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함에

오늘 낮에 내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탁 재료 판매상인 Mr. 강이 내게 뜬금없는 인사를 건넸다. ‘형님은 유튜브 안보시나 봐요?’내가 스스럼없이 말 놓는 한인 몇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 세탁소들을 두로 돌아다닌다. 나와의 거래는 거의 삼십 년이 되어 간다.

내 대답 – ‘그건 왜?’  이어진 그의 말. =  ‘장사가 안되는지 가는 곳마다 사장님들이 유뷰트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다시 물었다. ‘유튜브로 주로 뭐를 보던?’ 막 바로 받은 그의 응답이었다. ‘요즘 핫한 거 있잖아요! 조국 뉴스… 거기에 빠져들 계시더라고.’

‘쯔쯔쯔… 일터에서 뭐라고 한국 뉴스에 뺘져 있노…’ 혼잣 말 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거 보는 사람들 의견들은 대충 어떻디?’ 그의 의견이었다. ‘한 8대 2쯤이요. 조국 No! 에 8, 청문회 보고 나서 판단하자는 쪽 2정도요.’

그가 내게 물었다. ‘형님 의견은 어때요?’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나는 8대 2 속에 들지 않는구나.’

솔직히 나는 일터에서 유튜브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social networking 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한국뉴스를 보거나 검색하는 일도 거의 없다. 내 일 곧 세탁업과 관련된 일이거나 내 손님들과 소통하는 일 이외에는 인터넷이나 cell phone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일들은 거의 대부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한다. 하여 한국뉴스들을 섭렵하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거나 휴일이다. 그래 이따금 바뀐 세상을 뒤늦게 접하곤 한다. 그러나 관심있는 뉴스에 이르면 여러 매체들(뭐 다 엇비슷하지만)을 두루 돌아 다니거나 뉴스를 소비하는 커뮤니티들을 순례하기도 한다.

내가 이즈음 핫하다는 법무장관 후보자 조국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은 ‘비겁함’이다. 조국 후보자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다. 조국 후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비겁함이다. 그런데 그 비겁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답답한 이즈음이었다.

그러다 엊그제 받은 호주에서 보내온 홍길복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을 찬찬히 읽다가 그 비겁함의 본질을 만났다. 그의 강의록 일부이다.

<니체는 지난 날 유럽을 지배해 온 온갖 전통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예술, 관습 등 모든 ‘전통적인 것들’에 대하여  그는 ‘아니다!(Nein)’이라고 부르짖으면서 그것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정과 파괴가 가장 강한 긍정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유럽의 정신사에서 가장 강력한 이단자였고 반항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약자들이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규정 하면서 이를 ‘비겁한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겁한 자들의 비겁한 도덕율은 인간을 결코 더 좋은 방향으로 전진 시키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는 선하려는 의지, 나아지는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가 없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본질적으로 자아를 실현해내고 환경과 사회를 변혁 시키고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가려는 힘의 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노예의 도덕, 기독교의 도덕은 그런 의지를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런 의지를 꺽어버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자유, 평등, 정의, 민주의 이름으로 누군가 하나를 제물 삼아 해소하려는 집단 의식을 전하는 뉴스 속엔 분명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일은 바로 그 비겁함을 떨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의 대상은 어느 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여론 또는 국민 정서라는 정체 불명의 권력일 수도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