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상(殘像)

참 힘들어 보이는 일들을 아주 쉽게 하는 이들이 있다. 게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저 하나 먹고 사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을 즐거운 얼굴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론 경이롭다. 내 주변에 그런 이들이 살고, 그들과 알고 지낸다는 일만으로도 이미 내가 누리는 복이다.

그 복을 누리는 나는 쉽게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내게 핑계거리는 차고 넘친다.

어제는 어머니 주일, 샌드위치 가운데 놓인 우리 부부는 이런 날이면 바쁘다. 자식 시늉한다는 아들 며느리 딸들의 인사 받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우리 부부가 자식 시늉은 해야겠기에 어머니 아버지 찾는 일, 장모 묘소 찾고, 눈 수술 하신 장인 찾아 보는 일 등 하루 해가 짧다.

와중에 짬을 내어 필라를 다녀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필라를 방문하여 함께하는 행사에 얼굴이나 비추자고 나섰던 길이다.

나는 그 행사를 준비한 이들을 제법 안다 말할 수 있다. 거의 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다. 어쩌면 내 처지가 그들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아직 아이들을 키우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시간의 여유로 따지자면 내가 더 풍족한 편일 수도 있다.

세월호 가족들을 맞이하는 일, 영화 <그날, 바다>를 함께 보기 위해 영화 파일을 구매하고, 영화관을 대여하는 일, 세월호 ‘세’자만 나와도 고개를 가로 젖는 이 곳 동포사회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 뒷풀이 행사로 장소와 음식을 준비하는 일 등등 그 만만치 않은 일들을 정말 쉽게 웃으며 하는 그들의 경이로운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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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므로 모두 제 주머니 털어 하는 일이고 보면 내가 그들을 향해 치는 박수란 참으로 공치사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 세월호 관련 행사 때면 먼 길 마다치 않고 기록을 남기는 일을 감당하는 이가 찍은 어제의 사진들을 본다.

사진들을 보며, 잔상으로 남아있던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어제의 미안함이 진하게 차오른다.

영화 <그날, 바다>가 끝난 후 영화 관람자들과 유가족들과의 대화의 시간이었다. 유가족들은 짧은 일정에 뉴욕에 이어 필라델피아, 워싱톤을 잇는 여정 중이었으므로 몹시 피로하였을 터였다. 나는 푹신한 관람석 의자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편하게 눕듯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 유가족들은 영화관 스크린 앞에 내내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 유가족들에게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행사를 준비한 이들에게 차마 한마디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들의 노고를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사진 한 장. 어쩌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 그들이 헤쳐 나가야 할 길들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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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푸는 일, 역사를 바꾸는 일들은 승전보를 울리는 팡파레와 함께 등장하는 영웅들로 부터가 아니라, 안락한 의자에 관람자로 앉은 대중 앞에 비록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을지언정 아픔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을 전하는 이들에게서 비롯된다는 역사적 진실 하나, 그리고 그 진실의 촛불 하나 함께 들고자 애쓰는 내 이웃들이 고마운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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