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꽃과 대나무 향연을 펼친다는 늦가을 정원을 찾았다.
가을 꽃내음을 타고 떠오른 오래 전 친구 얼굴 하나.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 활동을 하던 친구 K다. 키 작은 내가 친구하기엔 버거울 만큼 키도 훌쩍 컷거니와 늘 맑은 얼굴에 말수도 적고, 말도 느릿느릿 몇 살 터울 형같은 친구였다. 그가 속한 원예반 친구들은 국화를 참 멋지게 키우곤 했다. 당시에 이 맘 때 쯤이면 열리곤 하던 전국 국화 경연대회에서 원예반 친구들은 대상을 거머쥐곤 했었다. 원예반 여러 친구들이 함께 이룬 일일터임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속엔 국화 하면 그 친구 K가 떠오르곤 한다. 옛 친구 얼굴 하나 떠올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만으로도 오늘 산책은 그저 족하다.
아내는salvia 꽃잎을 보며 말했다. ‘이 사루비아 우리 많이 먹었지? 참 달았는데…’ 사루비아, 아카시아, 까마중… 개미 똥꼬 까지. 지금처럼 복잡하고 까탈스럽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로 오랜만에 이어진 손 잡고 늦가을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오늘 이른 아침에 눈이 뜨여 손에 들었던 책 하나. 윤명숙이 쓴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책을 쓴 윤명숙은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 마다 태어난 후 겪어낸 저마다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어 당시의 제도와 일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들추어 나간다.
추억이란 결국 사람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사람 얼굴 하나 떠올리는 일 아닐까?
역사 역시 뭐 거창한 게 아닐게다. 그 시절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
제도, 체제, 주의, 사상 등속이란 모두 헛 것일 수도… 어쩜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저 그 시절 가장 아팟던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어 곱씹고 오늘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번 만이라도 눈길 줄 수 있다면 나는 역사 속 하루를 사는 게 아닐까?
늦은 저녁, 노부모 곁 지키느랴 애쓰는 누나에게 들고 간 생선 튀김 하나로 누나 얼굴에 함박 웃음 가득.
내가 누린 하루의 안식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