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불출

세상 많이 바뀌었다해도 참 창피한 일이다만 오늘은 팔불출이 되련다.

아무리 불출(不出)이어도 감사해야 할 얼굴들은 먼저 기억해 두어야  눈감아 줄 사람 하나 둘은 있지 않을런지.

내가 오늘 감사를 드려야 할 이들은 델라웨어 한인회와 델라웨어 한국 학교를 섬기고 봉사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두 단체의 이름을 이어 온 이들이다. 오늘 면면을 보니 어느새 이민 삼, 사대에 이른다. 참 고마운 일이다.

추석을 즈음하여 열리는 델라웨어 한인 축제를 우리 마을에서 빼놓지 못할 연례행사로 자리매김 해 준 한인회장 김은진님과 한국학교장 조수진님께 드리는 고마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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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사에서 마주하는 올드 타이머들의 얼굴들은 더할 수 없이 반갑고 고맙다. 초대 한국학교 교장이신 배성호 목사님 내외분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렴, 진짜 고마운 이들은 이세, 삼세, 사세 아이들이다. 눈에 띄는 스물 서른 안짝 나이에 이 행사를 위해 뛰는 아이들을 보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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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특별히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두 사람이 있다. 이 감사를 드린 후에야 나는 불출 노릇을 할 수 있을 터.

뉴저지의 안젤라 정 선생과 필라델피아의 케이트 김 선생이다. 두 분은 오늘 아내와 함께 소고춤을 추었는데, 두 분은 선생님이고 아내는 학생 사이인 셈이다. 몇 번의 연습과정과 오늘의 공연을 보며 내가 두 분, 정선생과 김 선생에게 드리는 감사는 정말 커야 마땅하다. 우리 마을 행사에서 내 아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두 분의 애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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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나는 팔불출.

애초 나는 ‘하겠나?’ 싶었다. 돌고 돌고를 반복하는 춤사위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소고춤을 아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동작이 느리거나 여유와 쉼이 있는 춤사위가 아니어서 아내에겐 참 버거워 보였다. 게다가 최근 서너 달 어깨 통증으로 물리 치료를 받고, 침을 맞고, 약을 먹는 처지라 되겠나 싶었다.

아내가 춤을 출 때, 내 머리 속 생각 하나. ‘에이고, 제발 넘어지지만 말아라!’

안젤라와 케이트 두 분 선생 덕에 아내의 꿈은 또 하나 이루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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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팔불출인데…

내 아들이다. 제 어멈 행사라고 열 일 제치고 함께 해 주었다. 내가 뭘 더 바라랴!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문 앞에 꽃 병이 배달되어 놓여 있었다. 오늘 직장 일로 함께 못한 며늘아이가 보낸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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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길에 완벽히 불출로가자,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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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사하는 딸아이로.

대화

추석을 앞두었던 지난 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가 문화의 차이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머리에 꽃여 지난 일요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문화의 차이에 대해 짧은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가운데 Charlie가 내가 보낸 편지의 두 배나 되는 긴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네 살 위지만 손주가 다섯이고, 대기업 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내가 만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우리 동네 중심이겠지만…) 백인이다.

그가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누군가 단 한사람에게 만이라도 그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 그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 답신을 번역해 내 한글 블로그에 번역해 올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내 답변이 왔다. “오, 기대되는데….”

그와 내가 주고 받은 편지의 길이를 합치니 제법 길어졌다만, 인종에 관계없이 내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 단면일 터이니… 누구가에겐 꼰대스러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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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이에게서 들은 말이랍니다. 그녀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남편은 백인(코카시언, 유러피안 아메리칸, 당신이 무어라 부르든…)입니다.

결혼한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매사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해 졌지만, 젊은 시절 결혼 초기에는 사소한 것에서 부부 사이 의견이 충돌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예를 든 상황들에는 이런 것도 있었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녀가 말했답니다. “이 음식은 한국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예요.”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한국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지? 한국사람들 모두는 아니겠지?”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인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을 떠올렸답니다. 일인칭 단수인 ‘나’를 쓰기 보다는 복수인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일테면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등입니다. ‘우리 오빠, 우리 누나, 우리 아들, 우리 딸’ 등도 자주 쓰는 말들입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는 말은 어떠신지요? 실제로 제 또래 정도만 하여도 입에 붙어 다니는 말들이랍니다.

말의 습관도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어서 이즈음 젊은이들은 우리 남편, 우리 아내 대신에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한다고들 합니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언어습관은 오랜 농경사회에서 대가족 중심으로 살아온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저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월요일인 내일은 한국인들에겐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한국인들의 추수감사절이랍니다. 각자 ‘나’로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우리’가 되는 날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형제 자매들이 부모와 함께 모이는 이 명절 전후에(특히 명절 후에) 부부 싸움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답니다.

누구나 ‘나’와 ‘우리’로 살아갑니다. ‘나’로 살 때와 ‘우리’로 살 때, 그 어느 순간이라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At a gathering last week, I talked with a woman. She is a Korean-American whose husband is white (Caucasian, European American. Whatever you may call this race!).

As they have been married for a long time, their ways of thinking or viewpoints have become similar now. But, early in their marriage, trivial things caused conflicts of opinion between them so often, she said.

One among the instances which she told me about was what happened at a restaurant one day.

She said, “This is food which Korean people like very much.” In response to her words, her husband tilted his head and asked, “How can you say ‘Korean people’ so surely? Not all the Korean people, right?”

While I was hearing about the instance, one of the unique linguistic habits of Korean people came across my mind. Koreans so often use the first-person plural, “우리 (woori, meaning ‘we or our’)” instead the first-person singular “나 (nah, meaning ‘I or my’)” where the latter should be used, especially in English. For example, Koreans usually say “our house, our school, our church, our country,” and so on. Even, expressions like “our brother, our sister, our son, and our daughter” are used quite naturally. Thus far, you may say, “Strange! But it could be.”

How about the expression “our husband or our wife”? In fact, for many Korean people, at least those in my generation, it is quite a natural expression.

As the linguistic habits also change over time, nowadays young people use the words, “my husband and my wife” instead.

The linguistic habit of using “we or our” instead of “I or my” may come from the community culture in agricultural society which lasted for a long time. It is just my thought.

Tomorrow, Monday, is “Chuseok,” the biggest holiday in Korea. It is like Thanksgiving Day in America. It is the day in which family members who have been living individually as “나 (nah, meaning ‘I’)” gather and become “우리 (woori, meaning ‘w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around this holiday (especially after it) in which brothers, sisters and parents gather together, the quarrels between husband and wife happen in many families.

All the people live as “나 (nah, ‘I’)” at the same time as “우리 (woori, ‘we’).” I wish that you’ll be generous and broad-minded at every moment, whether you live as “나 (nah, ‘I’)” or “우리 (woori, ‘we’),” in this week and beyond.



 

Young에게,

(네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단지 한국 대 서구 문화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네! — 누군가의 대가족 성원이 되는 것, 잠재적 새 구성원 또는 불행하게 (혹은 부지불식간에) 곧 “가족”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세대간의 논쟁 가능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어떤 가족의 경우, 주먹, 총, 칼이 등장하기까지 하지. 모든 이들을 진정시키고, 만취자를 내쫓기 위해서는 강한 인물이 요구될 수도 있지.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것이 가족 모두를 서로 행복하게 유지시키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라네.

자네가 언어사용에서 문화간의 미묘한 차이가 의견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고등학교 때 배웠듯이)  서구문화에서 전쟁을 촉발시키기 까지 했다지.

내 첫번째 정식 직장은 뉴욕주 서부에 있는 영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소유한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였네. 미국내 첫번째 지사로, 내가 17번째로 채용된 직원이었지. 불과 5년동안에, 직원은 220명으로 불어났고, 정확히 50개 국가 출신 직원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지.

때로는, 문화(의 차이)가 문제가 되었었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화합하며 일하여, 정해진 시간과 예산으로 모든 (업무)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실제 잘 되어나갔지만, 노력이 필요했었다네.

(그 때의 경험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소개받는 기회였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것, 일테면 행복한 결혼생활, 자랑스러운 자녀, 생활수준의 향상, 개인적 성취감 등을 원한다는 것을 꽤 일찌기 깨닫게 해 주었지.

이후 직장에서는 동부 유럽과 아시아의 가혹한 문화에서 탈출했고, 그러기 위해 극심한 위험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과 일했다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 사람은 어느 중동 국가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그와 가족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처지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네. 그렇지만, 그와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들이라네. 그 가족 중 일부는 고국을 탈출하지 못했고.

어딘가에서 온 이웃 혹은 인근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앎으로써 평화롭고 화합하며 함께 사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 만큼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내 장인은 어렸을 때, 다리 건너 다른 지역에 가면 심하게 얻어터지거나 심지어 죽는데, 장인이 알았던 아이들 몇몇이 “있어야 할 곳”에 머무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내게 말씀하셨었네. 새롭게 도착한 문화가 이 나라에 완전히 받아들여지는데 수십년이 걸리고, 어떤 문화는 더 많은 세월이 걸린다네. 그것은 마찰을 일으키고.

진실은 우리 모두는 정말로 같은 것을 원하며, 만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점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것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춘다면, 모두가 유복해 진다는 것이지.

나아가서, 이 같은 태도가 가정에서도 필요한데, 열린 태도는 각 개인이 이기적이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네.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학대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우에 한해, 교육이 도움이 될 걸세.

사람들이 변화에 마음을 터놓게 하는 것, 대화 중에 차이점을 끝까지 듣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가정이 그 방법을 배우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네.

가족모임은 자녀와 잘 지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가족의 ‘어른’은 다른 가정과의 관계에서 열린 태도를 고무시켜야 할 걸세. 하지만, 모든 가정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어떤 문화는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네.

중동 문화의 아주 많은 것들이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온 부족적 행태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중동 사람들에 대한 문제로 보고 있다네. 부족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아마도 위험하거나, 어떤 경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바라보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일단 사회가 부족적 행태를 넘어서서 여러 혹은 다수 민족의 “국가 (national)” 문화가 된다면, 우리의 꿈을 이루는 진전은 성취가능성이 더욱 높아져 가는 경우가 많다네.

불행히도, 현재 이 나라에서는 갈등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 같네.

역사상 처음으로, ‘대화’의 대부분은 마주 보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인터넷 플랫폼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어떤 집단은 그 플랫폼을 이용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지. 모든 관계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모두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일 일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하게 될테니까.

Charlie


Young,

Not just in Korean vs. Western culture! — getting anyone’s extended family, plus the prospective new members, plus those who may be unhappily (or unknowingly) soon leaving “the family” — creates a situation ripe for generation of arguments!  In some families, fists, guns or knives come out. It can take a strong personality to keep everyone calm and throw out the drunks.  Running a company is tough?  Not as hard as keeping an entire family happy with each other.

You point out that just subtle differences in use of language between cultures can generate some disputes, and such things supposedly (so we’re told in high school) have started wars in Western cultures too.

My first professional job brought me into a consulting engineering organization owned by a mix of British & Canadian people, with the office based in western NY state.  First American office, I was the 17th person hired.  Within five years, we had 220 people in that one office — and there were exactly 50 different nationalities working together with me.  In some instances, culture became an issue.  Almost everyone realized that this was something we all had to work together on to create working harmony and complete our contracts on time and in budget.  It actually went well, but took work.  I realized fairly quickly that this had been a great introduction to the people of the world for me, and that most everyone wants the same things in life —a happy marriage, children they can be proud of, advancement in their living standards, and a feeling of personal accomplishment. In later jobs, I worked with people who had escaped from harsh Eastern European and Asian cultures, and had endured great danger and hardship to do so. One man living in this area still has a standing death sentence for him and all his family if a certain Middle Eastern people find them.  Even then, these same goals were what he and his family sought in coming to the United States.  Some of his family didn’t make it out of their home country in the escape effort.

It is up to all of us to want to live together in peace and harmony by learning about the people next door or across town who came from somewhere else, because those very people might be able to help us just as much as we can help them.  Yet my father-in-law told me that as a child he couldn’t walk across certain bridges into other neighborhoods without be severely beaten or killed – and some of the kids he knew proved that to be true to those who stayed “where they belong”.  It takes many decades for any newly arriving culture to be fully absorbed into this country, some longer than others.  Many people do not like change, but others realize it is an opportunity.  That generates friction.

The truth is that all of us really want the same things and if we focused more on what the other person can contribute and less on their differences from us, everybody is better off.  By extension, the same attitude is needed in families, but an open attitude requires that each person understand what people want, and not be selfish or rude.  Education helps only if the school teaches about what causes conflict and does not tolerate abusive behavior.  I know it is not easy to open people up to change and hearing out differences in talking with others, but the family is a good place to start learning how.  Family gatherings teach how to get along to their children and the family ‘elders’ should encourage an open attitude in their relationship with other families.  Not every family does that, and some cultures don’t promote it.

This is the problem many people see in the Middle East, as so many parts of those cultures are based on tribal behavior that has existed for many centuries. A tribal outlook inherently looks at others as different, possibly dangerous, and in some cases unacceptable.  History suggests that once a society gets past tribal behavior to become a “national” culture of several, or many peoples, progress in obtaining our dreams becomes more achievable.

Unfortunately, right now we have an unusually high level of conflict in this country.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much of the ‘ dialog  is taking place on the largely impersonal Internet platform rather than face-to-face, and some parties are using that platform to encourage conflict.  It may be difficult to get all the parties working together and working towards the goals everyone wants, but it needs to happen. Everyone will lose if it does not.

Charlie

단순함에

대구에서 목회하는 후배가 있다. 그가 기특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와 대구의 이미지 – 모두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허상일 터이지만- 가 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기특하고 존경스럽다. 비록 내 머리 속 허상일지라도, 그의 이미지와 대구의 이미지가 하나가 된다면 썩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 아침, 그가 페북에 “심플하게 산다”라는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한 글을 읽고 일터로 나갔다.

“걸을 때든 요리할 때든 활력이 넘치게 하자. 요컨대 ‘힘차게’ 살자. 그러기 위해선 스트레스, 불안, 걱정, 분노, 슬픔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당신의 적이다. 활력은 비싼 화장품보다 피부에 더 좋다.”

단순하게 살자거나 힘차게 살자거나 피부건강을 지키자거나 내심 작심이나 결심해 본 적은 없지만, 최근 수 년 들어 몇 가지 새로운 일들을 하며 산다.

일테면 집안에 물건들을 줄이는 일도 그 중 하나이다. 정들었던 물건들일지라도 딱히 필요 없는 물건들은 버리거나 때 되면 찾아오는 이들에게 기부하고,  우리 두 내외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한 사지 않는 일이다. 이 일로 종종 아내와 다투곤 한다.

가게 일을 줄인 것은 올해 들어서 시작한 일이다.  주 중 이틀은 오전 12시면 아내와 함께 가게를 나선다. 처음엔 이래도 될까 싶었는데, 아무 일 없이 가게는 잘 돌아갔다.

공짜 시간을 마련한 처음 얼마간은 아내나 나나 하고 싶은 것들은 많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게을러지기만 했다.

반 년 쯤 지나자, 나름 그 시간들이 아주 귀하게 우리들의 시간이 되어간다. 아내와 함께 걷는 일도 그 중 하나이다. 오늘은 참 걷기 좋은 오후였다.

그러고보니 대구에서 목회하는 후배는 아내의 친구이기도 하다.  텃밭 농사짓는 그의 교인 하나가 고추 서른 근 거두어 열 근을 가져다 주었다 하여, 내가 ‘그건 착취가 아니냐?’ 농을 했다만, 그도 머리 허연 연륜 깊은 목사님이시거늘….

아무렴, 대구에서 목회하는 내 후배인데, 서른 근도 심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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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설

오늘 유엔 연설에서 자화자찬으로 웃음거리가 된 트럼프에 대한 ABC의 트윗에 달린 댓글들이 크게 웃음을 준다. 한 아낙의 뿜는 모습에 담긴 조롱이 가관이다.

트럼프는 정말이지 독특한 캐릭터이다.

한 두어 달 전에 플로리다에서 낯선 풍경에 놀랐던 경험이 있다. 트럼프를 찬양하는 거리의 대형 입간판과 트럼프를 응원하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달리는 도로의 자동차들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쿠바를 비롯해 하와이 버진 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를 위시하여, 베트남 등의 인도차이나, 한반도,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 일들을 미국민들은 애초부터 이제까지 진실을 모른다고 일갈했었다.

역사의 역설이랄까?

평생 치열하게 싸웠던 하워드 진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워싱톤의 가면을 들추어 내는 일을 트럼프가 해 내는 것은 아닐까?

이 참에 정말이지 한반도 문제만이라도….

편지 – 사는 맛

이민 와서 어쩌다 시작하게 된 세탁소 주인 노릇이 어언 30여년이다. 한 땐 네 곳의 세탁소와 픽업 루트까지 이 업으로 남 못지 않게 바빳었다. 세탁소를 하기 싫어 한 눈을 팔다 폭삭한 적도 있었다. 나름 미 전역 이 업계에서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해 주는 이들도 몇몇은 된다.

누구에게나 그 때가 찾아오듯 일이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이르러 일을 줄였다. 한참 때에 비하면 이즈음 세탁소 일은 그저 놀고 쉬는 셈이다.

바램이 있다면 아내 덕에 30여년 지켜온 이 세탁소에서 일할 수 있는 날까지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다.

그 바램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일이 생긴 것은 올 초였다. 내 세탁소가 있는 샤핑센터의 건물주는 삼대 세습을 받은 젊은 친구다. 그의 할아버지와 계약을 맺고 들어 가 그의 아버지를 거쳐 젊은 새 주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가게란 많은 입주자들 가운데 Acme나 Kmart 등 큰 체인점들을 제외하면 내 세탁소가 유일하다.

젊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뜻. 젊은 주인이 몇 년 동안  꿈꾸어 온 샤핑센터 리모델링 계획안이 시市 의 승인을 받은 게 올 초였다. 그 사이 젊은 주인과 두 차례 만나 그의 계획을 듣고 내 세탁소 임대 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문제는 그의 계획안에 따르면 내 세탁소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아직 잔여 임대 기간이 넉넉하고 계획안이 실행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기에 좀 느긋했었다. 그런데 아직 계약기간이 몇 년 남아 있다던 Kmart가 다음 달인 10월에 폐업한다는 발표가 몇 주 전에 있자 젊은 주인의 리모델링 실행이 급물살을 탓다.

젊은 주인은 올 11월 까지 새로 꾸미는 건물로 이전할 것을 권유해 왔다. 말이 좋아 권유이지 통보였다. 하여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이즈음이다. ‘십 년 만 젊었으면 일 한번 벌려 볼텐데…’ 와 ‘나이가 십 년 만 더 들었다면 그냥 손 털고 말텐데… ‘그 사이에서 어중간한 생각들이 수없이 오고간다.

하여 우선 내 가게 손님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띄운 것은 지난 일요일이었다. 지난 한 주간 내 세탁소를 드나든 많은  손님들이 ‘걱정 말라’며 해 준 말에 몇 년은 젊어졌다. 그들이 해 준 말이다. ‘너희 부부가 어디로 가던 나는 쫓아 간다.’

짧은 메세지를 보낸 이들도 많았다. 일테면…

I wish you luck in whatever your decision will be. Your letters are so heartwarming! – Sara Carley

I’ve enjoyed your weekly messages for years. No matter where you move you will have my business. Thank You, – Francis Poole

Thank you so much for this information. I greatly appreciate your service to so many. I have prayed for you and God’s very best plan for you and your future. Thanks again, – Cami Seward, your grateful customer

No matter where you move…..my wife and I will still be loyal customers. Thanks for you service… – Rick and Valerie Stephens

just let us know, we will follow you – EDWARD WALKER

As a business owner I completely understand your challenge! I learned of your store when I was in high school, and have been coming every since (over so 25 yrs) and thus if you move near Acme I will follow! Leave the decision in prayer, but know that you have support! Thank-you, – Shannon Marchman Clark

등등.

사는 맛이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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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저희 세탁소에 오셨던 분들은 Kmart에 내 건 “Store Closing”라는 커다란 사인판을 보셨을 것입니다.

Kmart가 문닫다는 소식에 여러 손님들이 저희 부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되는거니?” 하는 물음입니다. 사실 Kmart가 갑자기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저희 부부도 조금 놀랐었답니다. 한 두어 달 전에 샤핑센터 건물주를 만났을 때만 하여도 Kmart 임대계약이 2년 넘게 남아 있음으로 그 때까진 영업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이랍니다.  Kmart의 갑작스런 폐업은 그 본사의 결정인 듯 합니다.

이제 제 세탁소가 있는 쪽 건물에는 Pep Boys와 저희 K&L Cleaners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손님들의 물음은 아주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30여년 영업을 해 온 이 자리에서 제가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이 세탁소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제 소망은 이루어 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 들어 두차례 landlord를 만났었답니다. 그가 최근에 하고 있는 샤핑센터 리모델링에 대한 계획을 듣고 향후 제 세탁소 리스 연장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자 한 일입니다.

그는 샤핑센터 리모델링에 대한 그의 꿈을 담은 청사진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권유했답니다. “지금 너희 세탁소가 있는 자리는 녹지로 변경될 것이다. 그러니 현재 ACME가 있는 쪽 건물로 이전했으면 한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리스 기간인 내년 8월 말 까지 현재 장소에서 영업을 할 수 있지만 가급적 올 11월 까지는 결정을 내려 주길 바란다.” 물론 새로운 계약조건 등 몇 가지 부대 조항들에 대한 설명도 있었지요.

솔직히 우리 부부는 이즈음 어떤 결정이 최선의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Acme 쪽으로 옮길지? 가까운 인근에 다른 장소로 이전을 해야 할지? 이전 시기는 언제가 가장 좋을지? 등등의 고민이지요.

그런 고민들 가운데서 아주 확실하게 결정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답니다. 무엇보다 우선은 걱정스런 고민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최종에 어떤 선택을 하던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다짐이랍니다. 두 번 째는 현재 제 가게 손님들이 가장 편안하고 만족할 선택을 해 보자는 것이고, 그럼으로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각이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부부가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옮기지 않을 곳이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이건 소망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날 수도 있겠기에 기도의 영역으로 넘기는 것이랍니다.

바램이 있고 기도할 것이 있는 한, 삶은 살만한 것이기도 하고 행복을 느낄만한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당신의 기도와 바램들도 하나 하나 이루어지는 계절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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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of you who came to the cleaners recently might have seen the big sign, “Store Closing,” at K-mart.

Because of the news of K-mart closing, many customers asked the same question to my wife and me: “How about you? What will happen to you?” In fact, my wife and I were somewhat surprised at the news, too. That’s because the landlord of the shopping center told us that K-mart would continue business until the end of the lease which would end over two years later, when we met him about a couple of months ago. It seems to me that the sudden closure of the K-mart was the headquarters’ decision.

Soon, on my side, just Pep Boys and K&L Cleaners will be left. So my customers’ question is only natural.

I don’t think that my hope, which is to run the cleaners until I retire at the same spot as the past almost 30 years, will be realized.

This year, I met the landlord twice to hear about the remodeling plan of the shopping center and to discuss the extension of my lease.

The landlord showed us the blueprint which reflects his dream of remodeling and told us: “The area where your cleaners is located will become a green area. So I want to suggest that you move to a space on the Acme side. Though you can continue your business at the current place until the end of the lease term, August, 2019, I ask you to make a decision by November, if possible.” Of course, he also told us new lease conditions and some other strings attached.

Frankly, my wife and I have been scratching our heads over what will be the best decision. Should we move to the Acme side? How about finding a new place nearby and moving there? If we move, when will be the best time?

While we are worrying about the near future, my wife and I set up three basic principles. First of all, instead of falling into worrying itself, we made a resolution that we’ll do our best, whatever the environment will be after our final decision. Second, the decision should be the one which will make our current customers feel most comfortable and satisfied. The third one is our wish that we will not move again until my wife and I cannot work anymore. But, unfortunately, it will be beyond our control, so we will move it to the prayer territory.

If we have dreams and wishes and something to pray for, life may be worthy of living and have room for feeling happy. Don’t you think so?

I wish that your prayers and dreams will be realized one by one in this season.

From your cleaners.

사정(事情)

장인과 사위 사이를 이룬 지 서른 다섯 해가 지난 오늘 처음 깨달은 사실 하나.

물론 알곤 있었지만 깨달은 것은 처음.

장인과 나는 똑같이 일남 삼녀

쯧,

철없을 조건은 똑같이 갖추었다는.

나는 장인이 있고, 비록 먼저 떠나셨지만 장모도 있었고

남북 이산가족이자 외톨이였던 내 장모 덕에 평생 장인 장모를 모셔보지 못한

내 장인은 사위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

딱히 추석이랄 것도 없이 오늘은 장인, 내일은 내 부모와 함께 할 요량이다만

우리 모두 그저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살 터.

뉴스에

뉴스들이 넘쳐나는 빠르기를 미처 쫓아가질 못한다. 주말로 들어서며 일을 마치고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뉴스들을 쫓다가 돋보기를 흐리게 하는 눈물 한 점, 또 그 놈의 나이 탓이다.

경기도 포곡면 유운리 유실 마을은 내 할머니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이다. 당시 할머니의 동생들 곧 내 아버지의 외삼촌들이 살고 계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름이나 겨울방학이면 그 곳에서 몇 주간을 지내곤 했었다.

내가 어릴 적에 서울 신촌에서 용인 유실 마을까지는 족히 하룻길 거리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전기가 이어졌을 만큼 촌이었다. 내가 이제껏 호롱불과 반딧불의 추억을 안고 있는 곳이다.

1972년 내가 대학교에서 첫 여름방학을 맞아 유실 마을을 찾았던 그 때 유실 마을은 이미 예전에 유실 마을이 아니었다.

유실 마을 산 너머 땅들은 이즈음 에버랜드로 유명해 진 삼성가의 자연농원이 막 들어섰다. 자연농원이 들어 선 이후 유실마을은 변해갔다. 이웃한 궤밀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유실마을 일대의 농토에 물을 대주는 저수지 위쪽에 대단위 돼지농장이 들어선 것이 그 때 쯤이었다.

그즈음 돼지 똥들로 저수지와 마을의 시내와 개천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 내가 어린 시절 멱을 감고 피래미를 잡던 그 맑던 물들이 코를 감싸쥐고 얼굴을 돌려야 하는 폐수가 되어 갔다.

1972년, 그해 여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라는 당시엔 경천동지라고 할 만한 뉴스를 유실마을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유실마을과 궤밀마을에  흩어져 살았던 내 일가 친척들은 그 후 모두 용인 땅을 떳다. 그 땅들은 삼성가의 땅이 되었다.

그 해 가을 이른바 시월 유신으로 대학문이 닫히고 긴 방학에 들어 간 이후, 내가 대학을 마치기까지 십 여년 동안 학기를 제대로 마친 기억이 없다.

짧은 세월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능라도 5.1 경기장 행사가 담긴 동영상이 눈물로 흐릿해지며 떠오른 옛일들이다.

참 고맙다.

그 세월 속에서 반듯하게 정권을 잡고 행사하는 권력자 하나 나온 남쪽이나, 삼대 세습이라는 미개한 터에서 반듯한 정신으로 민民 앞에선 권력자 하나 있는 북이.

정말 고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7.4 공동성명이라는 이름으로 회칠했던 권력자들의 명제들을 민民의 힘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이즈음의 세월들이.

바라기는

15만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단 한사람 만이라도 ‘아니오’하는 사람 나오는 북이 되길…

70년 분단의 이름 팔아 배 채어 온 단 한 놈 만이라도 과감히 이른바 혁명적으로 정리하는 남이 되길….

사람 이종국

이즈음 나이 육십에  ‘평생 운운’ 한다면 욕먹기 딱 십상일 터. 허나 어찌하리, 그에겐 평생 처음인 것을… 아직 환갑에 이르지 못한 나이에.

내가 후배인 그에게  존경이라는 말을 마다치 않는 까닭은 그의 담백함 때문이다. 그는 매사 참 담백하다.

화려한 수사를 즐기는 내게 ‘시민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로 시작하여 어지간히 기름칠 할 일이 많겠다만, 내 후배 이종국은 그냥 담담하게 그의 삶이 시민운동인 사람이다.

그가 오늘 평생 처음인 일을 해 내던 날, 그의 맏딸 혼인날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내 아들 며느리가 함께 해 잠시 놀랐었는데, 우리 아이들과 후배의 딸 아이가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깜박 했었던, 모두 다 내 나이 탓이다.

후배 이종국에게 ‘시민 운동’은 뭐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운동’도 아니다. 그냥 숨쉬는 삶이다. 지금 여기에서 소외된 삶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을 실천해 나가는, 마치 숨쉬는 것처럼 그냥 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안지 십 수년 동안 그의 한결 같은 모습이다.

오늘도 한결같았다. 딸아이 시집 보내는 날, 그는 오늘도 덤덤하였다. 나는 그런 그가 참 좋다.

그의 덤덤함으로 삶에 불을 지피는 일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던 오후였다.

그리고 모처럼 얼굴 인사를 나눈 선후배들, 오늘 자신들이 이고 있는 아픈 먹구름들을 이야기하면서 웃을 수 있는 이들, 모두 얼마만큼씩은  후배 이종국에게 빚을 지었을 터.

아직 환갑에 이르지도 못한 내 후배 이종국, 오늘 하루만은 ‘평생 운운’은 온전히 그의 것!

몇 잔 와인으로 취기 오른 날에.

 

 

배움에

올 초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노명식이 쓴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육영수가 쓴 ‘혁명의 배반 – 프랑스 혁명의 문화사’와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 들이었다.

딱히 이 나이에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적 허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주일 여 짧은 일정으로 돌아 보았던 파리 여행에 들였던 내 시간과 발품에 대한 예의랄까? 아무튼 여행 시간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약 백 여년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책을 덮고 여행을 돌아보며 서너 가지 정리했던 생각들이 있었다.

우선은 나이 들면 고집 뿐이라는 말이 정말 옳다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살아 오면서 쌓인 내  생각에 대한 신뢰였다. 이른바 신앙이다. 내가 믿고 고백하곤 하는 성서적 역사관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인데, 역사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곧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라는 내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는 말이다.

백 여년에 걸친 혁명과 반혁명 또는 역사의 진보와 반동은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가는 역사 발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동성애, 난민 등등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갈등과 고민들 역시 당연한 논쟁과 투쟁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 코뮌은 이 백 여년 전에 끝난 일들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근래의 역사들을 돌아 봄에 있어 십년 단위로 끊어서 역사를 정리해 읽고 그 시간들을 다시 연결해 보는 생각을 익혀 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오늘, 사람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이 새로운 깨달음이 파리 여행과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내가 얻었던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이즈음 나는 몇 권의 책들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읽고 있는 중이다.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중반 까지 한반도에 대한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이다. 내가 겪어 보지 못했지만 오늘의 내 생각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다.

나는 십 년 단위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끊어 읽고 다시 연결해 보기도 할 것이다.

살며 때때로 ‘내가 이런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믿는 신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이즈음이 그렇다.

이 나이에 가르쳐주는 선생을 만나고 함께 배우는 뜻 맞는 좋은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