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0

제 4강: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1.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지난 3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의 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문학을 하는 이유와 목표 설정 (2)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 (3)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인문학 각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1) 먼저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왔으며 동시에 이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왔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성적 동물이라고 확신 하십니까?

(2) 두번째 질문 입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곧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둘을 비교해 볼 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됩니까?

(3)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 문제, 혹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판단(생각)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예컨데 지난 주일 당신네 교회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트럼프가 주장하는 America First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나도 문신을 하겠다’,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몇 년 정도 살아보고 나서 결혼 할지 안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 흑인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당신 자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난 후에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까? 소위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갑작스런 일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낯섦’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에만 생각을 하시는 편 입니까?)

‘생각’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은 제 각기 달리 이해해 왔습니다. 서양은 긍정적, 적극적이고 동양은 소극적, 부정적입니다. 서양은 인문학적이고 기능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라’ – ‘생각하지 말라’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입장을 정리해 봅시다.

  • 생각하라 – 서양 인문학의 기본 틀 – ‘생각하기’

파스칼(Pascal)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 마다 생각하고, 생각을 통하여 판단하고, 판단을 통하여 결정하고, 결정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는 존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861, 프랑스 철학자)의 말도 비슷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동안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존재가 멈추어지면 생각도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존재도 멈춘다’

서양의 인문학은 생각 Thinking, 사색 Speculation, 사유 Meditation를 인간 만이 지닌 독특한 기능이요,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특징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하게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 Reason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긴 것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로써 간주 되거나 동물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 생각하지말라 – 동양사상의 최종적 목표 – ‘생각하지 않기’

채근담에는 ‘무년무상無念無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이 많으면 번민이 많고 염려가 많으면 고통도 많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지혜문학에도 이런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종교인들이나 성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슷합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無想을 무상無相’과 동일시 했습니다. 무상無相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상我相, 곧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뿌리인 고집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상人相,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다름과 차이를 구별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상衆相, 곧 인간성 속에 있는 자연스런 본능, 식욕, 성욕을 포함한 일체의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수상壽相, 즉 살고 싶어하는 생존의 요구를 포함하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 입니다. 자기도 생각지 말고 남도 의식하지 말고 욕망에 매이지 말고 오래 살고자하는 마음 까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무념무상無想無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생각이라는 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앞선 고대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유욕과 연결되는 범죄 행위와 속결된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렸다는 사실 까지 잊어버려야 그게 진정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무심無心이라 했습니다. 무심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 곧 집착執着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고의 이상적 단계라고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