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맞을 아침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번째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경쟁했던 1963년의 일이다. 아버지의 인쇄소가 놀이터였던 까닭에 또래들 보다 일찍 한자를 깨우친 나는 당시 동아일보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두번째로 맞붙었던 때에도 나는 여전히 미성년자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나섰던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에 나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빠졌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주도해 만든 박현채선생님께 일년 동안 경제학 강의를 들었던 때는 1979년이었고, 내 삶 속에 누린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튼 1971년에도 나는 여전히 투표권이 없는 십대였다.

내가 선거권을 가질 무렵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고, 다시 직선제로 바뀐 1987년에는 나는 이미 대한민국을 떠났으므로 당연히 대통령 선거를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첫번째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했던 것은 부시(George Walker Bush)와 고어(Albert Arnold “Al” Gore Jr)가 맞붙었던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이 때에 나는 ’80-20 Initiative’라는 아시안 정치 참여 단체에 속해 고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었고, 그 결과를 아파하며 통음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어버린 한국 대통령 선거가 다시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은 인터넷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당선은 마치 내가 투표한 것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서는 몇몇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믿기지 어려울 만큼 변한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만취했었다. 그들 중 몇은 당시 새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설마했던 이명박, 박근혜의 당선은 지난해 트럼프(Donald John Trump)의 당선만큼이나 내겐 참 낯선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코앞에 다가온 한국대통령 선거에 대한 뉴스들을 훑어보며 스치는 몇 가지 생각들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선택하든 “사회계약은 어느 한 사람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라는 로크(John Locke)의 말처럼, 선택한 그 시대 그 곳에 사는 공동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지금 트럼프를 보며 살 듯, 이명박, 박근혜의 권력을겪었던 사람들이 어떤 선택하든 그 공동체의 몫이다. 다만 한국인들의 선택에 크건 작건 내 생활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한국계 이민자이기에 비록 투표권은 없지만, 내 관심이 이어지는 것이다.

바라기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미국사회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야기한 ‘공동선의 정치’를 펼칠 만한 인물이 뽑혀지기를 기대해본다.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깨달음,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도덕적인 참여 정치 등의 고민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이쯤 살다보니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제 본성과 살아온 과정을 배제한 채 바뀌기란 좀처럼 힘든 일임을 알게되었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욱 그렇다. 정치꾼들이 조작한 상징에 빠져 자신들이 겪어내야만 하는 세월을 맡기지 않는 시민의식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참 좋아한 연기인 김영애선생과 황금찬시인의 부고 소식도 크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동네 70넘은 올드 타이머가 종종 모주꾼이었던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한다. 바로 황금찬 시인이다.

또 다시 아침을 그리며


아 침

  • 황금찬(黃錦燦)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에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