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장, 이젠 늙었군!” – 이즈음 툭하면 혼자 뱉어내는 말이다.
아직 칠십이 먼 나이에 깝친다는 소리 듣기 딱 십상이다만, 어찌하리, 나오는데야. 일테면 평시와 조금 다른 강도로 일을 마치고 온 날이면 만사가 귀찮아진다든가, 집을 나서거나 가게 문을 닫고서 한참을 운전하고 가다가는 ‘아이구, 문을 안잠궜나 본데…”하며 다시 돌아가는 경우에 나오는 소리인데 점점 그 빈도가 늘어간다.
까닭없이 옛 생각에 잠기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옛 경험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내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쯔쯧, 나도 이젠 정말 갔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엊저녁에 나는 또 한번 한 물 간 늙은 내 모습을 보았다. 이번 토요일에 이웃 마을 필라에서 광주항쟁 38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서였다. 나는 그 소리에 급격히 스물 후반 언저리 나이로 돌아갔던 것이다.
1980년 5월, 당시 나는 도피 중이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지금 세상 같으면 도피란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도대체 숨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도피 중이었다.
그해 봄 나는 복학을 했었다. 70년대 이른바 운동권으로 찍혀 제적되었던 많은 학생들이 박정희가 죽자 학교로 돌아갔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따져보자면 그것이 내가 80년 5월, 도피했던 까닭의 전부이다.
복학 후 3월 한달 잠잠했던 대학가는 4월로 접어들면서 전두환 신군부 타도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시위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라고 알려진 5월 15일까지 전 대학에서 이어졌다. 지금 곰곰이 다시 그 때를 생각해 보아도 내가 특별히 한 일이란 없다. 나는 투사도 아니였거니와 무슨 운동의 선봉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5월 15일 이후로 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에 띌까 두려워 하며 도피 생활을 했다. 아마 5월 20일이 지나서였을 게다. 당시 내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던 일본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요미우리 신문 기자였다. 그가 내 아버지를 찾아와 신신당부를 했더란다. 어떻하든 당신 아들과 연락을 해서 남쪽 광주로는 가지 말라고 일러 주라고 말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그렇게 내게 처음 다가왔었다.
6월 들어 나는 계엄사 합수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내가 체포되기 전 내 아버지는 치안본부에 잡혀가 아들의 행방을 닥달하는 놈들에게 치도곤을 당하셨다. 그 치도곤으로 평소 화랑 무공훈장을 자랑하시던 상이군인 내 아버지가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때 특별히 한 일이 없다. 그저 이십 대 후반 늦깍이 복학생이었을 뿐이다.
몇 년 후 나도 아버지를 쫓아 미국으로 왔고 이제 한 세대가 훌쩍 넘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툭하면 깜박하는 나이가 되었다.
광주항쟁 38주년 기념행사 포스터를 보며 떠올려 본 옛 생각이다.
‘그래, 머릿수 하나 채우자!’ 그 맘으로 토요일 행사장을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과 그림들.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이 6.25 때 국민방위군에 끌려 갔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로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그날을 되새기며 몸서리를 치곤 하셨다.
내 불알친구 병덕이 형인 병모형, 교사 자격증 받기 직전 연좌제에 걸려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되었다. 아이구 그 형님도 이제 칠십이 훌쩍 넘으셨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