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울방학을 끝내고 새 학기를 맞아 인문학교실을 다시 여신다는 홍목사님께서 새 학기 첫 시간 강의 내용을 보내 주셨다.
‘우린 일주일에 이틀은 손녀를 봐주고 다른 날은 책 읽고 산책하고 사람들 만나서 수다 떨면서 늙어가면서도 아직은 그런대로 잘 지냅니다.’ – 아직도 추위가 머물고 있다는 호주에서 지내시는 목사님 내외분 일상의 안부만으로도 나는 푸근해진다.
목사님의 인문학 강좌는 아직 늙어 간다기 보다는 나이 들어 간다는 말이 좋은 내게 나이 들어 가기에 느낄 수 있는 삶의 풍요로움을 더해준다.
이번 강의에서 목사님은 인간의 본성과 우리들이 환경인 자본주의에 대해 설명하시곤 이렇게 묻는다.
<우리에게는 이 개인주의적이며 탐욕적 인간의 본성을 극복해 내고 진정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나눌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적 세계는 불가능 할까요? 개인의 소유와 자유를 넘어서서 공동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요? 진정 인간은 인간의 본성을 이겨 낼 수가 없을까요?>
나는 ‘인간’이나 ‘세계’가 버거워 ‘나’와 ‘오늘의 나의 삶’으로 그 말들을 대체해 그 질문을 받는다.
이어지는 목사님의 질문.
<아니 그 정도 까지는 아니라 하더라도 탐욕적이며 야수적 인간성과 천박한 자본주의를 넘어서 우리 모두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은 정말 없을까요?>
그리고 목사님 스스로 ‘더불어 함께 살아가려고 몸부림 쳐온 사람들’로 꼽으신 네 사람, 신영복과 막스 베버, 헨리 조지와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가 그들이다.
그 중 눈에 새롭게 확 뜨인 막스 베버의 말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성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본주의의 부정적 측면인 개인주의와 탐욕과 이기심을 이겨내기 위한 처방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직업은 돈이 목표가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소명입니다. 그러므로 맡겨진 일에 부지런 하십시오. 많이 버십시요 그러나 검소하게 사십시오. 아끼고 절약해서 모은 것은 다른 사람들과 나누십시오”>
많이 버는 것과 나누는 것은 아직도 내 삶과 멀지만 내 직업이 하느님이 주신 소명으로 느끼고 부지런 하는 일과 검소하게 사는 일은 이 나이에 열심히 쫓는 일들이다.
이어진 그이의 물음들, 일테면 ‘함께’ ‘더불어’ ‘손잡고’ ‘소명’ ‘근검’ ‘절약’ ‘나눔’ ‘베품’ ‘필요한 만큼만’ ‘자연’ ‘자족’ 등은 끊임없이 흉내 짓이로라도 응답해야 하는데…
까닭없이 하늘 쳐다보던 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