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왕이었다. 스스로 일컬어 신생왕(新生王).
참 이상한 일이었다. 뉴저지(New Jersey) 최남단 쇠락한 마을 펜스빌(Pennsville) 촌로였던 그에게 왕관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1946년 전남 장흥 출생.
장흥에 대한 그의 기억 하나.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해였는데, 저희 학교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오신 여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한 분은 영어선생님이고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셨거든요. 국어 선생님이 허숙자 선생님이신데, 학생들을 모아 놓고 뭘 했으면 좋겠는가 물었어요. 그때 제가 “우리 문예지 한번 만들어봅시다.” 그랬더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문예지를 만들게 되었죠.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한테 글을 모집하고 등사판을 밀어서 만드는 거죠. 제가 며칠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등사지에다 써 가지고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너무 기쁘잖아요. 각 교실마다 열 권 씩 배부를 했지요.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교장실에서 저를 부른 대요.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허숙자 선생님이 발발발 떨고 있더라고요. 교장선생님이 제가 들어가자 마자 지휘봉으로 머리를 막 때리는 거예요, 너무 황당 하잖아요. 들어가자 마자 얻어맞으니까요. 머리를 감싸 안고 왜 그러시냐고 항의를 했죠. “이 새끼 누구 죽일라고 그러냐” 고 그러는 거예요. 문제는 ‘동무’ 였어요. 교과서에도 ‘동무 동무 새동무’라는 문구가 있었고.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교장은 일 학년 짜리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누굴 죽일려고 그러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요.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더니 거기다 처넣고 불지르라는 거예요. 내가 태웠었요. “이게 교육이냐?” 어린 마음에 너무 뼈저린 거예요. >
그는 이미 왕이 될 상이었다.
탄피 하나 팔아먹을 재간 없이 월남 참전 용사 로 돌아 와 남도에서 농사짓던 그가 미국에 온 까닭이란다.
<대한민국 농촌 진흥원하고 미국 4H 클럽 사이에 한국 농업 연수 계획을 맺었대요. 농촌에서 4H 지도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가지고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 이게 취지였거든요.> – 그렇게 1972년에 밟은 땅 미국.
두 해 뒤 이민으로 이 땅에 삶을 디딘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고향 땅 한 번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이 땅의 참 주인으로 살았던 신생왕.
그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때는 아마도 1980년 광주 항쟁이 일어난 해일게다.
매사 진지했던 사람 장광선. 그는 온 몸, 온 삶으로 왕이고자 했다.
1980년 미주 5.18 진상규명 및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 위원회를 조직한 일을 시작으로,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 수난자 가족 돕기 위원회 간사, 해외 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 민주 국민연합 총무, 재미 한국청년연합 및 국제 평화 대행진 활동, 재미 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등등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 했다.
그가 왕 노릇 하던 방법이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하시는 분들이 제게 자주 질문을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부끄러운 것 밖에 없어요. 제가 뭘 했다거나 내세울 만한 게 정말 없어요. 제가 뭐 그런 이야기하면 뭐 겸손 떤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겸손해서가 아니고 사실 없어요. 실지로 없어요.>
<함께 쓰는 화장실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으면 나오기 전에 새 화장지를 끼워 놓고 나오는 거….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먹고 나서는 접시 하나 저쪽으로 옮겨줘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이 가져 가기 쉽게 해주는 …. 그게 모든 운동의 시작일 거예요.>
그렇게 왕 노릇 하시던 장광선 선생이 어제 밤 떠나셨다. 향년 일흔 셋. 떠나셨어도 왕관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더욱 빛날….
사람 사랑, 조국 사랑으로 몸서리 치며 앓던 그의 삶을 되새기며…
왕과 함께 숨 쉬었던 짧은 시간 속에서 내가 누렸던 영광에 감사하며…
평안함이 함께 하시길.
**** 신생왕(新生王)은 선생의 필명 가운데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선생에게 말했었다. “장선생님은 천상 크리스챤이예요.” 그 때 그는 빙그레 웃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