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람일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6

제 5강 – 3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다음은 오늘의 주교재인 ‘사람, 장소, 환대’를 중심으로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사람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김현경에 의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아니한 순수한 몸은 사람이 아닙니다. ‘몸’이 사람으로 인식 되려면 의복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적 기호들을 입어야만 합니다. 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소품과 도구로 몸을 변형하여 전시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사람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나체를 금지하는 것은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태어난 후 일정한 ‘사회적 성원권’ (Social Membership)을 얻음으로 드디어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이고 ‘인정’이고 ‘승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성원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그는 ‘사회적 환대’(Social Hospitality)로 보았습니다. 사회적 환대를 받지못한 인간은 아직 사람으로써 인정이 안되었다고 봅니다.

(3) 김현경은 전통적으로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는 쳐주지 않았던 group, 즉 사회적 환대를 받지 못해온 집단을 5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아, 둘째는 노예, 셋째는 여성, 넷째는 군인, 다섯째는 사형수 입니다.

(4) 애기는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은 아닙니다. 태아가 ‘사람’이 되는 데는 그의 부모와 가정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법적, 행정적 절차를 통하여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야 ‘사람’이 됩니다. ‘유산’이 된 애기나 강간에 의해서 태어난 애기를 낙태 시키고 일정한 애도의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 입니다.

태어난 애기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사회가 그를 인정하고 환대함으로 ‘사람’이 됩니다. 신생아는 태어나서 사회적 환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옵니다. 식구들과 친구들의 방문과 축하, 감사의 기도, 세례식, 백일잔치 같은 공동체의 의식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이전에 죽으면 태아는 사산을 한 것 과 같이 여겼습니다. 아기에게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여전히 배내옷을 입히는 동안은 아기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문지방 단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국가가 개입합니다. 출생 자체를 통과의례로 보고 사람으로 승인하고 사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5) 전통 사회에서는 노예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일체 아무런 통과의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노예에게는 얼굴(체면 Face), 명예(Honor), 이름(Family Name은 물론이고 개인의 이름도), 권리,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기 때문 입니다. 물론 사고 팔 수 있었고 같은 노예 사이에서 애기를 낳아도 그 애기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잘못해도 피고가 되지 않았고 주인이 모든 민사상 책임을 집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잘못했다고해서 개를 재판에 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Harvard Uni. Press, 1982)

(6)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는 여자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인을 집단 사회에서 제명 처분했다는 뜻 입니다. 여자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다시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없었고 일체의 종교의식(제사)에 참석 할 수 없었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친정이나 시집, 그 어는 쪽으로 부터도 가정의  성원권(Family Membership)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름도 족보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시집살이는 종 살이’였고 여자는 애 낳는 기계로 여겼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도 여자는 남자가 마음대로 처치 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였고(아브라함과 사라 등) 로마 시대 이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건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7) 과거는 두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전에서도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범죄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써의 군인이 한 행동이 아니라 ‘국가라는 기관’이 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전투 중의 살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법적인 추궁을 당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괴하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자발적 휴전은 그 후 어떻게 처리 되었나요?)

뒷골목의 깡패들에게는 싸워도 명예나 규칙이나 위신이 있습니다만 군인에게는 인격, 명예, 위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초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대표자의 맞대결도 없이 무조건 대포를 쏘고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보았습니다.)

(8) 죤 로크 이후 사형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폐기처분 한다고 여겼습니다.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먼저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사람의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점을 확인 시키고 난 후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쓸모없고 유해한 물건이 되어버린 물건을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가가 살인을 하면 안되지!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물건을 폐기처분 할 뿐이다’ –이것이 사형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처형할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9)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성원권을 갖고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을 때 마침내 ‘사람’이 됩니다. 그 이 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음으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라고 보는 겁니다.

(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고 노력하고 투쟁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먼저 자신이 사람으로 받아드려진 집단 속에 다른 인간을 받아드려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은 인간을 배제 시키고 거부하고 자기와 다른 존재를 구별하고 빗금을 긋고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먼저 어떤 club의 member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member로 가입하려고 하면 여러가지 규정과 제도를 만들어서 제한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Orlando Patterson은 이런 인간의 심리와 역사를 ‘타이모크라시’(Timocracy)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를 말 합니다. 여기에는 남보다 우월해 지려는 욕망, 권위를 앞세우고 그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군인다움을 높이고 군인정신을 높이 사는 태도, 물질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포함 됩니다.

패터슨에 의하면 행복이란 성원권이고 존재란 곧 소속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란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즉 사람으로써의 성원권을 갖고 사람들 속에 끼기 위해서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나도 끼워주십시오. 나도 당신들과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 집단의 member로 받아주십시오. 나도 제발 사람으로 쳐 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성원권 투쟁이 바로 인권운동이요,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11)  한편 법률적으로 ‘사회적 성원권’(Social Membership)을 갖고 그 사회로부터 외형적 환대를 받는다고 해서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회 속에 소속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컨데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호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당당하게 일도하고 세금도 내고 이 나라의 법규도 지킵니다. 공공의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대를 받습니다. 식당에 갔을 때는 영주권이 있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국적은 어디냐 하는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우리의 주장과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고 어디에서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사람으로써의 기본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성 속에는 진정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극복해 낼 수 없는 편견과 편당심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입니다.

트럼프나 폴린 핸슨은 도처에 있고 은근히 그들을 편들어주고 지지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흑인들이나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히스패니아 계통의 이민자들의 경우,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불가촉 천민’의 문제를 지닌 인도의 인종 차별이나 일본이 계속하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나 홈랜드를 잃어버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원주민 문제나 세계도처에서 진행되는 여성의 차별 문제등은 실로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이 된다’ 거나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여실히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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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으로 태어났고 또 인간의 몸과 얼굴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세계적으로든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든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와 내가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토론해 봅시다.

(2) 나(우리)는 호주라고하는 다문화 사회(이민자의 땅)에서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한 경험있는지? 어떤 경우, 왜 그랬는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로써 이를 개선해 나갈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아니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5

제 5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사람’이라는 개념의 의미 – 사람을 부르는 말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로도 Saram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사람’은 ‘삶’과 ‘앎’의 합성어라는 것이 지금 까지의 지배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의 의미를 ‘아는’ 혹은 ‘알아가는’ 존재라고 봅니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자신의 목표와 죽음을 알고 자신은 그런 과정을 통과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데 그의 사람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흔하게 쓰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人間’(닝겐)이란 개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일찍부터 그들의 집단의식, 혹은 집단적 이해가 깔려있다고 보겠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인들은 사람을 ‘인류人類’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이는 대륙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하나나 둘 혹은 몇몇 사이의 관계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땅위에 존재하는 온갖 유인원類人猿 모두를 사람의 범주에 포함시킵니다.

한국어 – 사람  / 라틴어 – Homo  / 영어 – Human, Human race 혹은 Mankind  / 독일어 – Mensch  / 중국어 – 人類  / 일본어 – 人間  / 히브리어 – Adam / 그리스어 – androphos  / 학명은 라틴어로 표기합니다. – homo sapiens

♦ 라틴어 homo를 머리로 하는 여러가지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homo sapiens – 생각하는 인간 , 혹은 지혜로운 인간 / homo habilis – 도구를 쓰는 인간 / 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 homo sexual – 동성애자 / homo ludens – 놀이의 인간 / homo movens – 이동하는 인간 / homo demens –광기의 인간 / homo academicus –학문하는 인간 / homo aestheticus – 심미적 인간 / homo artex – 예술적 인간 / homo biblos – 기록하는 인간 / homo consumes – 소비하는 인간 / 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 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 homo duplex – 이중적 인간 / homo ecologicus –생태적 인간 / homo viator –떠도는 인간 / 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 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 homo symbious – 더불어 사는 인간  / homo solus – 외로운 인간 / 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 homo sexcus  – 섹스하는 인간, 몸으로 교감하는 인간 / homo sacer – 성스런 인간, 혹은 벌거벗은 인간 / homo religious –종교적 인간 / 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 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 homo nomad – 유목민, 떠돌아 다니는 인간 / 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 homo hundred – 백세까지 사는 인간 등등이 있습니다.

♦ 과거에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 사이를 구별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례들도 퍽 많습니다.

(1) 사람만이 사회적 동물이다. – 아니다. 개미나 꿀벌들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질서와 상하계층과 역할분담을 통하여 그들 사회를 조직화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들도 경우에 따라 집단 속에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2) 사람만이 문화를 형성하고 정치적 행동을 한다. – 아니다. 돌고래나 침팬지나 까마귀들이나 다른 포유류들도 그들 세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다른 집단들과 전쟁을 한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리더를 형성하여 다수의 개체를 다스리며 통치하는 국가나 정부체제를 가지고있다. 오히려 이들은 인간들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다.

(3) 사람만이 약육강식의 이론에 사로잡혀있다. – 아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동물계에도 존재한다. 특정 국가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들을 억누루고 지배하듯이 동물들도 개체 사이나 혹은 다른 개체에 대해서 똑같이 침략하고 정복하며 지배하고 억압하는 형태와 체제를 가지고 있다.

(4) 자유, 평화, 사랑, 신뢰 같은 가치는 사람만이 추구하는 것이다. –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포위, 체포, 죽음 앞에서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본능과 의도적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하여 집단 사이의 단결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 안에는 자손을 번식 시키고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도 포함된다. 우리는 이들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 세계보다 훨씬 더 규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들을 보여 줌으로 ‘짐승 보다도 못한 인간과 인간 세계’를 목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동물들에게는 종교가 없다. – 아니다. 심리학자 스키너의 연구에 의하면 비둘기를 포함한 몇몇 동물들도 인간들과 유사한 종교적 제의행위를 한다.

(6) 자살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니다.  돌고래도 자살하는 것이 종종 보고된다. 자식을 잃은 곰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벽에다 머리를 찧어 자살을 한 사건도 보고 되었다.

기억에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점을 제외하고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로 만든 건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전범으로 교수형을 받고 처형된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런 아이히만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죄를 묻고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를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순전한 무사유’에 빠진 이들이 아닌, ‘악의적 사유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만이라도 ‘사유’ 곧 생각하며 사는 일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할 일이다.

잊지않고 기억하는 일이 소중한 까닭이다.

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 필라델피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뜻을 새겨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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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만나기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4 

제 5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이제 인문학의 핵심 주제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topic을 가지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문제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양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 마지막 세번째에는 종합적으로 ‘인간의 품격’( The Road to Character, David Brooks)을 읽으면서 ‘균형잡힌 인간형’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추가로 추천해 드리는 책은 김현경지음, ‘사람 장소 환대’ 입니다.(문학과 지성, 2015년) 먼저 서론적인 이야기를 드린 후, 주로 이 책을 중심으로 현대 서구 인문학이 관심하는 ‘사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 서양의 정신사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전통과 사고를 대변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적 전통과 사고를 반영하는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종교적, 심미적, 신앙적이고 헬레니즘은 이론적,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을 제각기 앞세우려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상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생명은 창조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 합니다.

유대교와 그 뒤를 이어받은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물론이고 히브리적 세계관에 기초한 고대인들 역시 대부분 모든 생명은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 하면서 먼지나 흙 같은 데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작은 미생물들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창조설이 아니라 ‘자연 발생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이론화하였고 그 후 뷔퐁(Buffon 1707-1788 확율과 통계 이론)과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829 용불용설)를 거쳐 다윈(C. Darwin 1809-1882 진화론)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연 발생설은 진화론으로 발전, 확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의 우열을 비교 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적 입장에서 헬레니즘의 주장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 다음 10개의 예문을 읽으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치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 그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는 안동 ‘사람’입니다. 그는 충청도 ‘사람’입니다.

– 일을 시키려고해도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 돈 좀 있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 야 이 ‘사람’아 우리가 어디 남이가?

– ‘사람’ 팔자 시간 문제다

–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같아야 사람이지

– ‘사람’과 산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고 좋게 보입니다.

–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나?

♦ 이제 인류의 진화 모델 중 몇가지만 살펴보시겠습니다.

(1) 지금의 인간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유인원(類人猿)의 출현은 기원 전 약 500-700만년전 아프리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봅니다.

(2) 그 다음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출현인데 지금부터 약 300-400만년 전 이라고 봅니다.

(3) 이어서 발견된 화석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lis,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하는데 이는 약 100-200만년 전입니다.

(4) 이를 전후하여 출현한 것이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인데, 두 발로 서서 걷는 인간, 즉 직립원인(直立猿人)입니다. 이때는 약 100만년 전입니다.

(5) 현재의 인간과 가장 유사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명명된 화석은 인간의 출현을 약 20만년 전이라고 추측 합니다. 화석 연구에서는 이들을 ‘네안데르탈인’ 이라고 부릅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돌이나 나무를 가지고 사냥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6) ‘크로마농인’이라고 이름하는 ‘신인간’의 출현은 지금 부터 약 3-4만 년 전이라고 봅니다. 이들이 현재의 인간과 비슷한 두개골과 골격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 사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포유류과에 소속된 영장류입니다. 포유류(哺乳類)란 Mammalia에 속하는 동물로써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말합니다. 암컷에게는 젖이 나오는 유선이 있고 대부분 몸에는 털이나 가시나 비늘이 있습니다. 영장류(靈長類, Primates)란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주로 인간을 가르킵니다.

영장류의 특징은 가슴에는 보통 한쌍의 유방이 있고 사지는 물건을 잡기에 알맞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5개씩 있으며 손톱과 발톱이 있습니다. 눈은 앞을 바라보고 후각은 발달되지 않았고 뇌와 이빨이 발달되어있으며 종류에 따라서는 꼬리가 있고, 비교적 많지 않은 새끼를 낳고, 새끼를 키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동물입니다.

(2) 두 발로 일어서서 움직이며 일하는 직립원인(直立猿人) 혹은 척추동물(脊椎動物)입니다. 따라서 손이 발달되었고 손으로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3)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할 줄 아는 공작인(工作人)입니다.

(4)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동물 입니다.

(5)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는 ‘생각하는 존재’요 ‘이성적 동물’입니다.-

(6)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거나 집단을 형성하여 삶을 유지하는 공동체적 존재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3

제 4강- 4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나가는 말 –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의 말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부탁입니다. 꼭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 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생각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L. Adorno 1903 -1969 독일의 사화학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위르게 하버마스와 함께 비판이론을 주도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 중 하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사회’를 미국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꼭 미국 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형태의 사회 구조를 지닌 나라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나라들은 거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주어졌거나 정치가 조작해낸 대중문화를 따라기도록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스포츠와 영화, 각종 게임과 향락을 따라 갑니다.

‘생각은 당신들이나 하시오. 우리는 그냥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소’가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행태입니다.

트럼프는 선거유세 때 내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런 ‘사유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대중의 무지’가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 서적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김기춘이나 조윤선만 잘못된 사람들인가? 물론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과 함께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일한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들은 ‘영혼 없는 기계들 입니까?

총회장이니 담임목사들, 혹은 총무원장이나 주지 스님만이 오늘의 종교계를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인가? 다른 평신도들과 불자들, 장로들과 보살들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말없이 순종만 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절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기성 세대의 정치인, 교수, 언론인, 목사, 신부, 스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죽습니다. 그들이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떠들고 소리 지르고 반항하고 소란을 피워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세월호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 만이 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 무엇이 우리를 의심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까요? 그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해 내고 끝까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맞을 아침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번째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경쟁했던 1963년의 일이다. 아버지의 인쇄소가 놀이터였던 까닭에 또래들 보다 일찍 한자를 깨우친 나는 당시 동아일보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두번째로 맞붙었던 때에도 나는 여전히 미성년자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나섰던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에 나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빠졌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주도해 만든 박현채선생님께 일년 동안 경제학 강의를 들었던 때는 1979년이었고, 내 삶 속에 누린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튼 1971년에도 나는 여전히 투표권이 없는 십대였다.

내가 선거권을 가질 무렵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고, 다시 직선제로 바뀐 1987년에는 나는 이미 대한민국을 떠났으므로 당연히 대통령 선거를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첫번째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했던 것은 부시(George Walker Bush)와 고어(Albert Arnold “Al” Gore Jr)가 맞붙었던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이 때에 나는 ’80-20 Initiative’라는 아시안 정치 참여 단체에 속해 고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었고, 그 결과를 아파하며 통음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어버린 한국 대통령 선거가 다시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은 인터넷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당선은 마치 내가 투표한 것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서는 몇몇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믿기지 어려울 만큼 변한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만취했었다. 그들 중 몇은 당시 새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설마했던 이명박, 박근혜의 당선은 지난해 트럼프(Donald John Trump)의 당선만큼이나 내겐 참 낯선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코앞에 다가온 한국대통령 선거에 대한 뉴스들을 훑어보며 스치는 몇 가지 생각들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선택하든 “사회계약은 어느 한 사람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라는 로크(John Locke)의 말처럼, 선택한 그 시대 그 곳에 사는 공동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지금 트럼프를 보며 살 듯, 이명박, 박근혜의 권력을겪었던 사람들이 어떤 선택하든 그 공동체의 몫이다. 다만 한국인들의 선택에 크건 작건 내 생활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한국계 이민자이기에 비록 투표권은 없지만, 내 관심이 이어지는 것이다.

바라기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미국사회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야기한 ‘공동선의 정치’를 펼칠 만한 인물이 뽑혀지기를 기대해본다.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깨달음,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도덕적인 참여 정치 등의 고민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이쯤 살다보니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제 본성과 살아온 과정을 배제한 채 바뀌기란 좀처럼 힘든 일임을 알게되었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욱 그렇다. 정치꾼들이 조작한 상징에 빠져 자신들이 겪어내야만 하는 세월을 맡기지 않는 시민의식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참 좋아한 연기인 김영애선생과 황금찬시인의 부고 소식도 크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동네 70넘은 올드 타이머가 종종 모주꾼이었던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한다. 바로 황금찬 시인이다.

또 다시 아침을 그리며


아 침

  • 황금찬(黃錦燦)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에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2

제 4강- 3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생각의 탄생’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그의 부인 미셀 루트번스타인이 함께 쓴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2001)’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로 촛점이 바뀌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창조적 생각하기’이며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입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이 책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르셀 뒤샹,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하기’를 살펴봅니다. 그들은 도대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은 어떻게 배웠는지를 기술합니다.

동시에 저자는 이들 역사상 소위 뛰어난 인물들만이 ‘창조적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기만 하면’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untitled예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을 생각해 봅시다. – 실제로 그 그림은 파이프입니까, 아니면 파이프의 개념이라고 보십니까?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실재’(Reality)와 ‘이름-개념’(Name, Concept)을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루트번스타인은 ‘생각과 대상’ ‘사고와 도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 단계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탄생된다’고 봅니다. 모든 ‘생각하기’는 반듯이 어떤 대상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주체자의 관찰로 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창조적 생각’의 단계입니다.

(1) 관철하기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모든 감각적 접근과 경험하기가 첫 단계입니다.

(2) 형상화하기 – 관찰에서 얻은 것들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형상화는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예컨데 장미 꽃을 관찰한 후, 그 아름다움을 시각적인 그림이나 글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향기를 따서 향수를 만들어 후각적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습니다.

(3) 추상화의 단계입니다. 관찰한 대상에서 일체의 껍데기들은 다 벗겨버리고 최종적인 본질만 보는 단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본질만 그렸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형상은 다 걷어버리고 사물의 핵심만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간단히 제목만 열거하겠습니다.

(4) 패턴 알기 단계 (5) 패턴 만들기의 단계 (6) 유추 단계 (7) 몸으로 생각하는 단계 (8) 감정 불어넣기 단계 (9) 차원을 바꾸어 보는 단계 (10) 모형을 만들어 보는 단계 (11) 놀이와 즐기는 단계 (12) 변형의 단계 (13) 통합의 단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유대인으로서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1963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내용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 섰던 아이히만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1961년부터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에 직접 참관한 재판 기록 입니다.

원래 이 책의 처음 제목은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었습니다. Banality라는 단어의 뜻은 ‘너무나 흔하고 흔하여 아주 쉽게 예측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고 번역해 왔습니다. 악의 일상성, 악의 진부함, 악의 흔함이라고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본 아이히만은 그렇게 수 많은 사람을 죽일 만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요, 그 개인적 성품을 놓고 보면 참으로 착하고 선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 합니다.

아이히만은 주장합니다. ‘나는 운이 없어서 나쁜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을 뿐이지 사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두가지를 지적 합니다. 첫째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입니다. 사실 ‘악’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요, 평범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찰입니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별 ‘생각없이’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된다’는 점을 지적 합니다. 악이란 특별한 사람이 특별히 악한 생각이나 악한 의도를 갖는 데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지 그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히만은 독일 국민들에 의해서 정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공무원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책무에 성실하게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무원 수칙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히만은 말합니다. ‘그 일은 사실 내가 아니라 누가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만 했을 일 입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했고 반항을 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그 어떠한 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악과 불의는 착하고 선한 사람도 넉넉히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합니다.

두번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을 행한다’는 지적 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은 개인적 악일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적시 합니다.

아이히만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집니다. 1962년 5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자신의 악과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는 성실했고 진실했지만 ‘생각하는 것’은 거부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투철한 준법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유죄인 이유는 오직 생각하지 않은 것이요, 생각하지 않고 복종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 그것이 미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악이고 죄입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입니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습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첫째,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고 일 한 것이며 둘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것이며 셋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모든 전쟁과 오늘날도 계속되는 공무원들의 ‘영혼 없는 공직 수행’과 개별적 항거를 무시하고 자행되는 집단적 행동들은 인간에게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자 이제부터는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임하시겠습니까?’

생각의 시작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1

제 4강- 2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1)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2) 지난 날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일 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기억해보는 것

(3) 어떤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거나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

(4) 어떤 일이 앞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

(5)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느낌이나 의견을 가지는 것

(6)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머리를 써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7) 어떤 일에 대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것

(참고 : 생각과 마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생각이나 마음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똑같이 인간의 느낌과 의지를 표현하는 본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말이나 글, 그림이나 춤 같은 동작으로 그 느낌이나 주장, 의지나 결심을 일정 부분 표현 할 수 있는데 마음은 언어나 문장, 예술이나 동작으로는 그의 의견이나 결단을 충분히 표현 하기가 어렵습니다.)

 ♦ 서양에서는 인간들이 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을까요?

(1) 언제부터였나요? –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기에 일군의 사람들은 날마다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전 까지는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지?’ ‘이상한데?’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어!’ 이것이 바로 자연 현상에 대해 ‘신화적 응답’만 해 왔던 사람들이 ‘합리적 대답’을 시도한 인류 최초의 변화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미신에서 이성으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첫 발자국은 이렇게 출발이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어디에 살던 사람들이였나요? – 지중해를 생각해 봅시다. 동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북 아프리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멀리 스페인을 지나 대서양으로 이어집니다. 북쪽에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그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부터 동편에 있는 에게 바다를 건너 드넓은 소아시아와 특히 이오니아 땅이 펼쳐저 있고 그 북쪽으로는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 지금의 터키 땅 서쪽에는 밀레토스(Miletus)라고 하는 도시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밀레토스를 중심하여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이오니아 학파’ 혹은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3) 그런데 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렇듯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 만 했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부터 이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날씨와 거기에 따른 풍족한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심는대로 열매를 맺었고 밀을 비롯한 각종 곡식들과 과일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했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앞마당 같은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곳으로 각종 해상 무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기원전 6 세기 이후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부와 여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 까요? (1)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지게 되거나 (2) 각종 예술 – 음악과 미술, 문학 – 시와 연극을 비롯하여 스포츠가 발전 되거나 (3) 여러 가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서 학문이 발전하게 됩니다.

(4)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 그런데 그들이 이렇듯 자연의 변화 앞에서 무엇인가 의혹을 갖고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경이로워하는 마음wonder’ 혹은 ‘호기심curiosity’ 입니다. 사람은 자연이든 사물이든 인간이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지 놀라워하고 경이로워하고 호기심의 발동되어야만 생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관심 concern’ 혹은 ‘흥미interesting’ 라고 합니다.

둘째는 ‘의심doubt’ 하고 ‘질문question’ 하는 단계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물어 볼 것이 없고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같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라도 물어보는 사람이 말 되는 것을 가지고서도 물어보지 않는 사람 보다는 훨씬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나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접근 합니다. 종교는 말없이 믿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인문학은 끝까지 의심함으로 진리에 가까이 간다고 말합니다. 목표가 동일하다면 싸우지 말고 서로 ‘당신은 그 길로 가고 나는 이 길로 갈 테니까 우리 훗날 진리의 바다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5)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Thales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Arche’ 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이 주어지면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0

제 4강: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1.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지난 3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의 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문학을 하는 이유와 목표 설정 (2)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 (3)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인문학 각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1) 먼저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왔으며 동시에 이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왔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성적 동물이라고 확신 하십니까?

(2) 두번째 질문 입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곧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둘을 비교해 볼 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됩니까?

(3)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 문제, 혹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판단(생각)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예컨데 지난 주일 당신네 교회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트럼프가 주장하는 America First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나도 문신을 하겠다’,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몇 년 정도 살아보고 나서 결혼 할지 안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 흑인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당신 자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난 후에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까? 소위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갑작스런 일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낯섦’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에만 생각을 하시는 편 입니까?)

‘생각’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은 제 각기 달리 이해해 왔습니다. 서양은 긍정적, 적극적이고 동양은 소극적, 부정적입니다. 서양은 인문학적이고 기능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라’ – ‘생각하지 말라’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입장을 정리해 봅시다.

  • 생각하라 – 서양 인문학의 기본 틀 – ‘생각하기’

파스칼(Pascal)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 마다 생각하고, 생각을 통하여 판단하고, 판단을 통하여 결정하고, 결정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는 존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861, 프랑스 철학자)의 말도 비슷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동안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존재가 멈추어지면 생각도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존재도 멈춘다’

서양의 인문학은 생각 Thinking, 사색 Speculation, 사유 Meditation를 인간 만이 지닌 독특한 기능이요,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특징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하게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 Reason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긴 것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로써 간주 되거나 동물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 생각하지말라 – 동양사상의 최종적 목표 – ‘생각하지 않기’

채근담에는 ‘무년무상無念無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이 많으면 번민이 많고 염려가 많으면 고통도 많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지혜문학에도 이런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종교인들이나 성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슷합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無想을 무상無相’과 동일시 했습니다. 무상無相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상我相, 곧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뿌리인 고집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상人相,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다름과 차이를 구별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상衆相, 곧 인간성 속에 있는 자연스런 본능, 식욕, 성욕을 포함한 일체의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수상壽相, 즉 살고 싶어하는 생존의 요구를 포함하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 입니다. 자기도 생각지 말고 남도 의식하지 말고 욕망에 매이지 말고 오래 살고자하는 마음 까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무념무상無想無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생각이라는 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앞선 고대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유욕과 연결되는 범죄 행위와 속결된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렸다는 사실 까지 잊어버려야 그게 진정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무심無心이라 했습니다. 무심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 곧 집착執着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고의 이상적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지독하게 속이면…

오늘 아침에 눈을 떠 서성이다가 책장 속 평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곳에 꽂혀있는 책 하나 눈에 뜨였다. 오래 전 도서출판 청사(靑史)에서 펴낸 ‘칠십년대 한국일지’라는 책이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 동안 남한(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실록을 엮듯 날자 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때로부터 대학생활, 군생활, 실업자생활, 사회생활, 다소 엉뚱했던 신학생생활을 이어갔던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남한(대한민국) 실록이다.

후루룩 넘기는 책갈피에 숨겨진 세월의 거짓들을 읽는다.

2017년 이 봄에 내가 까닭없이 슬퍼지는 이유가 짚을 듯 하다.

이어 시집을 꺼내든다.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 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남에게 犧牲(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사십)명가량의 醉客(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犯行(범행)의 現場(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내 아버지 세대의 사람 시인 김수영의 시편들, 곧 “성(性), 罪(죄)와 罰(벌), 김일성 만세”이다.

아마 2017년을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미친 놈>일 뿐. 김수영의 삶에 대한 솔직함은 끼어들 틈 조차 없이.

허나, 나는 2017년 4월에 김수영이 노래하는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에 꽂힌다.

세상이 온통 제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속고 있는 듯한 2017년 서울이 아직도 이루지 못한 1960대 김수영의 솔직함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뀌기를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