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살이란 한 판 놀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9

제 3강 – 3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3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구체적 방법론이 아무리 잘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듯이 갖추어야 할 5 가지 기본적 틀 (Five Basic Frameworks)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생각하는 기본 방식이며 접근하는 원칙들 입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근성이라고 보겠습니다.

(1) ‘이것은 논리적이냐? 즉 Logical 하냐? 말이 되는 소리냐?’를 반듯이 물어야 합니다.

(2)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유가 타당한가? 즉 Reasonable한가?’를 반듯이 따져보는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3) ‘이것은 과학적 근거와 타당성이 있는가? 즉 Scientific하냐?’를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4) ‘이것은 분석 가능한 것인가? 즉 Analytical한가?’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쪼개고 가르고 분석해 보는 태도는 인문학도가 지녀야 할 학문적 기본 자세 입니다.

(5) ‘통합 가능한 길이 있는가? Synthetic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즉 아무리 쪼개고 갈라치고 분리시켜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냐?’를 질문하고 이를 추구해 가려는 자세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 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개인적이며 인격적 자세 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 소양, 혹은 기초적 품성(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질문해 보는 자세 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린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회의(懷疑)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도 그런 모습을 반영합니다. 가능한한 많이 의심하고 자주 의심하는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갑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둘째는 비판정신입니다(Criticism). 학문은 변합니다. 철저하게 따지고 묻고 저항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인문주의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입니다. 인문학에서 비판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이미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릅니다. PH.D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지성인은 아닙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과학자나 불의한 정부에 동조하는 학자나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동하는 교수는 지식은 있어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사리와 사욕을 챙기고 입신양명 하려는 지식인은 지성인이랄 수 없습니다.

신학적 반성 없이 교회를 크게만 만들려고하는 목사나 승려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자유정신입니다. 인문학의 최종적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그 자신이 우선 일체의 모든 것들로 부터 – 물질, 권력, 명예, 종교, 신, 타인,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까지 – 자유해야하고, 그 자유를 위하여 사유하고 연구하고 말해야 합니다.

르네쌍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실존주의와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모든 정신사는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헤겔).

과거 한 사람의 자유로 부터 만인의 자유에 이르도록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신념과 철학이 인문학의 기조입니다. 여기에는 기초적 인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 자유와 종교-사상적 자유에 이르기 까지 일체의 모든 인간적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태초에 자유가 있었느니라’를 실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네째는 그러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종교적 덕목만이 아니라 종교와 학문과 인류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기본 덕목 중 하나입니다. 벼는 익을 수록 머리를 숙이고 사람은 배울 수록 겸손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의 목표나 이상도 변하고 그 방법론도 당연히 변합니다. 이성적 방법론이라고해서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대학교육의 목표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학문과 학문의 연구는 특정한 시대,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객관성을 지니지만 그 어떠한 학문도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학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만일 학문을 어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고 규정하여 학문의 성격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학문이란 그 내용, 목적, 방법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포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진리를 향한 순례는 끝없이 변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연구를 마치 종교적 신념 처럼 여기고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에 대하여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니게된다면 이는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를 상실하게 됩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 지식의 어쩔수 없는 한계 때문 입니다. ‘배움이란 자신의 무지를 확인해 가는 과정 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즐기는 태도 입니다. Johan Hoizinga는 homo ludens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인생살이란 한판의 놀이 입니다. 다행이 태초부터 인간은 놀이를 추구했고 또 놀이를 창조할 줄 알았습니다.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일 만이 보람과 성취를 거져옵니다. 억지로하는 일은 결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놀이의 최종적 목표는 모두의 행복 입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서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라 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문학의 가장 좋은 방법론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요, 놀면서 하는 것입니다. 시와 노래, 춤과 그림이 곁들여지는 ‘한 바탕의 놀이’와 여유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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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봄눈이 사방을 덮은 날, 장자를 읽다. 장자(莊子) 외편(外編) –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이른바 호량지변(濠梁之辯) 이야기.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네.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지. 자네는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었던 것일세. 그렇다면 물고기가 아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세”

이 이야기에 대한 자오스린의 해석이다.(자오수린저 허유영번역,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서)

논리상으로 보면 이 변론의 승자는 혜시다. 장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라는 혜시의 논리적인 질문을 회피했다. 불교에서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마셔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물고기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미학적으로보면 장자가 이겼다. 장자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투사시켜 물고기가 즐거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년- 1207년, 중국 남송의 시인)은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라고 했다. 장자는 큰 덕을 가슴에 품고 세상 만물에게  봄처럼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에게는 천지간이 모두 따뜻한 우주였다.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느끼던 날에.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숙어출유종용) 是魚之樂也(시어지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자지부지어지락) 全矣(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

춘설(春雪)

올 겨울은 눈없이 지나가나 했더니, 우수 경칩도 다가고 춘분이 코앞인데 온동네가 하얀 눈으로 덮였다. 눈속에 갇혀 하루를 쉰다. 부지런한 앞집 주인은 벌써 눈을 치우고 있다만, 나는 정지용의 춘설이나 읊고 있다.

3-14-17b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3-14-17

3-14-17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