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아파요?’ 늦잠에서 깨어 일어난 내게 아내가 물었다. 이젠 몸이 맘을 쫓아가긴 틀린 모양이다. 장기요양원으로 옮기시기로 결정하고 장인의 아파트를 정리하면서 아내는 사람을 부르라고 했었다. 노인네 짐이 뭐가 그리 많을까 싶기도 했고, 들기 버거운 가구나 물건들은 모두 청소하는 이들의 몫으로 남기고, 이제 장인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만 챙겨 옮기는 일인데 번거롭게 사람을 부를 일은 아니라 우겼었다.

몇 시간 과외 노동에 늦잠을 요구하는 몸을 스스로 다독여 위로하며, 아침 일기를 쓰듯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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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어 달 전에 넘어지신 후 수술을 받고 재활원으로 옮겼다가 다시 병원과 재활시설로 오가셨던 장인이 이젠 장기 요양원으로 옮기게 되었답니다.

어제 오후 장인이 사시던 아파트 방을 정리하면서 눈에 뜨인 노트 한 권이 있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이었습니다. 2012년에 발견된 담낭암과 싸우셨던 장모는 2016년 12월에 돌아가셨는데 그 기간 동안에 쓰셨던 일기장이었습니다.

매일매일 아주 짧게 두 세 문장 정도로 그날의 일상들을 기록해 놓으셨습니다. 그날 그날 자신의 몸과 마음의 상태, 만난 사람들, 먹은 음식, 가족 이야기 등등 아주 자잘한 일상의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으셨는데, 그 일기의 형식이 매우 독특했답니다.

모든 일기는 대화체로 쓰여져 있었고, 매우 친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 듯이 쓰여져 있었답니다. 그리고 모든 일기의 시작은 똑같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답니다.’ 그렇게 시작한 일기는 그날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와 음식에 대한 감사로 이어졌습니다. 일기는 돌아가시기 한 달여 전 글씨가 삐뚤빼둘한 모습으로 바뀔 때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일기 속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밉다’라고 지칭한 유일한 사람이 있었답니다. 바로 장인이었습니다. 그 ‘밉다’라는 표현은 몹시 싫다는 뜻은 아니었고, 철없는 아이를 바라보는 애처로운 심사를 표현한 말이었습니다.

이즈음 장인은 그야말로 철없는 아이와 다름없답니다. 게다가 이따금 오락가락하셔서 엉뚱한 말씀을 일삼곤 하신답니다.

장모의 일기장을 훑어 보다가 제 머리 속에 든 생각 하나랍니다. 장모가 살아 계셔 오늘 일기를 쓴다면 그녀는 틀림없이 오늘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참 감사한 하루였습니다.’라고 쓸 것이라고 말입니다.

지난간 시간들을 돌이켜 보며 감사한 마음이 들 때 삶은 언제나 살 만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답니다.

새로운 한 주간 감사함이 매일매일 넘쳐나는 하루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y father-in-law, who fell down about two months ago, underwent a surgical procedure, and then moved back and forth between a rehabilitation center and a hospital, is to move to a long-term care facility.

While I was cleaning up the apartment in which he had been living, I found a notebook. It was my mother-in-law’s diary. It was the record of her life and thoughts during the period from the time when cancer had been found on her gallbladder in 2012 to the time when she had fallen to it in December 2016.

She very briefly wrote about her day in a few sentences every day. While she recorded small stories about everyday life, such as the condition of her body and mind, people who she met, food, and family, her diary had a very unique style.

It was written in the conversational style, as if she had been having a nice chat with a very close friend. And all the beginnings were the same every day: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Then, she continued with gratitude for the people who she had met and food that she had eaten on that day. The diary was written until her handwriting became wobbly, about a month before she passed away.

There was only one person who she said she “hated” in the diary. It was her husband, my father-in-law. Of course, she did not mean that she really hated him, but she expressed it as a wistful and distressful feeling for an immature child.

In these days, my father-in-law has been like an immature child. Furthermore, as his mind often wanders, he strikes false notes frequently.

While I was scanning through my mother-in-law’s diary, one thought came across my mind. It was that if she were alive to write her diary today, she would definitely write, “God, it was a really grateful day today, too.”

I think that life is always worth living, if we feel grateful when we look back on for the past time.

I wish that you’ll have days of overflowing gratitude every day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추운 밤에

밤 사이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예보에 쉬는 날 저녁, 가게에 나갔었다. 날씨 온도 9도에 체감온도 -11도면 섭씨로 영하 12도에 체감온도 영하 24도, 경험상 세탁소 보일러가 얼기 십상인 터라 보일러를 켜 놓고 돌아오는 길, 전에 없이 큰 보름달이 먹구름을 타고 놀았다.

까닭없이 긴 밤에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책장을 넘기다가 눈에 꽂힌 대목을 곱씹다.

<이데올로기에는 치료약이 없다.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똑똑하게 만드는 여러 인지 능력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 중략 –

이런 능력들이 유해하게 조합될 때, 위험한 이데올로기가 얼마든지 분출한다. 누군가 어떤 집단을 악마화하거나 비인간화한 뒤, 그들만 제거하면 무한한 선을 달성할 수 있다는 이론을 구축할 수 있다. 그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한 줌의 추종자들은 불신자를 처벌하는 방법으로 그 발상을 퍼뜨린다. 무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발상에 휘둘리거나, 일신의 위협을 느껴 별수 없이 지지한다. 회의주의자들은 침묵을 강요 당하거나 고립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의 논리에 따르기 마련이라, 내면의 현명한 판단에 위배되는 계획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다.

온 나라가 유해한 이데올로기에 전염되는 현상을 확실히 막을 방법은 없지만, 예방책은 하나 있다. 바로 열린사회이다.>

치료약이 없는 것은 비단 이데올로기 뿐만이 아닐게다. 일테면 신앙이나 자잘한 일상의 인간 관계에 이르기까지 치료약이 없기는 매양 한가지다.

다만, 천천히 천천히 아주 느린 걸음으로 사람들은 열린사회로 향해 나아가고 있을 뿐. 그것이 역사일 터.

갇힌 존재라는 깨달음을 얻은 이들은 앞서갈 터이고.

때론 쳇바퀴 도는 세상처럼 보여도 사람사는 세상은 늘 어제보다는 조금은 나은 세상으로 나아가고 있지? … !

창문 밖 나무가지 우는 밤에.

소리에

내겐  매우 특별한 저녁이었다.  Delaware Art Museum에서 열린 한국 국악 그룹 Black String 연주회는 분명 내 분에 넘치는 호사였다.

연주회 시작을 알리는 이의 일성은 좀 과하다 싶었다. ‘델라웨어에서 한국의 전통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라는 그의 말이 내겐  ‘이런 시골 델라웨어에서 오랜 전통을 지닌 동양의 소리, 한국의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로 들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거슬렸던 것은 Korea가 아닌 South Korea라는 지칭이었지만 이내 수긍하였다. 현실이었으므로.

Delaware Art Museum의 메인 홀 150여 좌석을 메운 청중들은 연주회 시작과 동시에 소리에 빠져 들었다.

신기한 것은 다른 청중들이 아니라 내게 일어난 반응이었다. 나는 음악에 대하여는 그야말로 문외한이다. 오늘 같은 행사(내겐 그저 행사일 뿐이었다)는 그저 아내의 채근으로 따라 나섰을 뿐이다. 그런 내가 연주와 함께 내 속의 나와 함께 고개를 까닥이고, 어깨를 들썩이고 발장단을 맞추곤 했던 것이다.

매료!

난 매료라는 말의 진정한 뜻을 오늘 밤 느낌으로 깨달았다. 마지막 연주가 끝나고 청중들의 반응을 보고서였다.

우리 안에 내제된 힘이 비단 소리 뿐은 아닐 듯.

Korea를 다시 생각해 보는 밤에.DSC04709 DSC04710 DSC04715 DSC04718 DSC04720 DSC04760

밥솥

아내가 아마존에서 구입한 전기밥솥은 우리 부부에게 그야말로 안성맞춤이다. 생김새도 앙증맞아 마치 도시락같이 생긴 녀석은 우리 부부 한 끼 식사는 물론이거니와 넉넉한 숭늉도 제공한다. 가격은 단돈 23달러.

이제 겨우 평소 모습에 가까워 지신 장인은 여기 사는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들 뿐이란다. 장인이 누워 계신 곳은 자그마치 Genesis Healthcare이다. 이름하여 태초의 낙원을 누리는 곳이다. 비록 낮과 밤, 한국과 미국을 헷갈려 하시곤 하시지만, 며칠 전에 비해 많이 나아지신 장인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이들이 모두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이란다.

장인이 병원에서 나와 처음 계시던 곳도 내 집과 가까운 같은 회사 Genesis 요양원이었다. 우리 부부가 일터로 오가는 길목에 있거니와 집에서 채 오분도 걸리지 않는 가까운 곳이어서 선택한 곳이었다. 시설이나 분위기는 그야말로 호텔급이라고 말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만족했었다. 환자들을 비롯한 시설의 주요 종사자들은 거의 Caucasian, 왈 백인들이었다. 시설 종사자들은 매우 친절했다. 그러나 그 친절함은 매우 사무적이었고 그들이 돌아설 땐 웬지 싸한 느낌이 들곤 했다.

느낌처럼 장인은 그 곳에서 며칠 계시다가 다시 응급환자가 되어 병원으로 되돌아 갔었다.

정신은 여전히 오락가락하셨지만 치료 목적은 달성되었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또 다시 요양원으로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우리 부부는 이미 계셨던,  집에서 가까운 Genesis Healthcare로 옮겨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 곳은 여유 공간이 없었다.

만 하루를 기다린 후, 같은 회사지만 다운 타운에 있는 요양원으로 자리를 옮기셨다. 시설은 전에 있던 곳과 거의 엇비슷했으나, 환자들과 주요 종사자들은 거의 아프리칸 아메리칸 곧 흑인들 일색이었다. 그 곳은 뭔가 어수선하고 시끄러운 분위기였는데 그게 내겐 참 익숙했다.

그리고 오늘, 비교적 말짱하신 장인은 ‘이 곳에 있는 사람들은 다 착하고 좋은 사람들 뿐’이란다.

10인용 압력 보온 밥솥이 우리 부부에게 결코 사치일 수는 없다. 다만 단돈 23달러짜리 2인용 밥솥은 오늘 우리 부부에겐 그저 참 적합할 뿐이다.

장인에겐 지금의 Genesis Healthcare가 천국이다.  그가 그렇게 느낄 수만 있다면….

*** 장인이 병원에 계실 때 일이다. 얼굴 까만 젊은 간호원에게 아내가 말했었다. ‘내 며늘아이도 아프리칸 어메리칸이란다.’ 예쁘장한 간호원은 웃으며 아내에게 답했었다. ‘난 아프리칸 아프리칸이예요.’ 그녀가 환한 웃음을 안고 돌아선 후 우리 부부가 허하게 웃으며 한 말, ‘우리가 코리안 코리안’이라고 한 적이 있었나?’

눈을 치우며

‘이젠 이 집을 떠나야지…’ 눈 치우는 일이 온전히 내 몫인 된 어느 해 겨울부턴가 혼자 중얼거리는 말이다. 다행히 호들갑스런 일기예보와 달리 운동삼아 눈 치우기에 딱 적합할 만큼 내렸다. 집 앞에 쌓인 눈을 치우고 동네 한바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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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보다 먼저 이사를 하게 된 곳은 내 가게다. 지난 주에 새 가게 꾸미는 일을 시작하였다. 가게 간판을 주문하면서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DSC04677정말 막무가내로 시작했던 세탁소였다. 세탁소 일에 대한 경험이라곤 전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세탁소 안에 들어가 구경해 본 적도 없이 시작한 일이었다. 아무리 세탁소 간판만 내걸면 먹고 산다던 호시절 옛일이어도 무모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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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서른 해가 흘렀다. 그 동안 다섯 군데 세탁소를 운영하기도 했지만, 30년 꾸준히 해 온 곳은 지금의 세탁소 한 곳이다. 한 때 우후 죽순으로 생겨났던 주변 세탁소들이 하나 둘 문을 닫더니 이즈음엔 30년 전으로 돌아간 형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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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 이젠 일에서 손 놓을 때까지 떠날 수 없는 내 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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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나이에 새로 가게를 꾸미면서 혼자 중얼거리는 기도 세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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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들이 드나들며 기분 좋은 세탁소로 꾸미기, 우리 부부 일터와 쉼터가 공존할 수 있게 꾸미기, 언제든 손 놓을 때 누군가에게 자신있게 넘길 수 있는 세탁소로 꾸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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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내 욕심이 드러나는 기도임에 틀림없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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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리, ‘이젠 이 집을 떠나야지…’ 하는 생각보다 어쩌다 한 번 묵어가는 아이들 방을 치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더 큰, 내 본래 모습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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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세사모

월요일에 만나는 손님들은 종종 ‘주말 잘 지냈니?’, ‘주말에 뭐했니?’라고 묻는다. 이런 물음에 이즈음 내 대답은 ‘응,걸었어!’이다. 이따금 내 몸보다 족히 두 배가 넘는 이들은 말한다. ‘아니 너처럼 삐쩍 마른 애가 왜 걸어?’ 이럴 때면 나는 그저 빙그레 웃는다. 운동이 아니라 걸으며 나를 만나는 즐거움을 딱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산책의 즐거움을 깨달은 것은 최근 일이다. 내 삶이 산책길 같았으면…하는 소망을 품은 것도 물론 근자에 이르러서 이다.

산책길 같은 내 삶에서 만난 이들이 있다. 필라 세사모 벗들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만난 이들이니 채 오 년이 안되었다.  더러는 그 이전부터 연을 이어온 이들도 있지만  ‘세월호’라는 이름으로 다시 만난 그들은 그 이전과 달랐다.

어제, 그 벗들과  새해 맞이를 함께 했다. 족히 다섯 시간에 걸친 이야기 마당이었는데 내게는 모처럼 큰 공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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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전체 진행을 맡은 권오달님은 매사 진중하지만 언제나 여유로움을 풍긴다. 어제 행사를 진행하는 그의 머리 속엔 이미 필라세사모의 상반기 계획들이 자리잡았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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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그저 평범한 나같은 아줌마들이…’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현옥님은 필라세사모에서 그 ‘평범한 아줌마의 위력’을 보이는 이다. 그가 정리해 낸 필라세사모가 해 온 일들을 보고 들으며 든 생각 하나. ‘참 꾸준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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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칭 ‘공돌이’인 김태형님은 엉터리 문과 출신인 내게 부끄러움을 안기곤 한다. 다만 마이크를 잡으면 시간 조절이 잘 안되는 흠이 있긴 한데,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참 좋았다. 지난 이년 여 짧은 시간동안 벌어졌던 그 엄청난 일들을 쉽게 잊고만 나를 깨우쳤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에워 싼 운기에 대한 설명은 그저 덤이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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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운으로 말하자면 모임 장소로 흔쾌히 집을 내준 안주인의 장구소리에서 뿜어 나오는 소리와 가락이 으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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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백년을 돌아보며 한반도의 새해를 바라보는 이선아님이 던진 화두는 민중이었다. 나는 그의 말을  3.1 운동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공동체가 걸어 온 진보적 걸음의 주인이자 추동력은 바로 밑바닥 민중이다라고 받았다. 그런 뜻으로 그가 던진 그 시대의 만세꾼으로서의 필라세사모를 잠시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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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동작, 손동작에서 머리 회전까지 느려지기 시작한 내게, 이른바 미디어의 변화는 따라잡을 수 없는 세태 변화이다. 비단 나이 탓으로 느려진 나같은 세대 뿐만 아니라 제 고집만으로 좁은 세상에 사는 이들에게 던진 이호정님의 ‘뉴스를 읽는 혜안 찾기’에 대한 이야기는 오늘을 사는 이들에게 모두 유효하다. 어쩜 우리들의 삶이란 귀 쫑긋 세워 참과 거짓 사이 선택을 이어가는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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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유일한 초대손님 정성호님은 ‘촛불시위가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미첬나?’하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던졌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조금 삐딱한 마음이 되어 기도를 했다. 이 땅에서 공부하거나 잠시 머무르다 다시 한반도로 돌아가는 이른바 지식인들이 자신의 진정한 삶의 자리에서 함께하는 공동체를 위해 일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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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공부방은 시종 열공 분위기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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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진 그룹 토의는 진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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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시간 손님들을 위한 밥상 준비에 홀로 애쓰는 안주인에게서 그 순간의 민(民)을 보다. 집 주인 장석근님은 평소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필라세사모의 든든한 뒷배다.

DSC04674DSC04593걷지 않고 느낀 어제 산책의 즐거움이라니!

어제 그 자리에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 이종국님. 긴급한 가정사로 짧은 일정으로 한국에 나간 그가 전해 온 사진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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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 참여, 연대에 앞장 선 오늘의 만세꾼!

새해에도

보름만에 맑은 정신이 드신 장인을 보다. 그저 무덤덤하게 던지시는 ‘왔어!’라는 인사말에서 평소의 장인을 만나다.

두루 사람들에게 살갑지 못한 내 성격 탓도 있겠지만 장인과 나는 그리 긴 말을 나누고 살지 않았다. 덤덤히 고만한 간격과 거리에서 서로 있는 것만으로 안심하고 살았다.

그런 장인이 보름 전 수술을 받은 후 정신이 다소 오락가락했다. 때론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나를 맞기도 했지만 내게 낯설게 긴 말을 건네거나 터무니없이 살갑게 다가 오시기도 했다.

병원에서 nursing home으로 옮겨서는 그 오락가락하는 기미가 조금 더 심해져 아내와 나는 모처럼 진지한 부부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한해 마지막 날에 장인의 오줌을 받아내고, 새해 첫 날 간호원을 도와 장인의 기저귀를 갈며 새삼 사람 사이 관계에 대한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새해 첫 날 오후에 nursing home에서 다시 긴급환자가 되어 병원으로 옮기셨던 장인이 만 이틀만에 평소의 그로 돌아왔다.

음식 만드는 일에 재미를 붙인 후 새해 첫 날이면 내 손으로 만두 빚어 부모님과 처부모님과 함께 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그러다 한 분 먼저 가시고 한 분은 병원에 누워 계신 올 정월 초하루, 만두 빚을 여유는 없었다.

그러나 아직 맑은 정신으로 무덤덤하게 나를 바라 보시는 내 부모님들을 위해 정월 초하루 아침 아내는 동네 호텔 브런치 모임 자리를 마련했었다. 노인들은 몹시 좋아하셨다.

부모님을 모셔다 드린 후,  장인을 다시 찾았을 때만 하여도 잠에 취해 정신이 오락가락 했었지만 염려할 지경은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두어 시간 후 다시 병원을 찾게 된 장인이었다.

오늘, 장인이 무덤덤하게 던지신 ‘왔어!’라는 한마디에 그간에 쌓인 피로가 몰려 왔다.

바라기는 새해에도 내 부모님과 장인 뿐만 아니라 나와 그저 무덤덤하게 눈빛 나누던 모든 이들이 그저 그 자리에서 이제껏 처럼 딱 고만한 간격과 거리에서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