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목동 기게스(Gyges)는 어느 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 틈에서 발견한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남의 눈을 의식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유혹해 간통하고, 왕을 죽인 뒤 자신이 왕에 올랐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나오는 가공의 마법 반지, 바로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글라우콘은 이 이야기를 하며 스승에게 물었다. “이런 반지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승에게 이 질문을 던졌던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 욕심만으로 가득찬 삶을 살 것이라는 예단이 있었다.

2017년 내가 뉴스로 접하는 세상들은 마치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자기 욕망으로만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듯 하다. 글라우콘의 의심이 결코 예단이 아니라 이른바 진실이 아닐까하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신에 대한 나의 믿음조차 흔들리는 순간, ‘그게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뱃사람들을 위해  예수선교를 하는 Philadelphia 에 있는 Seamen’s Church의 David Reid 목사도 그 중 하나이다.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가 이끄는 유혹에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바로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다. 어쩜 그것은 진실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일게다.

David Reid목사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함께 기억하자며 세상을 향해 던지는 초대 글이다.


David Reid가 초대합니다.

4월 16일 일요일에, 필라델피아 소재 Seamen 교회 예배당(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에서, 3년전 대한민국 페리 “세월호”가 연안에 침몰하여 목숨을 잃은 304명을 위한 추도 예배를 제가 주도할 예정입니다. 그날 아침 270명의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수학여행길이었습니다. 저는 한인회와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Philadelphia SESAMO)’과 협력하여, Seamen 교회 예배당에서 부활주일 오후에 개최될 예배 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오는 세 명의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북을 연주하는 특별 음악 공연 순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음 유튜브에 링크하시면, 그들의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우리는 또한 다음 유튜브 링크를 사용하여, 한국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예배 마지막에는,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로 구성된 ‘416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영상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다음은 그 노래의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약속해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너희가 우리 아들이다/ 너희가 우리의 딸이다/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너희 모두가 아들 딸이다

그 누가 덮으려 하는가/ 416 그 날의 진실을/ 그 누가 막으려 하는가/v애끓는 분노의 외침을/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우리 모두 행동할거야/ 이 마저 또 침묵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 끝까지 다 밝혀낼거야/ 끝까지 다 처벌할거야/ 세상을 바꾸어 낼거야/ 약속해 반드시 약속해

***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재난이었으며, 대한민국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완전한 조사 요구에 대해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MIT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학생 권이석이 행한 독립적 분석에 따르면, 2000년 James Reason이 발표한 “스위스 치즈 파라다임(Swiss Cheese paradigm)”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안전장벽이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 David Reid는 Seamen 교회의 자원 사제이며, Claremont Lincoln University에서 범종교 활동 전공 석사 과정을 밟고 있고, 펜실베니아주 사제사회 회원입니다.


Invitation From:  David Reid

On Sunday April 16th, at the 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 in Philadelphia, I will be leading a service of remembrance for the 304 people who lost their lives three years ago when the Korean ferry “Sewol-Ho ” sank off the coast of Korea. 270 high school students died that morning, they were on a school field trip. I am working with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and the Philadelphia People in Solidarity with the Families of Sewol Ferry (Philadelphia SESAMO) group on the order of service that will be held on Easter Sunday afternoon at the Seamen’s church chapel. We will have a special music presentation by three Korean high school students from Fort Lee, New Jersey, who play traditional Korean drums. You can listen to their music on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  We will also be saying the Lord’s Prayer in Korean using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At the end of the service we will show the following video of the song sung by the 416 Choir, whose members are the parents of the victims: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Here are the inspiring words of that song in English:

We are your mothers, we are your fathers,/ we all are your mother and fathers who buried you in our hearts./ You are my sons, you are my daughters,/  you all are our sons and daughters who will live in our hearts. / Who are those trying to cover up the truth of the April 16, / Who are those trying to block up these desperate, furious cries

We won’t stay put/ We all will stand up/ If we still keep silent, there will be no more future/ We will search for the truth to the end,/ We will bring those accountable to justice/ We will change this world/       We promise you, promise you on our conscience.

*** This was the worst maritime disaster that South Korea has ever experienced and it sent shock waves through the nation, there is now a worldwide community of support calling for a full inquiry. Independent analysis done by a Korean graduate student Yisug Kwon at MIT has already shown that there was a systemic failure of safety barriers, the classic “Swiss Cheese paradigm”  that James Reason wrote about in 2000.

**** David Reid : Volunteer Chaplain – Seamen’s Church Institute, Graduate Student – M.A. In Interfaith Action, Claremont Lincoln University, Member – PA Society of Chaplains


 

눈(雪)과 봄(春)

시간이 바뀌며 낮시간이 제법 길어졌다. 주중 일터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일요일 한낮의 길이가  생각보다 많이 길다. 교회를 다녀온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화창한 봄날인 줄 알고 노란 꽃잎 내민 개나리가 서 있는 곳은 눈밭이다.

0319171708a_Burst01A

그 눈밭을 뚫고 잔디들은 이미 봄을 맞고 있다.

0319171708_Burst01A

어제 가게 일을 도와주는 미얀마 출신  Lou가 알래스카에 사는 동생이 보내주었다며 선사한 양념된 훈제 연어를 들고 부모님을 찾았다. 가려움증으로 오래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새로 처방받은 약이 잘 듣는다며 모처럼 화사하게 웃으신다. 아버지는 ‘마침 잘 왔다’며 나를 컴퓨터 앞으로 끄신다.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는 말씀이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아버지가 다룰 줄 몰랐을 뿐.

이 겨울이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들어가셨던 장모가 세상 뜨신 지도 벌써 백일이 지났다.

0319171506A

장모 계신 곳에서 가까이 눈에 닿는 거리에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누울 곳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곳은 이미 완연한 봄이다.

0319171512bA

두 내외 먹을 거리 장을 보고 돌와왔건만 아직도 한낮이다.

오늘 아침에 손님들에게 보낸 장자 이야기에 대한 응답들을 보며 저녁을 맞는다.


오늘은 동양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당신은 두 사람의 생각 중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옛날 시인 한사람은 이런 시귀를 남겼답니다.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

이제 봄이 다가옵니다.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재미있고 즐거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story from “Zhuangzi,” one of the old Oriental classics:

Zhuangzi and Huizi were strolling along the bridge over the Hao River. Zhuangzi said, “The minnows swim about so freely, following the openings wherever they take them. Such is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You are not a fish, so whence do you know the happiness of fish?”

Zhuangzi said, “You are not I, so whence do you know I don’t know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I am not you, to be sure, so I don’t know what it is to be you. But by the same token, since you are certainly not a fish, my point about your inability to know the happiness of fish stands intact.”

Which one do you think is right?

Having heard this story, an old poet left the following line of a poem: “As I regard nature very beautiful when I see it, nature must feel the same about me when it sees me!”

Now,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

I wish that all that you see and feel will be beautiful, joyful and amusing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중략 –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소설속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호르헤)이 드러나자, 범인  호르세는 모든 살인 사건들의  비밀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도서관과 함께 재로 변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윌리엄 수사가 그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중세 교회시대에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권위라는 권력은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단순한 잣대는 선과 악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선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1327년 11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이다.

2017년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말에 떠올린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20세기 이래, 일본 식민 지배를 근대화로 위장하고, 남북 분단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무리들이 내세운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깃발 아래서 그 무리들 대신에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해본다.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헛된 꿈을 이어가는 이가 어찌 박근혜  하나 뿐일가? 이제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지배해 왔던 거짓 권력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장미의 이름으로.

사람살이란 한 판 놀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9

제 3강 – 3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3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구체적 방법론이 아무리 잘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듯이 갖추어야 할 5 가지 기본적 틀 (Five Basic Frameworks)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생각하는 기본 방식이며 접근하는 원칙들 입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근성이라고 보겠습니다.

(1) ‘이것은 논리적이냐? 즉 Logical 하냐? 말이 되는 소리냐?’를 반듯이 물어야 합니다.

(2)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유가 타당한가? 즉 Reasonable한가?’를 반듯이 따져보는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3) ‘이것은 과학적 근거와 타당성이 있는가? 즉 Scientific하냐?’를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4) ‘이것은 분석 가능한 것인가? 즉 Analytical한가?’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쪼개고 가르고 분석해 보는 태도는 인문학도가 지녀야 할 학문적 기본 자세 입니다.

(5) ‘통합 가능한 길이 있는가? Synthetic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즉 아무리 쪼개고 갈라치고 분리시켜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냐?’를 질문하고 이를 추구해 가려는 자세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 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개인적이며 인격적 자세 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 소양, 혹은 기초적 품성(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질문해 보는 자세 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린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회의(懷疑)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도 그런 모습을 반영합니다. 가능한한 많이 의심하고 자주 의심하는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갑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둘째는 비판정신입니다(Criticism). 학문은 변합니다. 철저하게 따지고 묻고 저항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인문주의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입니다. 인문학에서 비판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이미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릅니다. PH.D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지성인은 아닙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과학자나 불의한 정부에 동조하는 학자나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동하는 교수는 지식은 있어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사리와 사욕을 챙기고 입신양명 하려는 지식인은 지성인이랄 수 없습니다.

신학적 반성 없이 교회를 크게만 만들려고하는 목사나 승려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자유정신입니다. 인문학의 최종적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그 자신이 우선 일체의 모든 것들로 부터 – 물질, 권력, 명예, 종교, 신, 타인,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까지 – 자유해야하고, 그 자유를 위하여 사유하고 연구하고 말해야 합니다.

르네쌍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실존주의와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모든 정신사는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헤겔).

과거 한 사람의 자유로 부터 만인의 자유에 이르도록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신념과 철학이 인문학의 기조입니다. 여기에는 기초적 인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 자유와 종교-사상적 자유에 이르기 까지 일체의 모든 인간적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태초에 자유가 있었느니라’를 실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네째는 그러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종교적 덕목만이 아니라 종교와 학문과 인류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기본 덕목 중 하나입니다. 벼는 익을 수록 머리를 숙이고 사람은 배울 수록 겸손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의 목표나 이상도 변하고 그 방법론도 당연히 변합니다. 이성적 방법론이라고해서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대학교육의 목표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학문과 학문의 연구는 특정한 시대,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객관성을 지니지만 그 어떠한 학문도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학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만일 학문을 어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고 규정하여 학문의 성격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학문이란 그 내용, 목적, 방법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포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진리를 향한 순례는 끝없이 변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연구를 마치 종교적 신념 처럼 여기고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에 대하여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니게된다면 이는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를 상실하게 됩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 지식의 어쩔수 없는 한계 때문 입니다. ‘배움이란 자신의 무지를 확인해 가는 과정 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즐기는 태도 입니다. Johan Hoizinga는 homo ludens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인생살이란 한판의 놀이 입니다. 다행이 태초부터 인간은 놀이를 추구했고 또 놀이를 창조할 줄 알았습니다.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일 만이 보람과 성취를 거져옵니다. 억지로하는 일은 결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놀이의 최종적 목표는 모두의 행복 입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서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라 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문학의 가장 좋은 방법론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요, 놀면서 하는 것입니다. 시와 노래, 춤과 그림이 곁들여지는 ‘한 바탕의 놀이’와 여유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입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Time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봄눈이 사방을 덮은 날, 장자를 읽다. 장자(莊子) 외편(外編) –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이른바 호량지변(濠梁之辯) 이야기.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네.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지. 자네는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었던 것일세. 그렇다면 물고기가 아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세”

이 이야기에 대한 자오스린의 해석이다.(자오수린저 허유영번역,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서)

논리상으로 보면 이 변론의 승자는 혜시다. 장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라는 혜시의 논리적인 질문을 회피했다. 불교에서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마셔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물고기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미학적으로보면 장자가 이겼다. 장자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투사시켜 물고기가 즐거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년- 1207년, 중국 남송의 시인)은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라고 했다. 장자는 큰 덕을 가슴에 품고 세상 만물에게  봄처럼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에게는 천지간이 모두 따뜻한 우주였다.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느끼던 날에.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숙어출유종용) 是魚之樂也(시어지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자지부지어지락) 全矣(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

춘설(春雪)

올 겨울은 눈없이 지나가나 했더니, 우수 경칩도 다가고 춘분이 코앞인데 온동네가 하얀 눈으로 덮였다. 눈속에 갇혀 하루를 쉰다. 부지런한 앞집 주인은 벌써 눈을 치우고 있다만, 나는 정지용의 춘설이나 읊고 있다.

3-14-17b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3-14-17

3-14-17c

내가 들고있는 잣대는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8

제 3강 – 2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2

일반적으로 제반 학문의 방법론을 거시적으로 볼 때는 세 가지로 분류 합니다.

첫째는 ‘직관적 방법론’입니다. ‘감성적 방법론’이라고도 합니다. Emotional Methodology, 혹은 Romantic Methodology 입니다. 여기서는 직관 Intuition과 감성 Emotion을 학문 연구의 기초적 틀로 사용합니다. 이성이나 과학이 아닌 본능과 감성을 지지합니다. 가슴으로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지만 예술이나 문학이 지닌 속성에 기인한 것 입니다. (물론 우리는 윤동주나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이성적으로 분석해야만 하는가? 김소월의 진달래를 수학적으로 풀어 볼 수 있는가? Kiss 할때 kiss에 대한 생리적, 의학적 분석을 하는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가?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분석적이고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 입니다. Scientific Methodology, 혹은 Analytical Methodology입니다. 여기에서는 실험과 관찰, 분석과 조사가 연구의 기본적 틀이 됩니다. 이는 당연히 머리로 하는 연구입니다.

추론, 가설, 실험, 조사, 관찰, 입증, 이론화, 혹은 논리화의 과정이 이어집니다. (숙제로 주어진 미적분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한다고 답이 나온다고 보십니까? 갈릴레오나 케풀러의 천체이론에 대한 예술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뉴우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까요?)

셋째는 ‘합리적 방법론 입니다. ‘이론적 방법론’ 혹은 ‘이성적 방법론’이라고도 말 합니다. Logical Methodology, 혹은 Rationalistic Methodology입니다. 이것은 주로 인문학적 방법론입니다. 이 방법론은 위에서 본 두번 째 ‘과학적 방법론’과 매우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중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이를 분리하려고 합니다. 인문학은 사회 과학적 방법론은 사용하지만 과학적 기재나 실험적 텍크닠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 입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과 인문학에서 사용해 온 ‘합리적 방법론’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있습니다.

첫째는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Deductive Method입니다.

어떤 가설, 혹은 가설적 진리를 설정한 다음 그 가설에서 개별적 진리, 혹은 결론을 끄집어내는 방법입이다. Aristoteles가 대표적 주창자입니다.

연역적 방법론에서는 ‘모든 인간에게는 배우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아는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것, 즉 a priori 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경험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선험적 진리를 가설로 내세웁니다. 예컨데 ‘모든 인간은 죽는다’ ‘살인은 범죄 행위다’ 같는 가설입니다. 이 경우 죽음이나 살인은 내가 직접 경험 해 보아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가설은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통하여 획득한 진리입니다 .

바로 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살인은 죄다’ 라고 하는 가설적 진리에 근거하여, 홍길복은 반듯이 죽는다, 김동숙도 틀림없이 죽는다, 장담컨데 천옥영도 백퍼센트 죽는다고 말 합니다. 이들이 반듯이 죽는 이유는 한가지인데 그것은 이 셋은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연역법적으로 만들어진 방법론에서는 선험적으로 추론한 그 가설을 ‘일반적 진리’ 혹은 ‘보편적 진리’로 확정하고 그 가설적 진리를 모든 곳에 대입합니다.

Aristoteles로 부터 시작된 ‘삼단론법’ syllogism은 바로 이 연역적 방법론에서 비롯됩니다. 예컨데 이런 것 입니다.  A. –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C.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A와 B는 a priori한 것입니다. 즉 선험적으로 아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하는 전제 A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고 하는 전제 B가 반드시, 틀림없이 맞는 전제여야만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고 하는 C의 결론이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입니다.

(다른 예: (1) A. 신은 존재한다. B. 모든 존재하는 것은 유한 (혹은 무한)하다. C. 그러므로 신은 유한 (무한)하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 A와 B가 선험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2) A. 모든 전쟁은 비극이다. B. 한국은 전쟁이 많은 나라다. C. 그러므로 한국은 불행한 나라다.

(3) A. 싸우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B. 우리 집은 늘 싸운다. C.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불행한 집이다.

(4) A. 동물들은 늘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B. 우리 남편도 늘 먹는 것에 만 신경을 쓴다. C. 그러므로 우리 남편은 동물이다.

–이 모든 예에서 우리가 반듯이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은 C라는 결론이 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A와 B가 선험적으로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귀납적 방법론’입니다. 요즘은 ‘실험적 방법론’ 혹은 ‘경험적 방법론’이라고도 부릅니다. Inductive Method, Experimental Method 입니다. 이는 ‘개별적 관찰을 통하여 보편적 진리로 나가는 방법’ 입니다. 개별적 사실들을 하나 하나씩 관찰, 조사, 수집, 조직화하여 어떤 가설을 만들고 그 가설을 진리로 확정하는 방법입니다. F. Bacon이나 J .S. Mill이 대표자 입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1)자료 수집과 조사 및 관찰의 단계. Investigation & Data Collection. (2) 수집된 자료를 조직화하고 어떤 유형이나 pattern을 만드는 단계. Organizations. (3) 잠정적인 가설을 만드는 단계. Hypothesis Making. (4) 증명하는 단계. Verification. 잠정적으로 만든 그 가설을 증명해 냅니다.

물론 그 가설은 확인 할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귀납적 방법론은 원래 물리학이나 과학에서 사용되던 방법이었습니다만 오늘날은 사회학, 심리학, 각종 통계학은 물론이고 윤리학이나 신학(예수 쎄미나)을 비롯한 각종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트럼프의 취임식 인파 등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써의 ‘분석적 방법론’ Analytical Method 입니다. 귀납적 방법론은 실험과 경험의 반복을 통하여, 즉 개별적이고 특수한 현상들의 관찰이나 데이타 수집을 통하여 일반적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것 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A.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A. 플라톤도 죽었다. A. 예수도 죽었다. A. 공자도 죽었다.  A. 나폴레옹도 죽었다. A. 김일성도 죽었다. A. 박정희도 죽었다. B. 살펴보니 이 모든 이들은 사람이었다. C. 그런 걸 보니 사람이란 (통계상 거이) 죽는 것이 확실하다.

셋째는 ‘변증법적 방법론’입니다. Dialectical Method 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때 부터 시작되어 서양 철학사에서 꾸준히 발전되어왔지만 Hegel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됩니다.

먼저는 ‘하나의 명제’ 즉 Thesis(正)가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 명제에 대한 ‘반대 명제’ 즉 Antithesis(反)가 출현 합니다. 처음 출현한 명제와 그 다음에 나온 반대 명제 사이에는 논쟁이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 둘 사이에 타협, 혹은 진보된 ‘종합 명제’ 즉 Synthesis(合)가 형성 됩니다. 이 synthesis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또 하나의 thesis가 되고 그 thesis에 반대하는 다른 antithesis가 나타나 대립 되다가 마침내는 synthesis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thesis, antithesis, synthesis를 반복하면서 영원히 순환 발전되어 가는데 헤겔은 이것을 ‘역사의 발전’ Aufheben, 곧 ‘指向’ 이라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1) 正 –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2) 反 – 아니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다. (3) 合 –인간은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정적 동물이다. 이런 것이 인간 이해의 발전 단계입니다.

(1) 正 –역사는 전진한다. (2) 反 – 아니다 역사는 퇴보한다. (3) 合 – 역사는 전진과 퇴보를 반복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이해에 대한 발전단계를 설명 합니다.

 (1) 正 – 최고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2) 反 –아니다. 최고로 소중한 것은 물질이다. (3) 合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신도 물질도 아니고 사람이다. 이는 인문학과 철학의 논리 발전 방식 입니다.

(기타 : 사랑은 영원하다. – 아니다. 사랑은 순간적이다. – 사랑에는 순간적인 것도 있고 영원한 것도 있다. / 언론에 나온 것은 사실이다. – 아니다. 언론에는 거짓 보도가 더 많다. – 언론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재미로 보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가게 손님들과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겝니다. 세상 어디서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제가 손님들에게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정치 이야기(?… 딱 정치 이야기랄 수는 없지만, 이즈음 내가 살고 있는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한국과 유사한지라 )로 오늘 아침에 편지를 띄워 보았답니다.

행여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현재 이메일 응답만으로는 긍정적 느낌의 답이 대세랍니다. 새로 맞는 한 주, 제 가게 손님들과 나눌 한국상황에 대한 응답들이 자못 궁금하답니다.

3-12

지난 주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이야기는  한국대통령 탄핵에 대한 것이었답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온지도 벌써 30년이 넘어가니 사실 오늘날 한국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제게  한국의 정치상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뉴스에 관심을 안가질 수가 없었답니다.

저는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한국에서 살았답니다. 그 이름이 박정희였는데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저는 초, 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를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답니다. 그가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통치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이십대 나이였던 그 때에 겪었던  정말 웃지못할 일들이 많았답니다. 일테면 남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를 못하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되는 것들이었답니다. 제가 스무살 무렵의 일이었는데 거리에서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이들을 경찰들이 잡아 머리를 가위로 짧게 짤라버리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들을  경찰들이 붙잡아 치마를 가위로 자르는 일도 있었답니다.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었지요.

그 무렵에 제가 읽었던 책 가운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답니다. 그 책에 있는 말 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 중략-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국뉴스를 보면서 떠올린 오래 전에 읽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랍니다.

좋고 나쁘건 여기 살려고 온 내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삶에 큰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여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당신의 세탁소에서


It was the impeachment of the Korean president that became a much-talked-about issue among Korean people last week.

As I came to America over 30 years ago, I cannot say that I know well about the situation in Korea at the present day. And, as you may know, I’ve been busy at the cleaners so that the political situation in Korea has not attracted my attention particularly. However, I cannot but pay attention to the news about the impeachment of the president of Korea.

I lived in Korea during the reign of the impeached Korean president’s father. He is President Park Chung-hee.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I went through the elementary, middle, high school and the university. I even completed my military duties,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All these were possible because his reign lasted for no less than 18 years.

When I was in my twenties, many things about which I could not laugh happened in Korea. For example, they restricted men from having long hair and women from wearing a short skirt. Around the time when I was about twenty years old, the policemen caught young men with long hair and cut their hair short with scissors. They also caught young women with a short skirt and cut the skirt. This kind of unthinkable things had happened when the father of the president who was impeached the other day had been the president of Korea.

One of the books which I read in those days was “Civil Disobedience” by Henry David Thoreau, which was banned in Korea at that time. The following is from the book:

We should be men first, and subjects afterward. It is not desirable to cultivate a respect for the law, so much as for the right. The only obligation which I have a right to assume is to do at any time what I think right… I came into this world, not chiefly to make this a good place to live in, but to live in it, be it good or bad.

Those words came to my mind, while I was watching news about Korea.

If we can do something, however small it may be, “to make this world a good place to live in, be it good or bad,” wouldn’t it be meaningful in life?

I hope that this world will become one in which every single individual as oneself, instead of the mass, is valued and respected.

From your cleaners.

속좁은 고집을 버려야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7

제 3강 – 1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1

인문학도 여러가지 학문 중에 하나 입니다. 인문학은 종교적 수행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우선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 학문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이해는 Aristoteles가 그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academy), 혹은 ‘학문연구’(academic study)란 “자연, 인간, 인간사회에서 나타나거나(현상) 감지되거나(느낌) 경험(관찰)되거나 생각(사유와 판단)되는 그 어떤 현상, 운동, 행위, 경험, 사유, 판단, 주장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연구, 설명, 증명, 토론, 정리, 정돈, 응용하는 인간의 일체 이성적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론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필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감정적 설교나 설득, 종교적 명상이나 기도, 혹은 주관적 자기체험을 일반화하거나 객관화 할수 없습니다.)

Aristoteles는 학문의 영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지는 현상계(現象界)입니다. 즉 우리의 오관(五觀)으로 경험되는 세계가 첫 연구의 대상 입니다. 이것을 그는 형이하학(形而下學)이라고 했습니다.

Physics, 즉 눈 앞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다루는 물리학, 수학, 화학, 천문학, 기하학, 지리학, 의학, 농학을 비롯하여 이를 응용한 제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제반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 현상을 다루는 학문 일체를 형이하학 이라는 이름으로 묶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히 물리학과 천문학, 수학과 기하학에서 출발했던 형이하학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분화 되었습니다. (의학, 농학, 정치학, 법학 등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서 같은 학문들 사이에서도 서로 소통이 않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근엔 융합학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감촉되지 않는 세계, 즉 현실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분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 있는 이면의 세계’를 Metaphysics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물리학, 즉 physics 뒤에 meta 놓여 있는 학문 philosophy이 모든 학문의 본질을 다루는 근본학이라고 보았고 이를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혹은 ‘제일 철학’ Proto Philosophia 이라고 이름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그 접근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를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1)  2004년 Mexico만에서는 Hurricane Charlie가 Florida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Orlando시에서는 엄청난 폭리가 있었습니다. 2불 짜리 ice bag 하나가 10불로, 40불 짜리 모텔 방 하나가 200불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미 의회와 행정부를 포함한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취 할 수 있는 조치는 ‘재난 발생 지역에서의 가격 폭리 처벌 특별법’의 제정 입니다. 이것이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다룰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은 선한가 악한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과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간성 속에 있는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M.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2) 이명박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서 거대한 토목공사 사업인 4대강을 개발했습니다.형이하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력의 증가, 실업자의 감소, 산업의 활력, 국토의 개발과 같은 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한번 파괴하면 다시 복원이 가능한 것인가?’ ‘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은 우리 후손 들에게도 물려주어서 고루 함께 써야 할 인류 모두의 유산이 아닌가?’

(3) 최근 박근혜 정부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력을 비선 실세와 함께 부당하게 남용하였다는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여 헌법재판소의 심리에 의해 파면되었습니다.

이 대통렬 파면 과정 속에서 많은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여러가지 개인적 이해관계나 친소 관계를 따라 촛불이니, 태극기니 하면서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면서도 또 법을 지키자, 법질서대로 하면 된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목표는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은 정직할 수 없는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4)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자리 창출, 실업자 구제, 복지 수당 증액, 경제 안정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모두 정치에 대한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사람은 과연 밥만 먹고 사는가?’ ‘돼지의 행복도 행복인가?’ ‘진정한 행복과 참된 평등을 이루는 벙법은 무엇일까?’ ‘물질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가?’ 같은 것을 화두로 제시 합니다.

– 기타 우리는 Boat people 이나 asylum seeker 문제, 혹은 FTA 문제, America First, Brexit 같은 정치-사회적 잇슈들을 가지고서도 인문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의 방법론이 있고 그 방법론에 따라서 세운 가설과 목표를 향하여 연구, 추진 하게 됩니다.

방법론은 학문 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또 같은 학문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차이가 있읍니다. 원리는 하나라고 하더라도 방법은 다양 합니다.(One Principle, Many Methods) 방법론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는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첫 출발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이나 동양적 가부장적 사고를 지닌 이들은 여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