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단상 이제(斷想 二題)

  1. 추억

두어 달 사이 벌써 세번 째 장례식장을 찾는다.  고인들은 노년기에 이르러 이민을 오신 일 세대들로 세 분 모두 90 가까운 일기를 마친 분들이다. 1920년대 후반에 태어나셨던 분들이니 곤고한 시대를 겪어 온 이들이다.

오늘 찾아가는 분은 살아 생전 또래 어르신들 사이에서 ‘장군’으로 불리었던 이다. 부리부리한 눈에 사내다운 풍모 뿐만 아니라 그가 살아온 이력 때문에 붙여진 애칭이다. 한국전 참전 용사였던 그는 영관급 장교로 예편한 이후 경찰에 투신하였다. 1960-70년대 늘 뉴스의 중심이 되곤 하던 서울 주요지역들의 경찰서장을 두루 거치고 은퇴 이후 우리 마을에서 여생을 보내다 떠나셨다.

늘 과묵하고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았던 그와 잠시 시간을 함께 하였던 때가 있었다.

어느새 스무 해 전 일이다. 당시 알고 지내던 은퇴 기자 양반이 있었다. 지금이야 쓰레기 소리를 듣는 신문이 되었지만 60, 70년대만 하여도 한국을 대변하는 신문 소리를 듣던 곳에서 기자 노릇을 했던 분이다.

어찌어찌 이야기 끝에 ‘장군’과 ‘은퇴 기자’ 두 양반이 그 당시 경찰서장과 출입기자 사이로 연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두 양반이 서로 만나고 싶다고 하여 내가 자리를 주선한 적이 있었다.

가벼운 술자리에서 두 어른은 옛 시절을 추억했다.

나는 두 어른에겐 추억이 된 옛 시절 이야기들이었지만, 그 시절을 아픔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익숙하였기에 두 어른과는 그리 가까이 지내지는 못했다.

장례식 가는 길, ‘장군’을 추억하며 역사를 돌아보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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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해외연대 국가와 도시들)

  1. 기억

역사 또는 지난 일들은 누군가에겐 추억이 되기도 하지만 다른 누군가에겐 아픔 서린 한이 되기도 한다. 뿐이랴! 또 다른 누군가에겐 새 세상을 여는 기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세월호 참사 소식에 귀 기울이기 시작한 때는 참사가 일어나고 한참이 지난 후였다. 물론 당시 실시간으로 전해오던 황망한 소식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지만 딱히 내가 해야 할 일은 전무하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나서야 이웃마을 필라델피아에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어찌 연이 닿아 모임에 이따금 얼굴 내밀어 내가 살아가는 까닭을 찾기도 한다.

다음은 지난 10월 말에 서울에서 열렸던 한 행사를 소개하는 어느 기사 내용이다.

“진실은 국경을 넘고 저항은 인간을 찾는다.” (수전 손택)

세계 34개 도시의 참가자로 이루어진 4.16해외연대 서울포럼이 닷새간의 일정을 마치고 지난달 30일 폐막됐다.

이번 행사는 세월호 참사 이후 온라인상에서 연대해 온 재외동포들이 상호 협력을 구체화, 공고화 하기 위하여 개최한 최초의 오프라인 모임이다. 이번 포럼에서는 4.16해외연대의 형성과 활동영역 확대 과정에 관한 브리핑(전희경, 애틀랜타 세사모)을 비롯, 재외동포사회 민주진영의 활동사(오복자, 독일 노르트라인베스트팔렌 세사모), 활동환경(김이제이, 뉴욕 뉴저지 세사모), 재외동포사회 풀뿌리 운동이 성찰할 의제(이은희, 프랑크푸르트 민주평화투명) 등의 발제가 있었다.

또한 활동주체 운영방식에 대한 사례 발표(박준영, 인도네시아 4.16자카르타촛불행동), 이미지로서의 세월(박정후, 세월호를 기억하는 몬트리올 사람들), 해외 활동 지역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할 수 있는 디지털 시스템(이호정, 필라델피아 세사모), 재외 선거 시스템 개선 방안(김수야, 4.16파리연대/이켈리, 세월호를 기억하는 토론토 사람들) 등 다양한 발제 및 발표를 통해 재외 국민과 재외 동포의 정치 참여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는 방안을 논의했다.

26일, 안산 분향소와 기억교실 방문으로 ‘416 해외연대 서울포럼 2017’의 첫 문을 연 4.16해외연대는, 포럼 일정 외에도 광장 전시회, 촛불집회 1주년 대회 등 세월호와 관련한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 등 알찬 일정을 소화했다.

필라델피아에서 두 분이 이 행사에 참여하였다. 지난 주간 우리는 행사에 참여하고 돌아 온 두 사람에게서 행사 이야기를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가슴에 깊게 새겨진 이야기 한마디다.

“포럼 현장과 광화문, 안산, 진도, 팽목 등지를 돌아보며 마주했던 유가족들의 치열함 앞에서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이란 너무 초라했어요. 안타까움과 미안함 뿐이었지요. 그런데 그런 제게 유가족 한 분이 이런 말을 했어요. ‘당신들이 기억해 주는 것 만으로도 우리에겐 큰 힘이 된다’고요”

나는 아주 작게는 체험을 통해, 대부분은 알량한 정보와 지식을 통해 멀게는 해방 이후에서 가깝게는 세월호 참사까지 누군가에게 한을 품고 살게 한 숱한 사건들을 기억한다. 단지 기억 뿐, 기억이 누군가의 한을 폴어 준 일은 없다.

세월호는 그 관점에서 확연히 다르다. 기억이 새 역사를 쓰고, 새 세상을 열고 있다. 일시적 한풀이 운동이 아니라 일상으로 녹아져 끊임없이 이어지는 운동이 되었다. 기억은 그 운동의 힘이다.

불편한 진실

델라웨어주 부지사를 지낸 S. B. Woo는 팔순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정한 현역입니다. Woo씨는 현실정치에서 은퇴한 이후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안 아메리칸들의 정치력 신장을 위한 단체 80-20 Initiative를 이끌어 오고 있습니다. 그가 이즈음 정열을 쏟고 있는 분야는 아시안 아메리칸 다음세대들이 교육 현장에서 차별 받지 않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그가 의장으로 있는 80-20 National Asian American Educational Foundation(80-20 전국 아시안 아메리칸 교육재단)은 아시안계 다음 세대들이 교육현장에서 받고있는 다양한 차별들에 대한 보고서들을 내고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글은 대학입학 과정에서 아시안 학생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차별에 관한 글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들이 이 땅에서 주인으로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 글을 이웃과 함께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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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에

추수감사주일에 한 해를 돌아본다. 어느새 노년의 초입에 선 내게 한 해는 참 짧다. 그저 모든 일들이 어제 같다.

오늘은 우리 부부가 적을 둔 교회가 아닌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장인 장모가 적을 둔 교회이다. 지난 해 장모께서 떠나신 후, 나는 그 교회 목사님께 약속을 드렸다. 일년에 네 번 쯤은 침례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겠노라고.

우리 내외는 침례교회 목사님 내외분을 비롯하여 교우들에게 큰 사랑의 빚을 지고 산다. 참으로 작은 신앙공동체이지만 공동체의 제 멋과 맛이 도두라져 내놓을만한 교회이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돌아가신 장모에게나 홀로이신 장인에게 딸, 사위보다 사뭇 가깝고 정겨운 교회 식구들이다. 감사 주일에 느끼는 감사의 크기가 남다른 까닭이다.

구순(九旬)을 코 앞에 둔 장인은 오늘 하모니카를 부셨다.

노인의 하모니카 소리에 함께 화답해 준 공동체 식구들에게 그저 감사할 뿐이다.

예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우리 부부는 늪이 있는 공원에서 머물고 있는 가을의 마지막 풍경들과 함께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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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다. 어찌 성장하는 젊음만이 감사이랴!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모두 감사인 것을.

사랑에

겨울을 재촉하는 바람이 매서운 소리를 낸다. 부는 바람에 나무가 내어줄 잎새가 더는 없다. 창밖 풍경에 빠져있다가 메신저 울림 소리를 듣는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함이 영원함이로다.- 시편 107편 한 구절이 담겨있는 추수감사절 카드를 보낸 이는 허춘중 목사님이다. 태국 치앙마이를 중심으로 인도차이나 선교 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목사님인데, 젊어 한 때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분이다. 얼굴 본지는 얼추 40여년 저쪽 일이다.

추수감사주일 아침, 허목사의 전자카드가 내 정신을 깨운다.

맑은 정신으로 바울 선생의 소리에 귀를 연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로마서 13 : 8, 개역개정)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읍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율법을 완성했읍니다.(공동번역)

Let love be your only debt! If you love others, you have done all that the Law demands.( The Contemporary English Version)

바울 선생은 매섭고 사나운 바람 뿐만 아니라 한점 미풍에도 내어줄 수 있는 잎새를 달고 살았던 나무였던 듯.

사랑의 빚을 세어보는 추수감사 주간을 보내야 할 터.

허목사에게 감사를.

거짓에

뜰에 낙엽이 수북하다. 세상의 변화가 어지러울 지경이라고들 하지만, 계절의 변화처럼 때론 순차적이다. 사람 사는 모습도 매양 한가지다.

모처럼 게으른 아침에 복잡한 세상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꺼내든 생각들은 노자와 예수이다.

인위人爲란 것이 곧 거짓이기도 하다는 사실입니다. 거짓이란 글자는 여러분도 잘 알고 있듯이 ‘위僞’입니다. ‘僞위는 인人+위爲입니다.’ 거짓의 근본적인 의미는 ‘인위’입니다. 인간의 개입입니다. 크게 보면 인간의 개입 그 자체가 거짓입니다. – <신영복의 ‘강의’에서>

관습의 수호자는 항상 인간의 행동을 일반화하려고 애쓴다. 이 때 사회를 하나로 묶는 데 사용하는 끈은 거짓됨이다. – 중략 – 그들은 내적인 덕을 배양하는 대신에 사회를 보다 더 인위적으로 규제하려고 애쓴다. – <마틴 아론슨(Martin Aronson)의 ’예수와 노자의 대담’에서>

예수께서는 먼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누룩을 조심하여라. 그들의 위선을 조심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다. “감추인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  < 성서 누가복음 12장에서>

겨울로 들어서는 일요일 아침에.

감과 ‘뵤’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년이 지났다.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들고 우리 부부를 찾아온다. 십여년 이어져 온 일이다.

나와 동갑내기인 Bill은 내 가게가 있는 델라웨어주 Newark 토박이이다. 이 곳에서 태어나 자란 그가 이 동네의 옛모습을 전해주는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는 무우밭과 배추밭을 지나 국민학교를 다니던 내 고향 신촌을 떠올리곤 한다.

무우밭과 배추밭이 있던 서울 신촌을 말하면 옛사람이듯, 옥수수밭과 한참을 가야 집 한채를 만나던 Newark을 이야기하는 Bill을 이해하려는 요즘 사람들이 몇이나 될지 모를 일이다.

Bill을 안지도 거의 30년이 다 되어 간다. 그보다 먼저 안 사람은 그의 부인 Mrs.민이었다. 지금이야 다문화가정이라고 부른다만 그때만 하여도 국제결혼이라고들 하였다.

Mrs.민은 거셌다. 그녀가 ‘뵤’를 내게 소개해 주었다. 미군에 복무하던 Bill이 한국에서 근무할 때 만나 결혼한 Mrs.민은 그의 남편 Bill을 늘 ‘뵤’라고 불렀다.

Mrs.민은 거셌지만 여렸다. 같은 한국인들이 가까이 하기엔 거셌지만, 분명 Bill에게는 여렸다. 딱히 내가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는데, Bill과 Mrs.민은 친구가 되었다. 세상 뜨기 전에 Mrs.민이 무당 내림 굿을 받았을 때도 나는 그의 집을 찾기도 하였다.

Mrs.민이 세상 뜬지도 벌써 십 수년이 흘렀다. 먼저 떠난 아내가 좋아하던 감나무의 감이 익을 때면 Bill은 한 바구니의 감을 따서 나를 찾아온다.

지난해에 얻은 외손녀 이름을 지으며 middle name에 Min을 넣었다며 좋아라 하던 ‘뵤’는 외손녀가 자라면서 어찌 제 마누라 ‘민’을 닮아가는지 놀랍단다.

늘 그렇듯 나는 한 바구니의 감을 가까운 ‘한인’ 이웃들과 나누어 먹을 것이다.

오페라 구경

오후 4시가 지났을 뿐인데 밖이 어느새 어둑어둑하다. 흐린 날씨 탓도 있겠지만 간밤에 daylight saving time이 끝난 연유일게다.

1104172311_Burst01엊저녁엔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다녀왔다. 두어 달 전 일이다. 가까이 지내는 벗인 하나 아빠가 한나 아빠인 내게 제안을 했었다. 오페라 구경을 가자고 말이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난 웃을 뻔 하였다. ‘내가 오페라 구경을…?’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는 이 나이 먹도록 오페라 공연 무대를 찾아가 구경해 본 적이 없다. 물론 영화나 TV 등을 통해 오페라 공연을 본 것도 경험이라치면 그 구경이 전혀 처음은 아니랄 수도 있겠다만, 하나 아빠의 제안은 웃음이 나올 만큼 내 격과 분수에 크게 지나친 것이었다.

제안과 함께 이어졌던 하나 아빠의 권유였다. “사는 게 뭐 있어? 이제 와이프랑 함께 이제껏 하지 못하고 산 일들 한번씩 해보고 사는거지!” 나는 그 소리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 제안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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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어제 우리들은 뉴욕 Metropolitan Opera House에서 오페라 ‘La bohème’ 구경을 하였다.

오페라 ‘La bohème’에 대한 이야기는 오페라 문외한인 내가 할 이야기는 아닌 듯하다. 다만 친구따라 강남 구경을 한 후 잔상으로 남은 몇가지 간밤의 기억들이다.

‘뉴욕의 밤’, ‘도시의 밤’은 이젠 시골영감이 되어버린 내게 잠시 옛 생각을 즐기는 선물을 선사하였다. 그래 우리 부부도 한 때는 ‘도시의 밤’, ‘서울의 밤’을 누렸던 청춘이었다.

오페라 하우스에 간다고 나름 교회용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특히 구두를 신고) 나선 길이었다. 극장안엔 그야말로 선남선녀들이 오페라 하우스 드레스 코드에 맞춰 입고들 오페라 연주보다 멋진 테를 뽐내었다. 그러나 예외는 늘 있는 법, 청바지에 캐쥬얼 차림으로 명랑한 젊음들도 보았다.

중간 휴식시간이 끝나갈 즈음이었다. 좌석열 중간쯤에 위치한 자리를 찾아가는 노인 한 분을 위해 이미 자리에 앉아있던 우리 부부를 비롯한 대여섯 사람들이 일어섰다. 그 때 걸음걸이가 힘들어 보이는 그 노인이 한 말이다. ‘그대로 좀 더 서서 기다리쇼. 저기 내 친구 하나가 더 와요.’ 그래 우리들은 아직 젊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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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장 규모보다 더 큰 놀람은 관객 개인들에게 제공하는 자막 시스템이었다. 오페라의 대사들을 영어, 불어, 독일어, 스페인어로 번역 제공하는 자막이었는데, 각 개인 좌석에서 옆자리 있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불편함을 주지않고 누릴 수 있는 편의 제공이었다. 내가 오페라 ‘La bohème’을 그나마 조금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는데, 내 스스로 시골영감임을 인증하는 것인 줄은 모를 일이로되 대단한 첨단 기술이었다.

무대의 정교함과 현실감 나아가 모처럼 들어보는 사람이 내는 소리의 완벽함 등은 내 눈과 귀의 수준에 비추어 그저 놀라움이었다.

그리고 또 다시 ‘도시의 밤’.

친구 잘 만나 강남 구경 멋지게 한 어제 일을 되새기는 사이 밖은 아주 이미 캄캄하다.

보헤미안(Bohemian)과 필리스틴(Philistine)들이 새롭게 만들어 가는 세상에 대한 꿈은 내일 또 다시 밝아오는 아침에 살아있는 자들이 할 일일 것이고, 친구 내외와 아내에게 감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