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에

뉴스들이 넘쳐나는 빠르기를 미처 쫓아가질 못한다. 주말로 들어서며 일을 마치고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뉴스들을 쫓다가 돋보기를 흐리게 하는 눈물 한 점, 또 그 놈의 나이 탓이다.

경기도 포곡면 유운리 유실 마을은 내 할머니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이다. 당시 할머니의 동생들 곧 내 아버지의 외삼촌들이 살고 계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름이나 겨울방학이면 그 곳에서 몇 주간을 지내곤 했었다.

내가 어릴 적에 서울 신촌에서 용인 유실 마을까지는 족히 하룻길 거리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전기가 이어졌을 만큼 촌이었다. 내가 이제껏 호롱불과 반딧불의 추억을 안고 있는 곳이다.

1972년 내가 대학교에서 첫 여름방학을 맞아 유실 마을을 찾았던 그 때 유실 마을은 이미 예전에 유실 마을이 아니었다.

유실 마을 산 너머 땅들은 이즈음 에버랜드로 유명해 진 삼성가의 자연농원이 막 들어섰다. 자연농원이 들어 선 이후 유실마을은 변해갔다. 이웃한 궤밀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유실마을 일대의 농토에 물을 대주는 저수지 위쪽에 대단위 돼지농장이 들어선 것이 그 때 쯤이었다.

그즈음 돼지 똥들로 저수지와 마을의 시내와 개천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 내가 어린 시절 멱을 감고 피래미를 잡던 그 맑던 물들이 코를 감싸쥐고 얼굴을 돌려야 하는 폐수가 되어 갔다.

1972년, 그해 여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라는 당시엔 경천동지라고 할 만한 뉴스를 유실마을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유실마을과 궤밀마을에  흩어져 살았던 내 일가 친척들은 그 후 모두 용인 땅을 떳다. 그 땅들은 삼성가의 땅이 되었다.

그 해 가을 이른바 시월 유신으로 대학문이 닫히고 긴 방학에 들어 간 이후, 내가 대학을 마치기까지 십 여년 동안 학기를 제대로 마친 기억이 없다.

짧은 세월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능라도 5.1 경기장 행사가 담긴 동영상이 눈물로 흐릿해지며 떠오른 옛일들이다.

참 고맙다.

그 세월 속에서 반듯하게 정권을 잡고 행사하는 권력자 하나 나온 남쪽이나, 삼대 세습이라는 미개한 터에서 반듯한 정신으로 민民 앞에선 권력자 하나 있는 북이.

정말 고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7.4 공동성명이라는 이름으로 회칠했던 권력자들의 명제들을 민民의 힘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이즈음의 세월들이.

바라기는

15만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단 한사람 만이라도 ‘아니오’하는 사람 나오는 북이 되길…

70년 분단의 이름 팔아 배 채어 온 단 한 놈 만이라도 과감히 이른바 혁명적으로 정리하는 남이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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