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어느새 12월이 코 앞에 다가섰다. Thanksgiving day 하루를 쉬고 습관으로 이른 아침 가게로 향했다. 연휴 새벽 도로는 한산했다.

어제 밤, 딸아이가 물었었다. ‘아빤 언제까지 일해?’ 아무 생각없이 튀어나온 내 대답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였는데 그에 대한 딸아이의 간단한 물음이 내 앞에 놓인 질문이 되었다.  딸아이가 던졌던 아주 간단한 질문은 ‘왜?’였다.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 낳은 딸아이가 사는 세상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 듯, 아이 역시 내가 사는 세상을 다 알 수는 없을게다. 어쩜 내 스스로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거늘.

간 밤에 모처럼 나눈 딸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기며 이르른 가게 앞 하늘 풍경에 홀려 내 눈에 담아 보았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열리는 아침에 홀려 아직 어둑한 상가를 덮은 추위를 잊은 채 아침 풍경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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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든 생각 하나. 동 트는 아침 해를 맞기 위해  산이나 바다 등 명소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내 일터의 아침은 내가 누리는 큰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 나절에 맞은 손님 한 분, 며칠 전 작고 예쁜 포인세티아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를 담은 손편지를 전해 주셨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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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편지와 화분을 받던 날, 문득 내 눈에 들어 와 박힌 풍경은 가게 뒤편 우체국 담장 너머에 있는 단풍나무였다. 사철 푸른 나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들이 누런 잎새들을 다 떨어 버리고 열반에 이른 계절에 우체국 담장 안 단풍나무는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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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우체국 나무인데…. 좋은 소식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시들지 않는 단풍 나무 하나 오래 품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쯤 내 딸아이에게 보내는 응답을 찾다.

내 일터에서 찾는 즐거움이 있기에… 적어도 그 즐거움을 잃는 날까지는…

다시 은총에

어느 해 부터인가 추수감사절 저녁상을 내 손으로 차리기 시작했었다. 아마 족히 십여 년은 넘었을게다. 이젠 내가 누리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칠면조는 아들 녀석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아주 작은 것을 굽고, 아내와 딸과 며느리는 닭이 좋다고 해서 제법 큰 놈을 골라 구웠다. 어머니 입맛에 맞게 새우젓 듬뿍 넣고 김치찜과 코다리찜도  쪄 상 위에 올렸다. 매형과 누이 생각하며 단호박도 굽고 통오징어 구이도 곁들였다. 내 몫으로 돼지갈비를 구워 와인 한잔 곁들였다. 아내는 전을 부치고 잡채를 더해 상을 풍성하게 했다.

두 해 전부터 먼저 떠난 장모가 자리를 비우고, 올핸 거동할 수 없는 장인이 함께 하지 못했다. 올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누이와 나는 많이 망설였었다. 그러고보니 그 사이 며늘아이가 새 식구가 되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나는 전도서 가운데 한 구절을 읊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을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도서 3: 12-13)’

몇 젓가락 입에 넣어 오물거리시던 어머니가 말했다. ‘당최 입맛이 없어 먹질 못하겠더만,,, 오늘은 입맛에 딱 맞아 많이 먹었네…’

오늘 내가 누린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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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사족 – 내 서재 한 구석에서 발견한 약 상자 둘. 웬만한 통증에는 타이레놀 하나 먹기 싫어하는 내게 달포 전 서울 큰 처남이 보내 온 보약이었다. 인삼이야 익히 아는 것이고 황보단이 뭔가 하여 검색해 보다 그 가격에 놀라다.

바라만 보아도 은총에 은총을 더하는 감사절이다.

차이에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아이리스 매리언 영 (Iris Marion Young) 의 책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주문하다.

연말 이리저리 할 일도 많다만, 어차피 시간이란 쪼개 쓰는 법이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쓰는 시간이 아까울 수는 없기 때문에 또 질러 본 일이다.

무엇보다 김지혜가 소개하는 아이리스 영의 이야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 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몇가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로 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문득 고대 성서 이야기를 생성한 옛 히브리 신앙 공동체가 떠올랐다. 원천적으로 차이를 배제하는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출애굽 시대 광야에서 이루었던 신앙공동체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란 신 없이도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이리스 영이나 김지혜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던져지는 것 들일게고….

꾸어야 할 꿈은 꾸되 현실은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일 터이니…

내 아이들과 함께 멋진 곳에서 배 불린 안식일에.

한국학교

물론 내가 ‘싫다’하면 나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만, 구태여 후환을 만들어 가며 살 나이는 아니기에 한주간 노동의 피로에 절은 토요일 오후 아내를 따라 나섰다. 뉴저지 Hamilton은 처음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에서 열린 ‘제 4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한 길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가 주최하고 한국의 재외동포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로써 입양되었거나 다문화 가정 자녀들 또는 비한국계 현지 시민들이 참가해 한국어 말하기 경연을 펼치는 잔치였다.

지난해 이 행사에 내 며늘아이가 경연에  나섰음에도 함께 하지 않았었는데, 올해 꼼작 없이 함께 한 까닭은 그만큼 무언(無言)의 재촉을 하는 아내의 힘이 강한 탓이었을게다.

거의 끌려 가다시피  했던 자리였는데,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돈내면서 함께 했어야 할 행사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입양 및 다문화 가정 자녀를 비롯해 인디언 아메리칸, 코카시안, 평화봉사단으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이까지, 모두 현재 미 동중부  저마다의 동네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잔치마당이었다.   DSC08518 DSC08529 DSC08539 DSC08548 DSC08553 DSC08567 DSC08577

이경애선생의 지도로 모두 함께 한 복주머니 색종이 접기에 열심히 따라 하는 전혀 나 같지 않은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아내는 춤을 추었다. 아내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 드리는 내 기도는 오늘도 통했다. ‘제발 넘어지는 실수만 아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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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톤 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은 강남옥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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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행사를 밀고 나가는 힘일게다. 그의 시편들은…

일주일에 고작/ 세 시간 하는 우리, 토요일 한국학교/ 빠진 이처럼 몇은 결석/ 띄워쓰기 다 틀린 작문같이 몇은 지각/ – 중략- 화분에 물 주듯 몇 년 같이 뒹굴었더니 / 철자법 다짜고짜 다 틀린 카드도 건네주고/ ‘썽생님, 나 누구게?’/ 일찌감치 방귀 트듯 선생한테 말 트며/ 뒤에서 슬쩍 가린 눈 풀고 지긋이/ 날 안아 주기도 한다 – (강남옥의 시 ‘토요일 한국학교’에서)

내 모국어의 속 깊은 품은 언제나/ 삶 앞에 진술 긴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언어의 진국이다 – (강남옥의 시 ’깊고 넉넉한’에서)

돌아오는 길,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와 격려를….

*** 아내는 이 자리에서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동창 얼굴을 보다. 사십 이년 만이란다.

엇비슷한 생각들을 가진 이들이 함께 얼굴 마주 보며 이야기 나누던 중 나는 내 또래이자 같은 서울 토박이인 시인 김정환의 시집을 넘기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김정환의 시 ‘등’이다.

<등>

사람들이 내게서 사방으로
등을 돌리고 그 등을 통해
나는 현실을 본다 본질까지
등은 야속하지 않다 사람들이
통로일 뿐이다 갈수록
그것이 줄지 않는다 끝까지
나는 행복하다 사람들 마음에
등이 있다 그들도 행복하길 바란다

시인은 여전히 다작이란다. 모두가 행복하기를.

호칭에

아버지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우선 나를 부르는 호칭이 평소와 달랐다. 통상 즐겨 쓰시는 ‘아범’, ‘애비’도 아니고, 기분 좋으실 때 부르는 ‘어이 김영근!’도 아니었다. 오늘 아버지는 ‘영근아!’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웃고 말았다. 세상 둘도 없는 말씀을 하실 듯이 나를 부르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또 미안해서 웃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보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은 ‘영근아!’라는 호칭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를 부를 때 ‘영근아!’라고 하는 이들이란 지금은 아버지 어머니 딱 두 분 뿐이다. 물론 가게 손님들이나 여기서 살며 알게 된 이들이 ‘Young’이라고 나를 부르지만  ‘영근아!’와는 사뭇 다르다.

나를 ‘영근아!’라고 부르는 친구들과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더는 나를 ‘영근아!’라고 부를 이를 만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내가 보낸 시간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난민과 이민에 대한 책장을 넘기다  눈에 밟힌 글귀 하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다. 누구든 살던 곳에서 자유롭게 ‘떠날’ 권리,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새 삶터에서 ‘정착할’ 권리, 그리고 살던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 올’ 권리가 있다. 또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여러 협약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도 있다. 오늘날 이런 권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원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쓴 이의 주장에 시간을 하나 덧붙인다면 우리는 영원히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영근아! 이 짜샤!…’ 그 흘러간 저쪽 세월에 잠시 빠져버린 밤에.

숲길

가을이 편히 쉬고 있는 숲길을 걸었다. 먼 길 걸어와 노곤한 몸 따뜻한 온돌에 누인 듯 가을은 그렇게 쉬고 있었다. 이따금 이는 소슬바람과 내 발자국 소리가 가을을 깨곤 했지만 숲은 이미 가을을 깊게 품고 있었다.

횡재였다. 집 가까이 새로운 산책길을 찾은 오늘 내 운세다. 숲길에 홀려 걷다 보니 지나쳤던지 오랜만에 긴 낮잠도 즐겼다.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을 만지작 거리다 책장을 덮었다.

아침 나절 찾아 뵌 어머니는 넋 나간 눈길로 중얼거리셨다.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 전화번호만 달랑 저장하고 있는 아이폰을 목에 걸었다 어깨에 걸었다 하시며 ‘빨리 받지를 못해요…’를 반복하셨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쟁반에는 자른 사과 조각들이 마르고 있었다. 삐뚤빼둘 도무지 어느 한군데도 가지런한 곳 없는 조각들도 보아 아버지 솜씨였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사과도 다 깍아서 말리시나?’하는 내 소리에 아버지는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마른 사과 혹시 네 어머니가 자실까해서…’

가을이 쉬는 계절이다.

깨어날 봄을 믿으며…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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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에

기러기 떼

먼 길 떠나는 아침

어제처럼 일을 시작하다.

배웅이 딱히

서러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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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에

이즈음 하루 노동이 끝날 무렵 바라보는 하늘은 황홀하다. 하늘을 맘에 담는 내게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축복받은 삶이란다.  내 몸짓이 비록 흉내일지언정.  이미 축복이다.

<숱한 변혁들이 세상을 뒤흔들어도, 황혼 무렵 서쪽 하늘 처럼 순수하고 고요한 것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일지니…( The man is blessed who every day is permitted to behold anything so pure and serene as the western sky at sunset, while revolutions vex the world. – Journal 12/27/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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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늦가을 비 내리어

마른 나무잎 다 떨구난 저녁

하늘도 미안했는지

제 얼굴에 단풍 물 드리다.

  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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