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맛

가족을 제외하고 한국사람들을 만나는 일은 아주 드물다. 가족 이라야 거의 붙어사는 아내와 일주일에 한두차례 찾아 뵙는 노부모님과 장인 어른이 자주 보는 얼굴들이다. 아들 며느리는 많아야 한달에 한번 꼴이나 될까 모르겠는데, 고마운 것은 우리 부부가 원하면 언제든 볼 수 있을 만큼 아이들이 착하다.

딸아이는 좀 다르다. 일년에 몇차례인지 내가 정확히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볼 수 있는데, 그 회수는 전적으로 딸 아이의 뜻에 달려 있다. 그런 딸아이에 대한 못마땅함으로 내가 궁시렁 거리기라도 할라치면 ‘천상 당신인데 뭔 소리냐’는 아내의 핀잔을 듣곤 한다.

가족 이외에 만나는 한국사람들이라야 일년에 한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회수로 나가는 한인교회나 이따금 들리곤 하는 한국 식품점에서 마주치는 얼굴들이 전부가 아닌가 싶다.

이런 저런 연으로 얽힌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한인 이웃들도 제법 있지만, 그들을 만나는 일엔 딱 내 딸아이를 닮아서 그야말로 내 맘대로이다.

그러다보니 한 달 정도는 가족 이외에 한국사람들을 전혀 만나지 않고 지내는 때가 흔하다.

예외적인 일이 있긴 하다. 지난 수년 동안 일주일에 한번씩 거의 빠지지 않고 얼굴을 마주하는 한국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필라세사모’라는 이름으로 모이는 이들인데, 세월호 참사 이후 만나기 시작한 모임이다. 그러나 이 모임은 온라인으로 만나는 것이어서 비록 얼굴을 마주한다 하지만 실제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다.

내 지극히 이기적인 성격 탓이겠는데, 나는 이 모임에서 만나는 이들의 개인사에 대해 참 무지하다. 엊저녁 일만 해도 그랬다. 좀 뒤늦게 이 모임에 함께 하긴 하였지만 벌써 셀 수 없을 만큼 마주했던 얼굴인데 어제서야 그가 하는 일에 대해 물었었다. 아마 다른 이들은 이미 알고 있었던 듯 하다.

그가 학교에 있다는 소리는 얼핏 들어 알곤 있었지만, 역사 그것도 한국사 그 중에 또 현대사 더더구나 해방 이후 한국 전쟁사에 대해 연구한다는 사실을 어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살며 이따금 가슴이 쿵쾅거리는 설렘을 만날 때가 있다. 나이 탓인지 이즈음엔 사람을 통해 그런 경험을 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책을 통해서는 종종 그 즐거움을 누린다. 그런 책들의 편저자들이 이젠 많은 경우 나보다 어린 이들이다. 나보다 윗대들의 생각에서 배우는 기쁨보다 후대들의 생각을 통해 깨치는 맛은 또 다르다.

그런데 이번엔 책이 아니라 사람이다. 그것도 매주 만날 수 있는 후배이다. 순간적으로 그를 졸랐다. 가르침을 달라고…

찬바람 기운이 돌면 그 모임에 참석하는 우리는 이제 그에게서 해방 이후 한국사에 대해 듣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이다.

이번 주말엔 아들 며느리 그리고 딸아이를 앞세우고 우리 부부는 계곡을 찾아 하이킹을 즐기려 한다.  그날 아이들과 함께 나눌 밥상을 위해 불고기 거리를 장만하여 돌아오는 길목에서 만난 저녁하늘은 아침이었다.

이 사는 맛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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