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가…

마른 체구의 내가 그나마 건강을 유지하는 으뜸 요인은 잠이다. 하늘 무너지는 걱정이 있어도 누우면 나는 금방 잠에 든다. 그리고 이튿날 정해진 시간이면 어김없이 눈을 뜬다. 내 특별한 노력없이 되는 일이므로 내가 누리는 복 중 하나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짧고 깊게 낮잠을 즐기는 일은 덤으로 얻은 복이다.

그런데 어제 밤엔 두 시에 잠에서 깨어 뒤척이며 멀뚱거리다 아침을 맞았다. 그 달고 단 월요일 낮잠도 건너 뛰었다.

한 밤중 두 시라는 시간을 확인하는 일은 매우 낯선 일이 였음으로 ‘이게 뭐야! ‘ 하는 생각이 앞섰는데 이내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노회찬’에 대한 비보였다.

그의 죽음이 내 잠을 앗아갈 만큼 내가 그를 아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나 본 적도 없거니와  평소 내가 그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어떤 아린 것이 내 잠을 자꾸 쫓아 내어 그대로 아침을 맞고 말았다. 그리고 월요일 그 단 낮잠 까지도 그의 죽음에 대한 생각에 달아났다.

나는 모든 삶에 뜻이 있다고 믿는다. 죽음 또한 마찬가지다.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생각은 그것이 이어진다는 믿음 때문이다. 하여 모든 삶과 죽음에는 깊은 뜻이 있다. 그 뜻은 죽은 자가 새기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자들이 새긴다. 그게 사람이 사람인 까닭이라고 믿는다.

나는 노회찬의 죽음 앞에서 부끄럽다. 매우 부끄럽다. 그와 동시대 같은 공간에서 삶을 나눈 적은 없지만 웬지 그냥 부끄럽다.

그저 그 부끄러운 생각에 딱 하루 내가 잠을 잃었는지 모르겠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그가 남겼다는 유서에 있는 글이란다.

부끄러움을 잃어가는 시대를 향해 그가 삶과 죽음으로 이어지는 그 순간, 그 처절한 순간을 던져 그가 꿈꾸었던 진보적 외침을 외친 것은 아닐까?

그의 죽음에 대해 두루 말 많은 이들의 말은 이어질 것이다. 그게 또 사람사는 세상의 한 모습일 터이니.

묘하다. 오래 전 투신으로 시대의 아픔을 안고 떠난 소설 속 주인공 이명준에게 생을 부여했던 최인훈의 부고를 함께 듣다니.

아마 나는 오늘 밤 깊은 잠을 즐길 것이다. 내 부끄러움은 늘상 값싼 것이었으므로. 다만 엇비슷한 내 또래 노회찬이라는 이름은 오래도록 아리게 남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