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밤 미국의 검사 제도에 대해 배웠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겐 크게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이 땅에 살며 검사를 만나 본 적도 없고, 내 삶과는 특별한 연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솔직히 이제껏 이 땅의 검사 제도에 대해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몇 차례 법정에 서 본 경험은 있다. 삼십 년 넘는 이민 생활에서 손 꼽아보니 거의 열 번 가까이 법정에 가 본 듯하니 적은 숫자는 아니다. 대부분이 이민 초기에 있었던 일들이다 . 막 장사를 시작하고 손님들과의 분쟁으로, 또는 사업체를 사고 파는 과정에서 생긴 일들로 인해 서 보았던 법정 경험들이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두 차례 변호사를 선임했었다. 나머지는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우리 부부가 함께 법정에 섰었다. 겁날 게 없던 젊은 시절 이야기다.
지금은 변호사, 의사를 만나지 않고 사는 삶이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물론 손님들과의 분쟁을 일으키지 않을 만큼 노회하기도 하거니와 사업체를 사고 파는 일을 만들 여력이 없는 나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이 땅의 검사제도에 대한 배움이였다. 배심원으로 불려 나갔거나 선거에서 Attorney General를 뽑거나 하면서도 솔직히 미국 또는 내가 살고 있는 주 정부의 사법체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게 뒤늦게 미국 사회를 새롭게 알게 해 준 귀한 시간이었다.
어제 가르쳐 준 변호사 선생님과 함께 배운 십 여명 우리들은 모두 하나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시간을 나누는 이들이다. 그 이름은 ‘필라 세사모’다. 필라델피아 인근에 살며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살자는 뜻으로 함께 하는 이들이다.
몇 주 전에 이 모임에서 나눈 대화 가운데 이런 질문이 있었다. “왜 우린 아직도 세월호인가?” 질문만 던져 놓은 채 우린 아직 그에 대한 공동의 답을 마련하진 못하고 있다.
오늘 낮에 일을 하면서 문득 내게 떠오른 질문이었다.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 아마 어제 밤 공부 탓이었을 게다.
어제 밤 선생님은 미국의 형사 사법 제도에 있어 피고인과 검사가 다투었을 때, 만일 일심에서 검사가 패소하면 검사는 항소권이 없다고 했다. 다만 피고인이 패소했을 때는 항소권이 부여된단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룰이란다.
국가와 시민과의 다툼을 다루는 법칙을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지속적인 싸움이야말로 바로 세월호 참사 가족들 이야기가 아닐까하는 생각에 이르러 그 숙제가 풀리기 시작했다.
다섯 번 째 한(恨)으로 맞는 한가위 명절을 보내는 가족들에게 아무 것도 못하지만 그저 함께 기억하는 사람으로 산다는 것 만으로…
““왜 난 아직도 세월호인가?”에 대한 소심한 내 응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