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가만 생각해 보니 그의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든 생각이다. 그랬다. 일년에 몇 차례씩 전화 안부를 묻곤 한 게 벌써 십 수년이 지났건만 그의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나보다 한 두 살 위인 그의 목소리는 늘 넉넉했고 여유로웠다.

내가 사는 곳과 그가 사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사이의 간격이란 따지고 보면 서울과 뉴욕 사이의 그것과 별반 다름없다. 다만 그와 내가 같은 업을 하고 있다는 까닭으로 연을 맺고 지내온 사이이다. 늘 넉넉하고 여유로운 그의 목소리는 타고 난 것이기도 하겠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 그의 비즈니스나 가정사 더하여 신앙생활에 이르기까지 그만한 여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일 터였다.

오늘 아침 수화기를 타고 전해오는 그의 목소리는 여느 때와 아무 다름없었다. “아이구, 김사장님 이즈음 어찌 지내십니까?”라는 인사에 이어 그가 내게 전한 말들이다.

산불이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바로 그가 사는 동네를 덮쳤단다. 그 불로 집이 완전히 다 타버렸단다. 며칠 동안 교회와 몇 시간 거리에 있는 따님 집 등에서 피난 생활을 하다가 오늘 가게인 세탁소로 나왔단다. 다행히 세탁소는 큰 피해는 없지만, 세탁소 손님들 대다수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피해를 입은 터라 가게를 지속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단다. “어허, 이 나이에 새로운 도전 앞에 서 있습니다.” 그는 예의 그 넉넉하고 여유로운 목소리로 ‘기도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나는 위로라고 할 만한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했다. 온종일 마음 한구석을 딱히 무어라 할 수 없는 묵직한 것에 억눌려 지냈다.

때론 캘리포니아나 서울이나 모두 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