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월

이월 – 이 나이에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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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慾心) 에

달포 전 일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 났는데 몹시 어지러웠다. 멀쩡하게 잠 잘자고 일어나서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영 서있지 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이어지는 심한 구토 증세로 그만 소파에 눕고 말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 누워 있고 나서야 어지럼증은 가셨다.

아내가 family doctor에게 전화를 해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일주일 후에나 오라고 했다. 딱히 emergency로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닌 듯하여 정해진 시간에 의사를 찾기로 했었다.

느닷없이 처음 맞는 내 몸의 이상 증세에 나는 좀 당황했었다. 솔직히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편이다. 계절 따라 이따금 찾아오는 감기 몸살이나 어쩌다 한 번 씩(? 이제껏 평생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앓아 본 적 있는 복통 정도가 내 몸이 알고 있는 병의 전부였기에 그저 시간이 지나면 몸은 늘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무지한 믿음을 신봉하는 편이었다.

이웃간의 대화 속에서 흔히 듣는 병명이나 약명들에도 나는 거의 무지하다. 약명은 커녕 그 흔한 바이타민 종류에도 무지하다. 그나마 최근에 이르러 아내가 챙겨주는 바이타민을 이따금 먹기는 하지만 그게 무언지도 모르거니와 아내가 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온 어지럼증에 나는 좀 쫄고 있었다. 말이 family doctor이지 의사란 나와는 참 거리가 멀었다. 내가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찾아온 thyroid 증세와 나이 들어 함께 하는 혈압 문제로 아내가 자주 찾아야만 하는 아내의 의사였을 뿐이다.

몇 해전 봄에 뒷 뜰 잡목들을 정리하다가 poison ivy로 온몸에 번진 두드러기와 가려움 증상으로 의사를 찾았을 때, 의사는 몇 가지 기본적인 몸에 대한 검사를 받아 볼 것을 내게 권유했지만 나는 poison ivy를 치료하는 약을 받아오는 것으로 그 권유를 가볍게 무시했었다. 이제 나이도 있고하니 바이타민 c던가 d, 아니면 e던가를 권유하는 의사의 소리도 한 귀로 흘렸었다.

아무튼 일주일 후에 찾아간 의사는 이런 저런 검진 후에 내 몸에 느닷없이 찾아왔던 어지럼증은 단순 바이러스 감염 현상이라는 판단을 내리며 혈액검사를 비롯한 몇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했었다.

그 검사 중에는 colonoscopy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colonoscopy 곧 대장 내시경 검사가 뭔가하고 찾아보니 하루 전에 온 종일 굶고 뱃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빼내고서야 받는 검사란다.

마침 오래전에 계획했던 여행이 코 앞에 있었던 터라 검사는 좀 뒤로 미루자 하였다.

그리고 어제, 나는 그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아주 작은 양성 종양이 발견되어 제거했고 대체로 양호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제 그 검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대기실에 누워 혈압 체온 등 이런 저런 검사와 수액 주사를 놓던 피부색이 까만 간호사와 흰색 보조 간호사 모두 매우 수다스러웠다.

나에 대한 기본 정보들과 나와 가족 병력을 묻고 난 그녀들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녀들의 묻는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되 나는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대었다. 그녀들은 소리내어 웃더니 내 본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단다. 그제서야 나는 ‘한국’이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그녀들의 물음은 ‘동계 올림픽’과 ‘서울’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음을 이어가는 앞뒤 이야기로 보아 그 전날에 있었던 Super Bowls 중계 때 전파를 탄 평창 동계 올림픽 광고 영향이 컷던 듯 하였다.

한국뉴스를 보면 내가 이해 못할 것들이 참 많다만, 평창 올림픽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에겐 한국을 가까이 알리는 참 좋은 기회가 될 듯 하다. 아무렴 잘 치루어 졌으면 좋겠다.

수다스런 그녀들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는 의사가 나타가기 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병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누어 있기는 처음인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는 복되게 살았단다.

그 길었던 시간, 순간으로 찾아온 욕심이 하나 있었다.

언젠간 내게도 다가올 그 시간, 눕지않고 서서 더 큰 욕심으로는 걸으며 그 알 수 없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내 몸에 대한 내 무지함에 비해 나는 아직 괜찮다.

욕심(慾心) 에.

일상을 위하여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 어제, 오늘 내 가게 손님들이 나를 깨우친 생각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를 정말 반갑게 맞아 준 이들은 내 가게 손님들이었다. 바로 우리 부부의 일상이었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경험으로 지난 시간들을 꺼내어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의 일상을 함께 했다.

“내 마누라에게는 너희들 여행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마누라가 또 가자고 할지 모르니…”

“거긴 아주 형편 없는 곳이었지, 이태리가 정말 좋았어!”

“출장 길에 딱 하루 들렸었지. 언제간 나도 시간 내서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야.”

아련하게 옛 기억을 떠올린 이는 1970년대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이젠 할머니가 된 옛 소련 출신 피겨 선수였던 그녀의 기억이다. “모나리자 앞에 서 있었단다. 마침 나를 알아 본 관광객이 있었단다. 그 이가 내게 사인 요청을 했단다. 모나리자 앞에서 사인을 해 주었었지”

그랬다. 무릇 여행이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내게 파리는 역사 속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내일을 꿈꾸게 하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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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콘서트

“표 파는 게 정말 힘드네요.”, “열심히 다닌다고 다녔는데 표를 못 팔았어요.”,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사람에게 표 파는 일이 참 쉽지 않았어요.”

애초 시작할 때부터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나선 일이었다. 내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새 4년 세월이 흐른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일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대 사건’이라는 생각으로 동아리가 된 사람들 이야기다. 이름하여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약칭 ; 필라 세사모)>이다.

이들이 아직 봄을 기다리기엔 이른 2월 초에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함께 하자고 나선 까닭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죽은 자와 산 자가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하는 기억의 공간을 만들고, 아픔을 보듬어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참여와 실천 속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 모두가 존중 받는 국가, 서로가 협력하고 환대 받는 평화와 우정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행진으로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 ‘4·16재단 설립 추진 대회’ 제안문 중에서

나는 믿는다. <기억과 희망이 흐르는 밤>을 위한 티켓을 파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쉽지 않다’, ‘힘들다’는 소리로 하여 기억은 더욱 새로워 질 것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은 이루어 질 것임을.

비록 음악회 자리가 차지 않을지라도.

기억, 즉 역사는 과거의 잘못을 찾아내는 수단이며, 오늘 힘들고 어려운 아픔을 보듬어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를 이룩해 내는 도구임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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