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 두가지

돌아볼수록 질척거리며 살아 온 흔적들이 부끄럽지만 내 지난 시간들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는 편이다.

딱히 언제쯤 인지는 모르지만 ‘단 한사람에게 만이라도’라는 말을 되뇌이며 산다. 뭐 거창한 게 아니다. 그저 내 생각 하나, 내 행위 하나가 얼굴 맞대고 살거나 그저 소문으로 닿고 사는 그 누군가 한 사람과 서로 공감할 있는 하루를 산다면 그저 족하다는 맘으로 되뇌이곤 하는 말이다.

말과 생각이 그렇다는 뜻이지 솔직히 내 보통의 하루 하루는 내 만족의 척도에 따라 웃고 울거나 펴지고 찡그리곤 한다.

지난 주말, 멀리 남부 지역에서 세탁소를 하시는 오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다. 수 년 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였다. 그는 새로 세탁 기계를 장만하려고 하는데 두 가지 서로 다른 솔벤트를 사용하는 기계들을 놓고 어떤 것으로 바꾸어야 할지 고민 중이라고 하였다. 부인과 함께 고민 하다가 내게 묻고 그 의견에 따르고자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참으로 난감한 전화였다. 나는 솔직히 삼십 년 넘게 세탁소를 해왔지만 솔벤트와 기계에 대한 지식은 거의 무지에 가까운 편이다. 살며, 한 십여 년 가까이 미 전역에 있는 세탁인들과 업에 대한 고민을 함께 나누며 산 일이 있긴 하다만,  솔벤트나 기계에 대한 문제는 내가 입 벌려 뭐라 할 만큼 아는 게 전혀 없다.

오선생은 무조건 내가 하라는 대로 기계를 선택해 사겠노라고 했다. 그의 아내도 전적으로 그렇게 하기로 했다는 말도 덧붙었다.

정말 난감했다. 나는 이틀 말미를 얻어 주말 동안 그가 말한 두가지 솔벤트와 기계 종류에 대한 자료들을 찾아 비교해 도표를 만들어 오늘 아침 그에게 보내 주며 말했다. ‘그저 내가 주어진 시간 안에 살펴 본 자료에 불과한 것이니, 오선생께서 잘 선택하시라. 그리고 돈 잘 버시고 건강하시라.’고

오늘 일을 하며 온 종일 오선생 내외에게 감사한 마음이 그치질 않았다. 벌써 수 년 전에 그만 둔 일이지만, 내가 질척거리며 세탁인들과 함께 보낸 시간들이 결코 헛된 것만은 아니었지 않을까 하는 내 스스로 얻은 위안 때문이었다.

또 언제부턴가 나는 사람 살아 온 일들에 가능하다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바탕엔 성서로 세상을 바라보자는 내 믿음이 있기 때문이겠지만, 그에 더해 사람 살이 곧 역사 시대를 백년 단위로 끊어 훑거나, 내가 살아 온 세월들을 십 년 단위로 끊어 곱씹어 보며 얻은 내 나름의 깨달음 그 끝에서 얻은 결론 때문이기도 하다.

나야 그저 연緣의 끝자락 붙들고 별 행위도 없이 살곤 있다만, 새 세상 꿈꾸며 사는 이들이 연대를 이루며 사는 소식을 듣고 살 수 있음 만으로도 나는 이미 사는 맛을 느끼며 사는 터.

새해에는 사는 맛 더욱 누리며 살 수 있기를. 단 한사람 만이라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