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12월 초하루, 모처럼 내 집안에서 나 홀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내 오두막에는 세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얼토당토않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흉내 짓도 이런 날 내 집에서 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은 가하다. 이따금 내다 보는 창문 밖 풍경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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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큰 감사가 일다.

두 권의 책을 읽다. 홍성수가 쓴 <말이 칼이 될 때>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쓰고 임현경이 옮긴 <속도에서 깊이로: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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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는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칼이 된 사회를 고발하며, 이어지는 ‘증오범죄’가 만연 되어가는 현실을 단숨에 읽히는 글로 엮어 놓았다.

저자 홍성수의 말마따나 ‘입법 조치나 법적 대응에 한정하지 말고 전 세계에서 고안되고 실천되어 온 거의 모든 반혐오 표현 대책을 이 책에 모두 망라해’ 놓았다. 그는 그렇게 이 책을 쓴 까닭을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며 글을 맺는다.

그는 ‘증오범죄가 발생했다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편견과 차별이 있고 혐오표현이 난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없이 증오범죄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 강조한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한번 돌아 볼 일이다.

책을 읽으며 어느 잔치 자리에서 백인 사내가 우리 부부 테이블로 다가와 “너희 나라로 꺼려라!”했던 수 십년 전 경험과 며칠 전 내 가게에서 한 백인 여성이 “여긴 미국이야!” 소리치며 말도 안되는 불만을 터트렸던 일이 생각나 창문 밖 풍경에 위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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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이다.’라거나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 영역들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 자율에 맡기기 어려운 영역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 한정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읽다가 여전히 할 일 많은 세상에 감사하다.

다수자와 가진 자들이 외치는 표현의 자유의 소리가 여전히 높고, 한정하고 규제해야 할 영역들인 고용, 서비스, 교육 등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숱한 혐오표현들과 증오범죄들이 여전히 난무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다소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쓴 <속도에서 깊이로>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보편화된 읽기가 개개인에게 부여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을 설명하며 저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예수가 했던 <가라!>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간음한 여인을 비롯해 앉은뱅이, 소경, 절름발이들을 용서하거나 고치신 예수는 그들에게 그들이 본래 있었 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들은 모두 당시 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범죄의 대상자들이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후일담은 없다.

예수의 ‘가라!’라는 명령은 혐오와 증오범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예수의 명령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예수의 명령을 들은 이들의 귀가 열리기에 1500여년이 필요했고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또 500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내 집안에서 누리는 12월 초하루의 자유를 더불어 누리는 세상으로 넓혀 나가는 일은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있는 한 지속해야 할 일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겨우 몇 번 얼굴 내밀었다만, 지난 두 달여 매 주말 마다 이어온 필라세사모 벗들의 꿈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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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비 내리는 12월 초하루, 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