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포 전 일이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누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을 깻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 나시다 넘어져 머리를 다쳐 병원엘 가야하니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다.
어머니와 누이는 병원으로 가고, 아버지와 나는 새벽 시간을 함께 했다. 머리가 찢어져 제법 많이 피를 흘리신 상황을 설명하시며 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나는 차갑게 말했었다. ‘아버지, 지금 우실 연세는 아니짆아요. 행여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한들 아버지가 우시면 안되지!’
다행히 어머니는 머리를 몇 바늘 꿰맨 후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버지는 그 날 하루 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즈음 없던 일도 만들어 내시고, 조금 전 일과 옛 일을 뒤섞기도 하고, 뻔한 일도 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시기도 한다. 이런 생소한 모습의 어머니와 하루 종일 함께 하시는 아버지에게 난 여전히 차갑게 다가가곤 한다.
지난 달 생신상을 받으신 아버지는 1926년생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소학교 4학년으로 교육은 끝냈고, 일본 탄광 노동과 6.25 전쟁 참전 그리고 다리 한 쪽 저는 상이군인 – 내 기억에 없는 세월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 시절 이야기들 보다 더욱 손에 잡힐 만큼 많이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당신은 이따금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젓곤 하시지만 평생 그저 여리고 착하게 살아오신 내 아버지가 영문으로 기록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어제 6월 25일에 받았다.
누구의 도움없이 영문 원고를 쓰시고 Amazon을 통해 스스로 발간하신 <Korean Peninsula and my Experience>다.
아직 안경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시고, 하루에 당근 세 토막 천천히 씹어 즐기시는 튼튼한 치아와 오늘 또 다시 내가 새롭게 할 수 있는 뭘까? 고민하시는 내 아버지.
그렇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랑스런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이 빛나는 용사다.
용사 앞에 차가운 적 하나 있어야 마땅한 일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