자주보는 손님들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 또한 내가 누리는 부요다.

허나 이 낯선 내 부유한 형편보다는 하루 열 두시간 씩 세탁소에서 일하는 날들이 아직 내겐 편한다.

모처럼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다.

<‘이제’는 사는 때, 곧 지금을 말합니다. ‘그제, ‘어제’는 내가 사는 때가 아닙니다. ‘이제’가 내가 사는 때입니다. 사는 때가 이제입니다. 사는 곳이 여기입니다. 이어이어 내려와서 여기가 됩니다. 하느님이 얼 줄로 나를 이어주고, 나는 하느님과 얼 줄로 이어지고 다시 이어져 여기에 온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때나, 곧 언제나 이제입니다. 다 이제(영원한 현재)가 됩니다. 어머니 뱃속에서 나올 때도 ‘이제 나왔습니다.’하고, 운명할 때도 ‘이제 숨을 거두었습니다.’합니다. 여기와 이제를 혼돈해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제와 오늘과 내일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루(오늘)만이 영원히 있는 것이다. 오늘의 ‘오’는 감탄사이고 ‘늘’은 언제나 항상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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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서삼수

내가 이민 초기에 알게 된 사람들로 이제껏 연을 맺고 사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큰 형님 뻘이다. 이상하게도 당시 알게 된 내 또래 사람들은 모두 동네를 떠났다. 이젠 나이 탓이기도 하고 내 못된 성격 탓이기도 하지만 그리 가까이 지내는 한인 또래들은 없다.

서삼수 장로님. 그가 가셨다. 큰 형님 뻘인 그는 종종 내 친구가 되어주곤 했었다.

오늘 아침 그의 장례식이 있었다. 때가 때인지라 장례식에 참여할 수 인원은 극히 제한적이어서 예식이 끝난 후 그의 운구가 교회 마당을 한 바퀴 돌 때 교인들이 각자의 차 안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었단다. 아내는 마지막 인사는 드려야 한다며 함께 가자고 재촉을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던 날, 곰곰 생각해 보니 내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동네에서 나를 내 이름으로 불러주었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를 ‘영근씨’라고 불렀었다. 나는 그가 부르던 호칭이 너무 좋았다.

그렇다고 그와 내가 살갑게 가까운 사이도 아니었거니와 세상 바라보는 눈과 생각이 엇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신앙에 대해서도 그리 깊이 있는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적도 없다. 더더구나 그는 전형적인 대구 사내여서 많은 부분에서 나와는 생각을 달리하는 것들이 많았던 이다.

그러나 기억컨대 그와는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살았다. 사람사는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때 그와 나는 죽이 참 잘 맞았다. 생각지도 않을 때 문득 내 가게를 찾아와 한참을 사는 이야기로 꽃 피우기도 했었고, 이따금 안부 전화를 나눌 때면 그저 서로 사는 이야기로 한참을 이어가기도 했었다.

내게 언제나 사람 냄새 물씬 풍기던 그가 갔다. 일흔 여섯. 너무 이르다.

올초에 죽을 고비를 한번 넘겼던 그를 내가 모처럼 참석했던 주일 예배에서 만났었다. ‘영근씨, 교회 좀 나와라. 가끔은 사는 이야기도 하며 살아야지!’ 그와의 마지막 인사였다.

사람 서삼수, 그를 잃다. 참으로 미안하다.

*** 이 땅에서 그가 사람으로서 끝내 풀지 못했던 한들이 이제 한순간에 풀리는 신의 은총이 그와 함께 하심과, 오늘을 아파할 그의 아내 서후임 권사님 그리고 가족들에게  신의 크고 놀라운 위로와 위안이 함께 하심을 믿고 고백하며…

걱정에

너나없이 걱정과 염려가 많은 이즈음, 내 스스로에게 보내는 마음으로 일요일 아침에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벌써 41년이네!’ 며칠 전 아내가 툭 던졌던 말입니다. ‘뭐가?’라는 제 물음에 아내가 한 대답은 ‘우리가 만난 거.’였습니다.(이튿날 아내는 42년 이라고 정정을 했답니다.)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아내와 함께 해 왔습니다. 그 세월 중 세탁소를 이어 온 30여년 동안은 거의 24시간을 함께 했으니 정말 많은 시간을 함께 해 온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 부부가 얼마나 많이 싸우며 살아 왔을까요?

최근 가정에 머무는 시간들이 많아지면서 부부싸움이 늘고 아동학대도 심해졌다는 신문기사를 읽다가 생각난 저희 부부의 지난 시간들이랍니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갑니다만, 세탁소를 한 10여년 했을 무렵이랍니다. ‘세탁소만 하다가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세탁소 하려고 이민을 왔었나? 더 늦기 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에 빠져 세탁소를 아내에게 맡기고 제가 새로 시작한 일은 신문사였습니다. 워싱톤에서 뉴욕까지 미국 동북부 지역에 사는 한국계 시민들을 위한 한국어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던 것이지요. 물론 아내가 찬성한 것은 아니었답니다.

신문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일천한 경험과 이재에 밝지 못했던 저의 부족함으로 신문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한 이년 후 다시 세탁소롤 돌아온 제게 남은 것은 빚 뿐이었습니다.

가능한 한 팔 수 있는 것은 다 팔고 오직 세탁소 일에만 매달려 빚을 갚았답니다. 그 때 이후 세탁소는 내 천직이 되었고, 그 무렵부터 쓰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손님들에게  보내는 주말편지랍니다.

다시 세탁소로 돌아왔던 그 해 겨울 매우 추었던 어느 저녁이었답니다. 당시 우리 부부는 아내와 제 차를 모두 판 뒤 600불을 주고 산 아주 오래된 중고차를 타고 다녔답니다. 자동차 창문이 열리지 않는 차였답니다. 그 추운 저녁 세탁소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가려고 시동을 걸었답니다. 그 때 아내가 웃으며 제게 했던 말이랍니다. ‘야! 이 차가 벤츠보다 좋네! 이렇게 추어도 단 한번에 시동이 걸리네!’

그 날 이후도 우리 부부는 여전히 하루에도 몇 번씩 싸우며 살지만, 그 추운 겨울 저녁에 아내가 제게 준 이해와 배려 그리고 사랑을 넘어서는 싸움은 해 본 적이 없답니다.

너나없이 알 수 없는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들을 안고 사는 이즈음입니다. 저희 부부도 마찬가지랍니다. 당장 내야 할 렌트비를 비롯한 금전적인 걱정 뿐만 아니라 노부모와 아이들에 대한 염려 등등  그 두려움에 빠지기 시작하면 끝이 없답니다.

하여 오래 전 읽었던 아주 짧은 이야기 하나 나눕니다.

<어느 마을에 죽음의 사자가 찾아왔습니다. 죽음의 사자는 마을사제에게 돌림병으로 200명을 죽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을사제는 죽음의 사자와 담판을 지어 사망자의 수를 100명으로 줄였습니다. 그런데 돌림병이 지나가고 난 후에 살펴보니 마을 주민이 700명이 죽었습니다. 마을 사제는 죽음의 사자에게 왜 약속을 어겼냐고 따졌습니다. 그러자 죽음의 사자가 대답했습니다. “나는 100명밖에 죽이지 않았어, 나머지 600명은 염려로 죽은 거야”>

제 이야기를 늘어 놓다보니 오늘 편지는 조금 길어졌습니다.

서로 간에 거리 두기를 해야만 하는 이런 상황도 결국은 끝날 것입니다. 당신과 당신 가족들 그리고 안녕을 묻는 이웃들 사이에 걱정, 염려, 두려움 대신에 사랑과 이해, 용기와 희망이 넘쳐나는 이 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3bjFd44

하루 – 12

오늘 내가 사는 곳의 주지사는 학교 문을 일년 동안 닫을 수도 있다고 했단다. 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아직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상황에 따라 그렇게 결정할 수 있다고 했단다. 지난 달에 5월 15일까지 학교 문을 닫겠다고 발표한 이후 나온 주지사의 말이다.  아무리 빨라도 9월 새학기가 시작되기 까지는 각급 학교가 문을 열지 않을 것 같다.

학교 앞에서 구멍가게를 하는 내 입장에서 보자면 올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내 가계 형편은 긴 겨울이 될 듯 하다. 살며 걱정 없던 날이 얼마나 되었던가?

뒤돌아 보며 곰곰 생각해 보니 상업고등학교를 나왔건만 난 이재(理財)와는 참 거리가 멀다. 나를 조금만 아는 이들은 거의 모두가 동의하는 일이다.

이제껏 살며 몇차례 하고 싶은 일들을 해보겠노라고 야심차게 일을 벌려 보았지만 그 때 마다 번번히 거의 만신창이 실패로 끝났었다. 그나마 삼십 년 넘게 붙들고 있는 세탁소 하나는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붙들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나를 너무나 잘 아는 아내가 버텨낸 산물이다.

가게 문을 제대로 열지 못한 지 어느새 한달 째이다. 짧게는 몇 달, 길게는 아직 가늠할 수 없는 시간들의 가계를 재단해 볼 능력이 없는 내가, 그래도 살아 온 나이 값은 하노라고 나름 주판알을 튕겨 보는 이즈음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내는 주판알엔 관심 없고 그렇게 주판알을 튕기는 나를 기특히 여기는 듯 하다.

솔직히 돈이야 이 나이에 없으면 없는 대로 살 수 있는 준비가 이미 끝난 터이라 주판알 엎어 버리면 그만일 터이고, 문제는 느닷없이 남아 도는 시간이다.

남아 도는 시간 사이로 잽싸게 찾아 드는 놈은 게으름이다.

그 게으름 이겨보고자 손에 든 것은 삽, 바로 삽질이다. 집 앞뜰 화단을 뒤엎고, 지난 해 가을 몽땅 베어버린 뒤뜰 대나무 밭을 뒤집는 삽질이다. 꽃 심고, 채마밭 한번 일궈 보자고 작심하며 해 보는 삽질인데, 모를 일이다. 꽃을 보게 될런지 또는 우리 부부 저녁상에 올릴 푸성귀를 거둘 수 있을지도.

그냥 요 며칠  하루 하루 그 꿈으로  삽질하는 즐거움에 그칠지라도, 그 또한 하루의 즐거움이려니.

늦은 저녁, 뉴스들을 훑다 보게 된 동영상 속 장면 하나에 딱히 뭐라할 수 없는 눈물 흘리며 감사하는 마음 하나.

세월호 6주기 추모 행사에 참여한 국회의원 당선자 세 사람의 모습을 보며 흐른 눈물이었다.

이런 젊고 따듯하고 유능한 이들을 앞세운 시민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을 그려보는 재미라니.

욕심이 아니라 하루를 위하여 드는 모든 삽질엔 뜻이 있을 터이니.

또 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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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편지

손님들에게 부활절 아침 편지를 띄우다.


 

부활절 아침입니다. 기독교인이든 다른 종교를 믿든 또는 아무 종교도 없든지 누구나 이 맘 때 쯤이면 밝고 환한 기분에 젖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화사한 계절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번 부활절 분위기는 정말 낯섭니다. 이런 느낌은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이 낯선 상황이 제가 맞는 올 부활절과 이 계절의 뜻을 다시 새겨보게 하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세탁소를 시작했던 30여년 전에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은 일년 중 세탁소가 가장 바쁜 시간이었습니다.  새벽에 세탁소에 나와 밤 늦게까지 일했던 기억이 있답니다. 특히 흰색 정장과 흰색 드레스, 흰색 블라우스에서 아이들의 옷까지 흰색 빨래들이 연중 가장 많이 쌓이곤 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며 점점 그런 풍습들은 사라졌습니다. 부활주일 전 한 주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평범한 한주간이 되었고, 최근 십여 년 이래로는 오히려 평소보다 한가한 주간이 되었답니다. 이미 사라진 풍습에 더해 부활절 휴가철를 보내는 사람들의 유행도 달라진 탓입니다.

사람살이 모습이 늘 그렇듯, 변해가는 주변 상황에 적응하며 살게 마련인지라 이 맘 때 세탁소가 한가해진 모습에 그려러니 하며 산답니다.

올 부활절은 그런 한가함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누군가 제게 당신은 어떤 종교를 가졌느냐?고 물을 때면 저는 크리스챤이라고 대답을 하지만, 그다지 성실한 신자는 아닙니다. 일년에 교회 나가는 회수라야 손가락으로 셀 수 있는 정도랍니다.

다만 종교에 대한 관심은 많은 편이어서 성서나 불경 또는 유교의 경전들을 틈나면 손에 들고는 한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든 것에 얼치기랍니다. 단 내 직업인 세탁업에 대해서는 얼치기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얼치기인 제가 느끼는 올 부활절 아침의 생각이랍니다. 비록 이런 부활절은 처음이지만 부활의 뜻은 변함없이 한결 같다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얼치기인 제가 새기는 변치 않는 부활의 뜻이랍니다. 하루 하루 주어진 일상에 감사하며 이웃들에게 밝고 맑은 정(기운)을 전하며 사는 삶의 현장이 바로 제가 부활하는 모습이라는 생각 말이지요.

부활절 아침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부활의 아침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2wxjaYm

하루 -11

은퇴한 이들에게 물으면 종종 듣게 되는 대답이다. ‘당신도 해 봐. 또 바쁜 일들이 생겨요. 그냥 뭔지 모르게 그냥 바쁘다니까…’

코로나 바이러스 탓에 시간이 넘쳐난다 했더니 그도 잠시, 계획 이외에 바쁜 하루를 보냈다. 엊그제 마치 지붕이 날라갈 듯 심한 비바람이 일더니 실했던 이웃집 사철나무 허리가 댕강 부러져 내 집 뒷뜰 언덕배미로  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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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사내와 오전 내내 쓰러진 나무 정리를 하고 샤워를 끝낼 무렵, 누이의 전화를 받았다.

예약된 hospice 시설에서 어머니를 위한 침대가 지금 온다고 하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며칠 전 어머니의 임종을 맞는 듯 했었다. 응급으로 모시고 갔던 병원에서의 결과는 이제 삶이 아닌 죽음을 준비할 시간 이라는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먼저 보내 드린 장인 장모의 경험으로 인해 조금은 차분하게 준비할 마음을 가다듬는다. 이젠 온전히 신이 주관하는 시간이다. 내 어머니의 삶은.

오늘 예정되어 있던 유일한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집으로 돌아와 땀 식힐 시간 없이 컴퓨터 앞에 마주 앉았다. 세월호 6주기를 추모하는 필라 세사모 친구들의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때가 때인지라 함께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으로 추모 행사를 함께 하기로 한 시간이었다.

<사람이 사람인 까닭은 이웃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은 2014년 4월 16일을 잊지 않고 쉼 없이 활동해 왔습니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 모르던 사람들이 서로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뿌리내린 이곳 필라델피아에서 6년 동안 함께 기억하고 연대하고 행동해 왔습니다. 어려움도 부족함도 많지만, 진상규명이 완전히 이루어질 때까지 우리의 기억과 연대와 행동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세월호와 아이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힘겹게 견뎌온 가족들과 생존 학생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노력해 온 모든 분들이 이 어려운 시기에 건강하시고 안전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행사에서 필라 세사모를 대표해 이선아선생이 드린 추모사의 일부다.

오늘 이태후 목사님께서 선포해 주신 말씀은 가슴을 깊게 울렸다.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버리고 만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끝없는 사랑을 외치고 베풀며, 그들이 끝내 배경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사람이기를 위해 온 몸을 바쳤던 예수에 대한 선포였다.

그리고 함께 본 영화 한 편, ‘부재의 기억’이다. 보며 절로 흐르는 눈물 감출 수 없었다. 딱히 뭐라 표현 못할 분노의 눈물이었다.

예수가 그의 죽음을 앞두고 가장 도두라지게 했던 행동 하나가 바로 분노이다. 그리고 욕설도 따랐다. 바로 그 지점이랄까? 저절로 나오는 욕에 이어진 눈믈이다.

그렇다. 내가 살아가는 이 동시대에 누군가의 배경이 되어 버리고야 마는 죽음과 삶에 대해 고뇌하고 욕하고 저항하며 함께 하는 이웃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축복이다.

모든 부활은 눈물 끝에 온다.

하루해가 또 저문다.

내일은 부활의 아침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며.

내 집 풍경은 이미 온통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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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 10

TV에 빠져 있던 아내가 혼자 중얼거리며 숫자를 읊더니 ‘에고 오래 되었네’하며 한마디 던졌다. ‘벌써 사십 일 년 전 이네…’. ‘뭐가?’하는 내 물음에 대한 응답. ‘우리 만나 거…’

코로나 바이러스로 갑자기 차고 넘친 시간에 조금씩 적응되어 간다. 이젠 공원 출입 인원도 제한한다는 주정부의 발표 이후 집안에서 보내는 시간은 더욱 길어졌다. 뒷뜰에 텃밭이라도 만들어 놀아볼까 하며 세운 하루의 계획은 비바람 치는 날씨 탓에 내일로 미루었다.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아 두었던 오래된 서류 상자들을 꺼내 정리하다. 정리했다기 보다는 오래  묵혀 둔 쓰레기 파기 작업이었다. 종이 파쇄기가 온 종일 일을 참 많이 했다. 오래된 각종 기록들 일테면  내 잡기장이나 은행 및 세무 서류, 비지니스 관련 온갖 문서들 또는 동네 일하면서 쌓아 둔 각종 문서들을 파쇄하며 새삼 떠오르는 지난 기억들 마저 애써 지우다.

그러다 듣게 된 아내의 시간 ‘사십 일 년’이다.

그리고 문득 떠오른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이라는 성서구절 하나. 그것이 어찌 새 하늘 새 땅을 주관하는 주(主, 神,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그 무어라 부르든)이거나 새 하늘 새 땅을 사모하며 기다리는 신자들 만이 누릴 몫이랴!

그저 오늘을 ‘하루가 천 년(千年)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삶을 누리는 모든 이들에게 던져진 물음이자 답인 것을.

마치 시간이 정지 되어 있는 듯한 이즈음 이야말로 사람살이가 왈 백척간두 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하는 곳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리고 보니 부활주일이 코 앞이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끝나는 곳에서 더욱 가까워진 이웃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날 수 있기를.

사십 일 년이 이미 하루이고, 때론 하루가 사십 일년이 아닌 천년이 되곤 하는 우리 부부 역시. 사랑으로.

(어쩌다 찾아 낸 몇 년 전 아내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함께 찍은 사진이 거의 없다는 것에 놀라다.)

하루 -9

생각치 않게 주어진 넉넉한 시간들. 더는 낯설다고 외면할 수도 없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들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찌할고, 어찌할고를 되뇌이다  찾아낸 두가지 보고(寶庫).

KBS 다큐멘터리 연속물들과 내 집에 눈길 안 주고 버려 둔 땅이다.

‘차마고도’와 ‘다르마’에 빠져 보내는 시간들이 마치 오래 전부터 준비된 일인 듯하다.

공원을 찾아 걷는 일도 눈치 보아야 하는 세월에 찾은 일 하나, 뒷뜰 언덕배미 손길 눈길 안 주었던 땅을 뒤집어 보는 일. 어쩌면 평생 해보지 않았던 밭일에 나설 수도.

그래, 주어진 하루에 감사하는 게 무릇 종교인 것을.

앞뜰엔 이미 봄이 오셨다. 마치 부활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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