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부지

우리 부부는 여전히 철부지다.

이른 아침 뉴저지 Englewood로 향하는 차안에서 울린 아내의 카톡에 담긴 지인의 인사. ‘지난 밤 뉴욕에 있는 딸내미는 아무 일 없지요?’

아뿔사! 이게 뭔소리? 내 채근보다 먼저 보낸 아내의 문자에 오늘따라 유달리 빠르게 응답한 딸아이의 문자. ‘간밤에 불이 나갔을 뿐, 난 아무 일 없는데…’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뉴스 검색을 해보니 지난 밤 맨하턴에  10시간 정도 정전사고가 났었다고… 에고 남만도 못한 부모라니…

낼모레 어깨 수술 날짜가 잡힌 아내가 춤을 배우러 가는 길, 나는 또 좋다고 운전기사로 나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아내가 춤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그 동네 한바퀴를 걸어 보겠다고 나섰다. 일요일 아침 조용한 동네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무 위 새 없는 새집, 집 앞뜰에서 유유자적하는 두더지, 더위에 익어가는 과실 등등 부촌 분위기에 빠져 걷는데 현관문 거칠게 여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목청 높은 소리 하나. ‘왜 남의 집 사진을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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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또래 할망구의 거친 목소리였다. 설마 도회지 부촌 할망구여서는 아닐게다. 그저 할망구 인성 탓인 게지!

어릴 적 남의 집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던 때가 떠올라 웃으며 동네를 벗어나 큰 길로 나서다. 갈라진 아스팔트를 가냘픈 몸으로 가려주는 꽃들이 부촌 할망구보다 엄청 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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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산책길이라니! 왈 오늘의 득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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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못된 부촌 할망구는 어쩜 오늘의 천사였는지도 모를 일. 산책길을 벗어나 춤 연습 하는 아내에게 돌아가는 길에서  만난 작은 것들도 모두 다 아름다웠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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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배움에 진지했지만 선생님과 동작이 같은 때는 거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두어 차례 오늘은 반복되어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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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노라고, 아내는 춤연습으로 땀을 흘리고 맞은 정갈한 밥상은 오늘 누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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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들린 필라델피아 한국식품점에서 만난 정말 반가운 얼굴 하나. 지지난 달 다녀왔다는 우리들의 고향, 서울 신촌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강장로님. 그와 내가 신촌에서 가까이 지내던 때는 그의 나이 사십 대, 나는 이십 대. 오늘 그 이는 구십을 꼽고 나는 칠십을 꼽았다. 사관학교 출신 아직도 꼿꼿한 그가 말했다. ‘감사한 맘으로 잠들고 못 일어나 그냥 갈 수 있다면…’ 사진 찍기 몹시 싫어하는 내가 아내의 명령에 아무 저항없이 순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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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과 국거리 몇 가지 부모님께 전해 드리고, 과일 몇 점 양로원에 누워 계신 장인 입에 넣어 드리고  집에 이르니 오늘 운전거리 300마일.

DSC06617올 추석 한인잔치에서 춤을 추겠다는 아내는 오늘 아침까지 물었었다. 강선생님은 흥춤을 권하시는데 혹시라도 그 무렵에… 그래서 살풀이 아니면 한풀이 춤이 어떨까?

웃으며 내가 한 응답.

‘이 사람아! 그 때까지 돌아가실 이 없네!’

그리고 내 맘속으로 한 말. ‘한풀이건 살풀이건 다 흥에 닿아야 하는 것을…’

삶과 죽음이 다 흥에 닿아 있다면… 우리가 아직 철부지 소리 들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