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겁함에

오늘 낮에 내 가게에서 있었던 일이다. 세탁 재료 판매상인 Mr. 강이 내게 뜬금없는 인사를 건넸다. ‘형님은 유튜브 안보시나 봐요?’내가 스스럼없이 말 놓는 한인 몇 사람 가운데 하나인 그는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 세탁소들을 두로 돌아다닌다. 나와의 거래는 거의 삼십 년이 되어 간다.

내 대답 – ‘그건 왜?’  이어진 그의 말. =  ‘장사가 안되는지 가는 곳마다 사장님들이 유뷰트를 보고 계시더라고요.’ 나는 다시 물었다. ‘유튜브로 주로 뭐를 보던?’ 막 바로 받은 그의 응답이었다. ‘요즘 핫한 거 있잖아요! 조국 뉴스… 거기에 빠져들 계시더라고.’

‘쯔쯔쯔… 일터에서 뭐라고 한국 뉴스에 뺘져 있노…’ 혼잣 말 하다가 그에게 물었다. ‘그래 그거 보는 사람들 의견들은 대충 어떻디?’ 그의 의견이었다. ‘한 8대 2쯤이요. 조국 No! 에 8, 청문회 보고 나서 판단하자는 쪽 2정도요.’

그가 내게 물었다. ‘형님 의견은 어때요?’ 그리고 이어진 내 대답이었다. ‘나는 8대 2 속에 들지 않는구나.’

솔직히 나는 일터에서 유튜브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social networking 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한국뉴스를 보거나 검색하는 일도 거의 없다. 내 일 곧 세탁업과 관련된 일이거나 내 손님들과 소통하는 일 이외에는 인터넷이나 cell phone 사용을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런 일들은 거의 대부분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 한다. 하여 한국뉴스들을 섭렵하는 시간은 저녁 시간이거나 휴일이다. 그래 이따금 바뀐 세상을 뒤늦게 접하곤 한다. 그러나 관심있는 뉴스에 이르면 여러 매체들(뭐 다 엇비슷하지만)을 두루 돌아 다니거나 뉴스를 소비하는 커뮤니티들을 순례하기도 한다.

내가 이즈음 핫하다는 법무장관 후보자 조국에 대한 뉴스를 보면서 든 생각은 ‘비겁함’이다. 조국 후보자가 비겁하다는 뜻이 아니다. 조국 후보자를 대하는 한국 사회 전반의 비겁함이다. 그런데 그 비겁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좀 답답한 이즈음이었다.

그러다 엊그제 받은 호주에서 보내온 홍길복목사님의 인문학 강의록을 찬찬히 읽다가 그 비겁함의 본질을 만났다. 그의 강의록 일부이다.

<니체는 지난 날 유럽을 지배해 온 온갖 전통에 대해서 반기를 들었습니다. 철학과 종교는 물론이고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예술, 관습 등 모든 ‘전통적인 것들’에 대하여  그는 ‘아니다!(Nein)’이라고 부르짖으면서 그것들을 뒤집어 엎으려고 했습니다. 그는 부정과 파괴가 가장 강한 긍정이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무너뜨리지 않으면 결코 새로운 것을 세울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니체는 유럽의 정신사에서 가장 강력한 이단자였고 반항아였다고 하겠습니다.>

<그는 기독교적 도덕이란 근본적으로 약자들이 강자에 대한 두려움에서 생겨나는 것이라고 규정 하면서 이를 ‘비겁한 도덕’이라고 불렀습니다.

“비겁한 자들의 비겁한 도덕율은 인간을 결코 더 좋은 방향으로 전진 시키지 못하게 한다. 거기에는 선하려는 의지, 나아지는 의지, 즉 권력에의 의지가 없다. 인간은 그 누구든지 본질적으로 자아를 실현해내고 환경과 사회를 변혁 시키고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나가려는 힘의 의지를 지닌 존재인데 노예의 도덕, 기독교의 도덕은 그런 의지를 원초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고 그런 의지를 꺽어버린다”는 것이 니체의 주장입니다. >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의 욕망을 자유, 평등, 정의, 민주의 이름으로 누군가 하나를 제물 삼아 해소하려는 집단 의식을 전하는 뉴스 속엔 분명 비겁함이 도사리고 있다.

건강한 사회의 시민으로 나아가는 일은 바로 그 비겁함을 떨치는 일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아니다!’의 대상은 어느 한 공동체를 지배하는 권력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들 곧 여론 또는 국민 정서라는 정체 불명의 권력일 수도 있는 법이다.

흥춤

흥춤을 한번 추어 보겠다는데 어찌하리! 왕복 다섯 시간 춤 공부 길 나서는 아내의 운전기사가 되었다. 여름 기세가 완연히 꺽인 아침은 상쾌하여 일요일 아침 일부러 라도 드라이브에  나설만한 날씨였다.

아내를 춤 공부방에 모셔(?) 놓고 나는 서둘러 허드슨 강변으로 향했다. 며칠 전 부터 내심 준비해 온 산책길을 찾아 나선 것이다. 아내의 운전 기사 노릇도 하고, 내 산책 욕심도 채울 수 있는 오늘을 맘껏 즐길 요량이었다.DSC07011DSC07016 DSC07017 DSC07019 DSC07022 DSC07024

허나 나에게 주어진 한 시간 반 산책 시간은 너무 짧았다.

춤 공부방에선 아직 공부가 끝나지 않았다. 춤 동작을 놓치거나 잃곤 하는 아내에게 던진 선생님의 가르침이 나를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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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작을 머리로 외우려 마시고 몸으로 녹여 음악에 따라 놀게 하세요’ – 그 소리에 아내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맘을 끄덕였다. 아무렴, 흥춤인데!

춤 공부를 끝낸 아내와 함께 허드슨 강변에서 일요일 오후 한 때를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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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장보기, 정갈하게 차려진 보리 비빕밥과 콩비지 찌게 밥상으로 배를 채우는 즐거움은 오늘의 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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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 앞에서 아내와 나는 일상의 다툼을 이어갔다.

아내 왈, ‘요즘 애들은 이런 거 안 먹을거야? 그치!’

내 응답, ‘뭔 소리야? 우리 딸애가 돼지 감자탕을 좋아한다구!’

다부진 아내의  소리, ‘이건 꽁보리밥이라고!’

그랬다. 흥춤은 일상(日常)의 티격태격으로 몸으로 출 일이다.

*** 집으로 돌아와 내 오래된 독서 카드를 찾았다. 이즈음 한국 뉴스를 보며 어지러워 진 내 생각과 오늘의 일이 어우러진 글 하나 찾아 헤맨 일이었다.

<찌들어 보이는 과거의 삶은 한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되었지만 그 때를 산 우리들의 선대(先代)들은 반드시 비관적인 삶 만을 사신 것이 아니었다. 상황은 비록 절망적이고 온갖 시도는 허무하게 끝났다 해도 그들은 굿과 놀이로 모진 현실을 이겨냈다. 부정적인 것들을 커다란 개혁의 의지로 역전 시키는 계기는 바로 어둠에 대한 그들의 따듯한 친근감 때문 일 것이다. – 이상일저 한국인의 굿과 놀이에서> –

흥춤에.

강남 좌파

한국뉴스를 보다가 문득 떠오른 누이 생각. 나보다 한 살 아래인 사촌 누이는 이십 대에 유학 길에 올랐다.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는 누이에 대한 기억은 거의 그 이전 세월 뿐이다. 물론 서로 간에 소식은 듣고 살았다. 오랜 유학 끝에 누이가 한국에 돌아 가 정착했을 때는 나는 이민을 온지 이미 오래 된 후이기에 그저 소식만 듣고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 누이를 만났었다. 이명박 시절이었을게다. 서울 강남에 있는 어느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했었다. 이 자리에서 나보다 몇 살 위인 사촌 매제와도  인사를 나누었었다.

이런저런 살아 온 이야기들과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누이가 제 남편인 사촌 매제를 일컬어 ‘강남 좌파’라 했었다.

누군가의 입을 통해 ‘강남 좌파’하는 지칭을 들어 본 첫 자리였다. 그 지칭을 들었던 사촌 매제는 당시 강남에 사는 독일 법학박사 학위를 지닌 대학교수였다.

‘강남 좌파’의 얼굴 격처럼 알려진 조국 장관 후보자에 대한 기사들을 보다가 떠오른 내 누이에 대한 기억이다. ‘강남 좌파’ 내 사촌 매제가 한국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겪었다는 이야기들도 그 기억 속에 함께 한다.

참 어울리지 않는 조합 ‘강남’과 ‘좌파’이다. 뉴스들은 그 사이를 파고들며 마구 그 간격을 벌리고 있다. 그 놀음에 ‘강남’과 ‘좌파’는 물론 ‘강북’과 ‘우파’ 아니 그도 저도 아닌 이들 모두 달려 들어 정신들이 나간 형국이다.

그 날 이후 누이와 ‘강남 좌파’인 사촌 매제를 본 적은 없다. 예전처럼 그저 소식만 전해 들을 뿐. 나는 한번도 ‘강남 좌파’인 누이 내외가 자랑스럽다고 말한 적이 없다만, 여전히 그렇게 불리우며 살아가기를 빈다.

더하여 ‘강남’과 ‘좌파’사이를 헤집는 난도질에 휘청거리는 조국이라는 사내가 지금의 형국을 잘 이겨 내기를 바란다.

아직은 ‘강남 좌파’가 절실히 필요한 그 쪽 상황인 듯 보여서이다.

참 사람 장광선선생

죽음이 삶과 맞닿아 있음을 보여주고 떠난 사람, 장광선 선생.

그와 함께 하루를 보내다. 그의 가족들 모두 어쩜 그리 그를 닮았을까. 치열했던 삶을 그리 담백한 화폭에 남기고 떠나고 또 보낼 수 있었을까. 참으로 부러운 삶 한 획 굵게 남기고 떠나셨다.

선생과 가족들은 그저 일상처럼 떠나고 보냈다. 나머지 조촐하기 그지없는 추모 행사란 그를 따랐던 이들이 치장한 군더더기였을 뿐.

함께 모인 이들이 그를 추모하며 남긴 말들 가운데 귀에 꽂혀 윙윙거리는 말 하나.

‘내가 사람 냄새 그렇게 물씬 풍기던 사람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선생의 영원한 동지 가운데 한 분이신 최종수 목사가 살아있는 내게 던진 화두이다.20190818_105728a

살아 생전 장광선선생이 치열하게 고뇌했던 화두이기도 하다.

<사람, 사람살이, 지금 여기에서 발 딛고 사는 사람살이와 무관한 신은 아무 뜻 없는 신이다.>라는…

선생이 가꾸었던 앞뜰 배나무는 실한 열매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선생를 따르던 후배의 맏형인 김경지형이 무심케 배를 따다 ‘달다’며 건네 주었다. 작고 단단한 배는 달고 넉넉한 즙을 품고 있었다.

돌아오는 길, 선생께서 수없이 건너 다니셨을 다리를 건너며 새겨 본 생각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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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마지막 순간까지 사람답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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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서 장광선선생과 통했던 그의 하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상에서 더할 수 없이 따듯한 품으로 그를 안고 계실 터.

신생왕(新生王) 장광선선생

그는 왕이었다. 스스로 일컬어 신생왕(新生王).

참 이상한 일이었다. 뉴저지(New Jersey) 최남단 쇠락한 마을 펜스빌(Pennsville) 촌로였던 그에게 왕관은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1946년 전남 장흥 출생.

장흥에 대한 그의 기억 하나.

<중학교 3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에서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그때 5.16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해였는데, 저희 학교에 사범학교를 갓 졸업하고 오신 여선생님이 두 분 계셨어요. 한 분은 영어선생님이고 한 분은 국어 선생님이셨거든요. 국어 선생님이 허숙자 선생님이신데, 학생들을 모아 놓고 뭘 했으면 좋겠는가 물었어요. 그때 제가 “우리 문예지 한번 만들어봅시다.” 그랬더니, 아 그거 좋은 생각이라고 그러면서 문예지를 만들게 되었죠. 교실마다 돌아다니면서 아이들한테 글을 모집하고 등사판을 밀어서 만드는 거죠. 제가 며칠 밤을 세워가면서 글을 등사지에다 써 가지고 문예지를 만들었어요, 너무 기쁘잖아요. 각 교실마다 열 권 씩 배부를 했지요.

다음날 학교에 갔더니 교장실에서 저를 부른 대요. 교장실에 들어갔더니 허숙자 선생님이 발발발 떨고 있더라고요. 교장선생님이 제가 들어가자 마자 지휘봉으로 머리를 막 때리는 거예요, 너무 황당 하잖아요.  들어가자 마자 얻어맞으니까요. 머리를 감싸 안고 왜 그러시냐고 항의를 했죠. “이 새끼 누구 죽일라고 그러냐” 고 그러는 거예요. 문제는 ‘동무’ 였어요. 교과서에도 ‘동무 동무 새동무’라는 문구가 있었고. 아무 이상이 없었는데 교장은 일 학년 짜리가 동무라는 말을 썼다고 누굴 죽일려고 그러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거요. 쓰레기 소각장으로 가더니 거기다 처넣고 불지르라는 거예요. 내가 태웠었요. “이게 교육이냐?” 어린 마음에 너무 뼈저린 거예요. >

그는 이미 왕이 될 상이었다.

탄피 하나 팔아먹을 재간 없이 월남 참전 용사 로 돌아 와 남도에서 농사짓던 그가 미국에 온 까닭이란다.

<대한민국 농촌 진흥원하고 미국 4H 클럽 사이에 한국 농업 연수 계획을 맺었대요. 농촌에서 4H 지도 활동을 하던 사람들을 미국에 보내가지고 선진 농업을 배워 와서 한국 농업을 발전시킨다, 이게 취지였거든요.>  – 그렇게 1972년에 밟은 땅 미국.

두 해 뒤 이민으로 이 땅에 삶을 디딘 후 오늘에 이르기 까지 고향 땅 한 번 다시 밟아보지 못하고 이 땅의 참 주인으로 살았던  신생왕.

그가 왕이 되기로 결심한 때는 아마도 1980년 광주 항쟁이 일어난 해일게다.

매사 진지했던 사람 장광선. 그는 온 몸, 온 삶으로 왕이고자 했다.

1980년 미주 5.18 진상규명 및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 위원회를 조직한 일을 시작으로,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 수난자 가족 돕기 위원회 간사, 해외 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 민주 국민연합 총무, 재미 한국청년연합 및 국제 평화 대행진 활동, 재미 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등등 그를 필요로 하는 곳에 늘 함께 했다.

그가 왕 노릇 하던 방법이다.

<조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하시는 분들이 제게 자주 질문을 해요. 그럴 때마다 저는 정말 부끄러운 것 밖에 없어요. 제가 뭘 했다거나 내세울 만한 게 정말 없어요. 제가 뭐 그런 이야기하면 뭐 겸손 떤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있는데 겸손해서가 아니고 사실 없어요. 실지로 없어요.>

<함께 쓰는 화장실 들어갔는데 화장지가 다 떨어졌으면 나오기 전에 새 화장지를 끼워 놓고 나오는 거…. 식사하러 식당에 들어갔다가 먹고 나서는 접시 하나 저쪽으로 옮겨줘서 일하는 웨이트리스들이 가져 가기 쉽게 해주는 …. 그게 모든 운동의 시작일 거예요.>

그렇게 왕 노릇 하시던 장광선 선생이 어제 밤 떠나셨다. 향년 일흔 셋. 떠나셨어도 왕관은 여전히 그의 것이다. 더욱 빛날….

사람 사랑, 조국 사랑으로 몸서리 치며 앓던 그의 삶을 되새기며…

왕과 함께 숨 쉬었던 짧은 시간 속에서 내가 누렸던 영광에 감사하며…

평안함이 함께 하시길.

**** 신생왕(新生王)은 선생의 필명 가운데 하나이다. 언젠가 나는 선생에게 말했었다. “장선생님은 천상 크리스챤이예요.” 그 때 그는 빙그레 웃었었다.

하루에

오래 된 친구와 밥 한끼 나누며 그저 그렇게 사는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은 즐겁다. 엊저녁 모처럼 그런 시간을 누렸다.꽉 찬 나이의 아이들 이야기, 어느 날 문득 낯선 모습으로 다가와 어느새 익숙한 모습이 되어버린 노인들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의 은퇴와 노후 문제… 친구부부와 우리 내외는 그저 그렇게 사는 이야기들로 배불렀다.

그리고 빠질 수 없는 한국 뉴스와 이야기들 – 사실 내 기억 속 한국은 이미 외국이다. 그것이 이승만 또는 박정희 시대든 박근혜 또는 문재인 시대든 어쩌면 모두 외국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내가 살던 때 보다 엄청나게 좋아 진(진보된) 한국이 자랑스럽다.

물론 무엇이라 일컫든 한반도에서 사는 공동체에 대한 인식도 없고 더불어 함께 사는 뜻은 말할 것도 없이 그저 돈에 의해서만 성공이 정의되는 사회로 다가오는 뉴스들도 넘쳐 나지만… 어디 그게 거기 뿐이랴! 그 또한 옛시절 보단 나아진 것이려니. 다만 때론 무도하고 뻔뻔스런 모습들이 도가 지나친 정도가 극에 달했을 지언정. 그 또한 더 큰 진보가 눈 앞에 다가선 징조이려니!

친구가 은퇴 후 남쪽이 어떨까 한다는 말에 나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이 사람아, 너무 멀리 가진 말게나. 그래도 종종 하룻길에 만날 수 있는 거리에서 살자구!’

파란 하늘에 구름들 제 흥에 겨워 노는 일요일,  나는 Pocono 산 속을 거니며 놀았다. 옛날과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생각들이 뒤섞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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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한국에서 방문한 조교수 내외와 와인 한잔 하며 시간을 보내다. 삼십 여 년 전 이 곳에서 그가 공부하던 시절 함께 했던 이야기들과 서로의 이즈음 이야기, 여기서 박사 과정에 들어 선 그의 자식 이야기 등 그렇게 우리들의 어제와 오늘과 내일을 나누며…

하루를 보내며 문득 든 생각 하나.

어느새 내가 뭔가 이뤄야 할 나이가 아니라 그저 음미해야 할 때에 이르렀다는…

어느 소천(召天)

‘손할머님께서 7월 18일 소천하셨습니다.’

오늘 필라델피아에서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화방에서 본 공지다.

이즈음 나는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산다. 노부모들의 이즈음 생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이젠 남 일만이 아닌 가까이 다가오는 내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이름 손정례. 전남 강진 사람. 세월호 참사 이후 그녀를 만났을 때 나이 구십이었다.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 몇몇이 모여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되새기는 날, 그녀는 한풀이 춤을 추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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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얼핏 그녀의 지나온 삶에 대한 이야기를 스치듯 들었다만, 내 기억에 깊이 새겨진 것은 그녀의 춤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그녀가 병원과 양로원을 오가며 마지막 길에 접어들 무렵 양로원에서 잠시 함께 했던 시간,  그녀의 신산했던 삶을 가늠할 수 있었다. 세월호 가족들의 아픔이 오롯이 그녀의 가슴에 새겨져 춤사위로 풀어낼 수 있었던 까닭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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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또는 기억들.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에 담긴 아픔들을 잊지 말자며 함께 해 온 이들의 기억 속에  세월호 아픔과 함께 남을 여인 손정례.

그녀의 못다 푼 한들과 지금 살아 기억하는 자들이 풀어야 할 한들이 얽혀 이어지는 우리들의 삶 가운데 그녀의 꿈들이 이어지기를….

 

길을 걸으려 두어 시간 길을 달렸다. 한때 뻔질나게 달렸던 길이다. 신문을 한답시고 뉴욕, 필라, 볼티모어, 워싱턴을 무던히도 돌아다녔었다. 북쪽 길인 뉴욕, 필라는 지금도 여전히 오가곤 하지만 남쪽인 볼티모어나 워싱턴 쪽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버지니아 쪽 나들이는 거의 십여 년 만이다.

낯익은 표지판 지명들과 함께 떠오르는 많은 얼굴들로 십 수 년 전 세월이 나와 함께 달렸다.

생각할수록 낯 뜨거운 내 치기(稚氣)였다. 이민(移民)과 한반도 그리고 통일과 평화를 운운하며 다녔던 길이었다. 내 치기에 대한 부끄러움은 없다. 다만 그 길을 쉽게 접을 수 밖에 없었던 내 한계에 대한 부끄러움은 여전하기에  분명 치기(稚氣)였다.

옛 생각으로 두어 시간 달려 도착한 곳, 버지니아 Potomac 강변 Great Falls 국립공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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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광(風光)은 이름처럼 대단했다. 그러나 정작 나를 매료시킨 것은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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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 길, 숲길, 오솔길, 자갈길, 모랫길, 돌길 등 걷는 맛이 정말 쏠쏠한 곳이었다. 바위 길을 걷다  문득 휘어잡은 나무가지가 그리 반들거릴 수가 없었다. 나무는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손을 빌려 주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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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마주친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숨쉬는 생명들에게 눈인사 건네며 걷는 길에서 느낀 즐거움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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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계란, 사과 몇 쪽, 포도 몇 알과 빵 한 쪽… 그 달콤함을 만끽한 길 걷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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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로 들어서서 땀 닦으며 벗은 모자, 평소 모자를 써 본 적 없는 내가 아침에 집을 나서며 옷장에서 눈에 띄어 집어 든 것인데, 집에 돌아와 아내에게 들은 모자의 내력. – 이젠 장성해 서른을 바라보는 처 조카딸 아이가 초등학교 때 잠시 내 집에 머무를 때 쓰던 모자라고…. 무릇 모든 것에 연(緣)이 없는 것은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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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 일요일 오후 교통 체증은 두 시간 거리를 세 시간으로 늘여 놓았지만 그 길에서 되짚어 본 생각 하나. 사람 살이는 때론 정말 더디지만 결국 옳은(또는 신의) 길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뭐 내 믿음 같은 거.

딱히 통일 평화 운운 하지 않더라도 어디서나 그저 그런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나아가는 길.

오늘, 되돌아 부끄럽지만 부끄럽지 않은 길을 걷게 해 준 이길영 선생에게 감사를…

***때론 아내가 동행하지 않는 길이 편할 때도 있다. ‘더불어 함께’란 ‘홀로’를 인정하는 바탕 위에 서 있기에.

 

 

 

아침에

봄,  여름, 가을, 겨울… 해 뜨는 아침이 감사했던 날들은 얼마나 될까?

토요일 아침, 일터 가까이 제약회사 굴뚝 연기 사이로 떠오르는 아침 해를 마주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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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습 2 – 여름

폭풍우가 더위를 밀어내는 오후. 빗방울은 늘 순간일 뿐. 그저 스쳐 지나며 잊은 것들은 얼마일까. 이내 더위는 이어지고…. 여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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