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3

교실문을 여는 글 3 – 왜 인문학인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지향하는 제 1차적 목표는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삶의 현장은 물질과 권력(정치권력, 자본권력, 종교권력)을 사람 보다 위에 두고 이것들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며 이를 추구하고 더 많이 획득하는 것에다 사람이 사는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는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동물화 되어가고 도구화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의 노예로 전락된지 오래되었습니다.

나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나 자신이고 인간에 대한 최대의 적은 인간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개인들과 우리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인간의 품격을 회복, 유지, 확장해 나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여 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사회를 꿈꾸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거나 반대로 사회 변혁적 방법들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나눔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하고 공동체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어 보자는 하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선비가 학문을 하는 이유, 즉 지식인이 글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목표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자연히 사람다운 삶도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문학의 일차적 목표는‘사람됨’에다 둡니다.

동양에서의 인문교육이란 곧 인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전인’(全人 Whole man)교육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양은 기술, 과학, 테크닉을 중심하여 합리성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지만 동양은 사람됨, 즉 인간의 품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중국을 중심한 동북 아시아에서는 그의 신분과 직책이 무엇이든, 이를테면 왕이든 사대부이든, 상민이든 천민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그의 하는 일과 직책이 어떠하든 간에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게 될려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외우고, 거기에 따라서 일체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서(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역경(書經, 易經<周易>)입니다.

대학의 핵심 개념은 ‘덕(徳)’입니다. 이‘덕’을 기초와 기본으로 삼아 논어는 그 위에다 ‘인(仁)’을 더하고 맹자는 ‘의(義)’를 가르치고 중용은 ‘예지(禮智)’를 보탭니다. 우리는 논어, 맹자, 중용이 가르치는 4가지 핵심 개념인 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덕(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것들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하나가 추가 됩니다. 곧 ‘중용(中庸)입니다.

아무리 인의예지가 중요한 사덕이요, 모든 것의 기초요, 또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만 옳고 자기만 바르고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아직도 덜된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동양의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 워드(key word)는 중용입니다. ‘극단적으로 나가지 마라. 극단은 절대로 않된다. 극단을 피하라!’  중용이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것 입니다. 이 경우 정도(正道)란 ‘옳바른 길’이지 ‘가운데 길’이 아닙니다. 중용(中道)나 중립(中立)이 정도(正道)는 아닙니다.

중용은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이 아니라 검은 검은 검다고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 둘을 아우르는 포용성을 말 합니다.

동양 인문학의 핵심인 ‘중용’을 영어로는 Harmony and Balance로 번역 합니다. 포용성이란 관용, 너그러움, 똘레랑스(Tolerance)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극단, 오직, Only, 영어에서 ‘나’ ‘I’는 아무리 문장의 중간에 와도 늘 대문자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그릇된 태도라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달리 말하거나 다른 스타일로 산다고해서 나만 옳고 그는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호주와 같이 180여 개나 되는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야하는 ‘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y)’ 에서는 특정한 민족이나 그들의 문화, 언어, 종교, 전통만 주장하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Living Together 우리의 삶과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십자군 전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중세 기독교, 근대 이후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선교라는 이름 아래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살인, 폭력, 수탈을 감행해 온 기독교 선교의 죄악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수 백만명이나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의식을 비롯하여 지금도 이어지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교회만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민족적 배타주의, 비관용적 인생 태도, 비타협적 인간 관계 등은 인문주의 정신을 그 밑바탕에서 부터 흔들어놓는 것들 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이 현실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실천적 덕목을 네 가지로 요약해 줍니다.

첫째는 측은지심 (惻隱之心 Sympathy)입니다. 사람은 신분과 직업, 성별과 나이, 사상과 언어를 초월하여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자연계와 동식물계 등 세상 삼라만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심, 사랑, 희생,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Goodness)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이웃, 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해서 까지 잘못된 것이 드러나고 알게되었으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싸워야한다는 교훈 입니다.

셋째는 겸양지심 (謙讓之心 Tolerance)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과 양보 입니다. 겸손이란 그냥 공손하게 처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입니다. 양보란 말이나 행동이나 일이나 물건에 있어서 일체 타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나를 제일 뒤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시비지심 (是非之心 Justice)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릴줄 아는 지혜입니다.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그 악에 동조하는 것 입니다.

예수도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나 설법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한 시대의 지식인들과 지성인들, 교수들과 언론인들은 300여명도 더 되는 어린 학생들이 차거운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하고서도 2년 반이 넘도록 그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자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찌 말하지 않고 분노 할 줄을 모른다면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는 인간이랄 수가 없습니다.

맺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위하여 듣고 읽고 말하고 나눌려고 하는가? 한 마디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서로 서로 좀 돕고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 책, 영화, 음악, 그림, 연극, 드라마, 기타 무엇이든지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소개해 주십시요.

그 다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답게 ‘살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인줄 뻔히 압니다. 알기는 해도 실천하는 것은 아마 숨을 거두기 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와하고 슬퍼라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희망의 빛이 비치리라고 기대하며 ‘행복했지만 괴로웠던 사나이’를 조금은 이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생각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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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란 절대로 없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2

교실문을 여는 글 2 – 왜 인문학인가?

1.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화 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질주하다가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그 동안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곤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빨리 달리면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육신을 말 위에 싣고 빨리 달리다보면 정신은 저 만치 뒤쳐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몸만 너무 바쁘게 살아왔던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추수려 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 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은 자아를 둘러보는 ‘자기 성찰’입니다.

명나라 문인 진유계(陳繼儒)의 글 입니다.

‘고요히 앉으니 평상시 내 마음이 얼마나 경박했는지 알겠구나.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니 지난 날 내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드러나는구나’

2. 혜능대사(慧能大師)가 법성사에서 한 말 입니다.

어느날 법당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벌렸습니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분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한참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혜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건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는 것은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자기 주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고집 내려 놓기’ ‘집착 내려 놓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아닌 동질성 찾기’ 같은 것들에 있습니다.

3.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당 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여행 중 해가 져서 어두운 산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밤 중에 너무 목이 말라 더둠거리다가 웬 바가지에 손이 닿아 그 안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 둘러보니 간 밤에 시원하게 마셨던 그 물이 어떤 사람의 해골 속에 담겨진 해골수 임을 알게 되어 토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원효가 말했습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로구나! 물은 그 물이 그 물인데 어찌하여 나는 꽥꽥거리는가?’

모든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일체의 진리와 비진리는 모두 다 이해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관점, 상황,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칸트식으로 말 하면 ‘물 자체’ (Ding an sich /Thing itself)는 변하지 않습니다.

4. 황희 정승 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종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종이 나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은 틀렸고 자기가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난 황희는 ‘네 말이 맞다’ 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얼마 후에 상대방 종이 또 정승을 찾아와서 오전에 나리를 찾아왔던 종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난 황희는 ‘듣고보니 네 말도 옳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종일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본 조카가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흐리멍텅합니다. 제가 들으니 아침에 와서 말한 종 아이 말이 맞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을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세상은 모두 다 일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습니다.

5. 1920년 대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는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빛에 대한 연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학 연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실험실에서, 동일한 시간,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같은 연구자가 실험을 하는데도 빛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알갱이, 즉 입자(cubic)로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waves)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빛은 입자다 ! 아니다 빛은 파동이다!’하는 두 가지 가설이 서로 충돌하고 큰 이론적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이론이 그 유명한 ‘불확정설’(The Theory of Uncertainty /The Uncertainty Principle) 입니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지만 또 파동일수도 있다. 꼭 한가지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이론 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세운 이 이론은 이후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라 철학, 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일체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전반에 걸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도 정답이 하나로 나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신학과 철학, 인문학과 사회학, 문화와 예술 같은 인문학이 한 가지 질문이나 하나의 개념에 대하여 오직 한개의 대답이나 결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게 아니다’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 입니다.

6. 점묘법 (點描法) – 점 하나 하나씩을 찍어서 커다란 형태를 이루는 미술 기법을 생각해 봅니다.

호주 원주민들의 그림입니다. 작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다 보니까 어느새 큰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하루 점을 찍어가다보니 일생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여럿이서 제각기 점을 하나씩 찍다보니 그것이 우리 사회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 입니다.

7. 모자이크(Mosaic)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각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많이 누리는 것 처럼 보여도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모두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서로 협력하여 전체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보다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작은 사람들이라 하여 기죽을 필요 없고 큰 사람들이라 하여 잘난 척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인문학의 목표 입니다.

8. 실학의 거두, 다산은 정조가 죽은 다음 해, 1801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강진 읍내의 한 허름한 주막집 뒤간방에서 처음 4년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지금의 ‘다산초당’ (茶山草堂)으로 옮겼는데 그 때 다산은 4년 동안이나 이 폐족당한 선비를 돌보아 주었던 주모와 그의 딸을 위해 그 오두막에 당호(堂號)를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사의제’ (四宜齊) 입니다. ‘이 집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가지를 익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늘 생각은 맑고 바르게 하거라. 둘째, 말은 반드시 생각한 다음에 하고 또한 적게하여라. 셋째, 모든 행동은 무겁고 신중하게 해야한다. 넷째, 용모와 의관은 항상 누가 보던 않보던 단정하게 해야한다>

이는 물론 유배 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추수리려던 자아성찰의 인문학적 자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의 한 주막집 주모에게 조차도 당호를 지어줌으로 사람을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아니하는 ‘牧民心書’의 태도요, 사람을 낮추어보지 아니하고 대등하게 대하는 인격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너와 나, 사람과 자연, 하느님과 사람, 어린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having group 과 have nothing group, 정상인과 비정상인, 내국인과 외국인, 원주민과 이민자, 먼저 온 이민자와 후발 이민자, 일체의 모든 甲과 乙 사이에 그려진 빗금(슬레쉬 /)을 철폐하려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섭니다.

결국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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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갈등(葛藤) 또는 포등(葡藤)

한때 뒷뜰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집 자랑거리였다. 등나무는 deck의 지붕이었고 포도나무는 울타리였다. 특히 아버님이 좋아하셔서 내 집에 오실 때면 늘 뒷뜰 등나무 그늘에 나가 계시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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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아래 내 아버님의 한 때 

봄이면 등나무 꽃과 이어피는 라이락 꽃에 취했었고, 여름이면 등나무 그늘 아래서 잔치를 벌리곤 했었다. 포도가 영글 즈음 등나무 그늘 아래서  쏘로우나 휘트먼을 읽는 호사는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겨울이면 deck 위에 쌓인 눈을 치우며 마치 죽은듯이 앙상히 마른 등나무를 걱정하곤 했었다. 어느 해 봄이던가 등꽃이 주렁주렁 달린 뒷뜰 deck에 현판을 걸었었다.

“은혜원(恩惠園)” – 뒷뜰을 바라보거나 그 곳에 나가 앉아있을라치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드러낸 작명이었다. 현판 글씨는 아버님께서 써 주셨다. 그 등나무 그늘 아래서 초, 중, 고, 대학을 마친 내 아이들이, 이젠 아버님처럼 이따금 들르는 곳이 되었다.

몇 해전이던가? 거동이 불편해지신 아버님께서 내 집을 찾으시는 일도 아주 드물어지고, 아이들도 더는 자기 집이 아니게 될 무렵부터 나 역시 뒤뜰에 나갈 일이 부쩍 줄기 시작하였다.

등나무 줄기와 포도나무 줄기가 엉겨 라일락 나무를 휘감기 시작한 것 조차 모르고 한 해를 넘긴  후에야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더는 은혜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무렵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은혜원을 파괴하는 무법자였을 뿐이었다.

등나무와 포도나무의 만행으로 라이락을 잃고 나서야 나는 분노하였고, 두 해 전 봄에 등나무와 포도나무 밑둥과 deck 기둥들에 전기톱을 대어 잘라내었다. 물론 “은혜원(恩惠園)” 현판을 떼어낸 일이 먼저였다.

갈등(葛藤)이 아닌 포등(葡藤)이 빚어낸 참사였다. 아니 내 게으름이 만들어낸 아픔이었다. 그렇게 휑하게 변해버린 뒷뜰을 이젠 다시 가꾸려 한다.

Deck을 다시 꾸미고 꽃나무를 심으려 한다. 글쎄… 언제 그 세월을 맞을런가는 알 수 없지만…. 이따금 찾아올 지도 모를 내 손주들을 위하여….

**** 이즈음 한국 소식을 들으며 밑둥까지 잘라낸 내 뒷뜰  등나무가 자꾸 생각나는지. 갈등의 밑둥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기회는 어느 민족 어느 개인에게나 주어지기 마련아닐까?

비 맞으며 필라 친구들과 함께 하고 온 날 밤에.

2-25-17

 

단상(斷想) – 미국과 한반도

지난 주에 가게 손님 몇 분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19세기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겠어. 넌 (그들과 같은) 한국인으로 어떻게 생각해?”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지난 주초에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북한 정권에 대해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친절하게도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난감해진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제 AP통신은 지난 주에 특유의 격정적 언어로 쏟아낸 트럼프의 연설에 대한 팩트 체크를 확인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마약중독의 대담성(뻔뻔함?)<The audacity of hype> 제목의 그 기사 가운데 하나랍니다.

TRUMP: “To be honest I inherited a mess. It’s a mess. At home and abroad, a mess.”

THE FACTS: A mess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But by almost every economic measure, Obama inherited a far worse situation when he became president in 2009 than he left for Trump. He had to deal with the worst downturn since the Depression.

트럼프는 전임 오바마대통령으로 부터 모든 것이 엉망인 채로 혼란 투성이인 정부를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을 따지고 보면 오바마가 8년 전에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물려 받았던 정부의 모습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처참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엉망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시각이라는 것이지요.( A mess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거니와 그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만 편갈라 나누는 일은 마뜩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히 ‘아니오’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인가를 우상화하는 상황이나 일을 마주할 때입니다. 그것이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될 수도 있겠지만, 역사 이래 사람들이 살아오며 깨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김정남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눈에 뜨인 단어가 ‘백두혈통(白頭血統)’입니다.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는 전근대적인 우상화로 유지되고 있는 북한체제의 실상을 전해주는 말입니다.

이에 반하여 질서와 법규를 앞세워 상징조작으로 대중의 눈을 속이는 지금의 트럼프 정권의 행태 역시 우상화의 한 범주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질서를 앞세워 극단적으로 나(또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부정하는 구조악(構造惡)이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지금의 미국이나 남북한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이 팽배해진 사회는 이미 우상을 이고사는 사람들의 집합체일 뿐일겝니다.

이즈음 미국사회가 겪고있는 극심한 계층 또는 집단간의 대립이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모습들을 보면서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라 선과 악의 싸움으로 제가 치부하는 까닭입니다. 그 싸움조차 허락치 않는 한반도 북쪽은 논외로 치고 말입니다.

미국은 현재 제가 이고 사는 세상이고, 내 인생의 전반부 30여년을 살았던 한반도 남쪽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어 우상이 된 이는 박정희라는 제 오래된 생각인데, 이즈음 그쪽 소식들을 보면 그 생각이 더욱 굳어진답니다.

지금, 우리는…

피해자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너무나 적게 기억한다. –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오늘 동네에서 저와 같은 업종인 세탁업을 하는 이에게 들은 말입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칸들이 이번 주 목요일에 모두 일을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7명의 멕시칸 종업원들이 모두 그 날 하루는 쉬겠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이지요. 사연인즉 Wilmington시내에 있는 St Paul’s Church에서 이번 목요일에 열리는 트럼프의 이민자들에 대한 행정명령을 규탄하는 모임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들이 떠도는 이즈음이지만, 사실 저처럼 촌에 살고 있거나 이 땅의 시민이 된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사람들에겐 솔직히 무관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정황이었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광기가 이렇게 우리들의 생업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요. 실제 히스패닉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인들은 걱정이 많다고들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 신문인 News Journal은 어제  Newark시에서 있었던 행사 하나를 제법 크게 소개했답니다. Newark시는 제 가게가 있는 곳이고, 행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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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양성이다. Diversity is what makes America great.”,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영한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We welcome that stranger. We fight for that stranger, no matter where that stranger is from.”,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We are going to win this battle.”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앓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계 시민으로서 멕시칸들을 비롯한 이민자들과 이 땅의 건강한 시민들과 손잡고  승리하는 대열에 함께 해야 할 때입니다.

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뜻맞는 이들이 모여, 작으나마 기금을 모아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자는 뜻으로 재단을 세운지도 제법 되었답니다. 비록 작지만 꾸준했기에 이제 거의 재단의 틀이 짜여져 간답니다.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일도 꽤 오래 전입니다.

그렇다고 이제껏 내세울만한 대단한 일을 해 본적은 없답니다.

그래도 명색이 재단이므로 이사회를 연답니다. 올들어 첫 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지난 분기에 했던 일들을 정리해 보는 것이지요.

그 중 하나랍니다. 지난 해 북한에 큰 홍수가 나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 고통을 이고 사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무렵에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의 이름으로 적으나마 그들을 돕는 일에 함께 한 적이 있었답니다.

작은 금액의 돈을 유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 WFP) 미국본부에 보냈던 것인데, 뒤늦게 WFP에서 감사의 편지를 받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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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잊고 있었던 함경북도 수재민들을 생각해 본답니다. 비단 북의 수재민들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연의 시계로 오는 봄은 때가 되면 오는 법이지만, 사람들이 기다리는 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일찍이 법정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주셨답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련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극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 새날을 비상(飛翔)하는 의지의 날개가 꺽이지 않는 한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 어제를 딛고 오늘은 일어서야 한다. >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이 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혼돈의 시대

가치(value, 價値)의 혼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말입니다. 어느 아주머님(할머님?)께서 던졌다는 외침 ‘염병하네’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 이즈음입니다.

‘염병하네’보다는 ‘옘뱅하네’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흔히 듣고 사용했던 말인데, 통상은 ‘옘뱅하네’만 따로 쓰진 않았고 그 앞에 ‘지랄’이라는 말을 얹었던 것 같습니다. ‘지랄 옘병하네’라고 말이지요. 때론 그 앞에 한마디 덧붙이곤 하였지요. ‘미친 년(놈) 지랄 옘뱅하네’라고 말이지요.

길을 걸으며 담배 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고 하는 일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말이 익숙했던 때 말입니다. 실제 동네마다 ‘미친 놈(년)’들이 하나 둘 씩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랄 옘병’을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던 진짜 환자들을 거리에서 보는 일이 그닥 신기한 일이 아닐 때였습니다.

1960대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미친 년(놈) 지랄 옘병하네’라는 말을 정신 줄 놓고 앓는 환자들에게 쓰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사는 놈년들이 비정상적,비상식적인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 욕을 퍼부었지 않았나 하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그런데 2017년 오늘 듣는 ‘염병하네’라는 말이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나 탄핵정국의 한국을 설명하는 말로 이리도 적합할 수 있는지 놀란 마음이랍니다.

‘미친 놈(년) 지랄 옘병’하는 형국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2017년에 말입니다.

그래 가치(value, 價値)의 혼돈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가치(value, 價値)’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 삶에 중요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새 장난감, 손전화에 대해

‘쓸데없이 고집만 쎄서….’ 내가 종종 아내에게 듣는 잔소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내가 그 말을 던지는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아내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내가 지적하는  ‘쓸데없는 고집’ 가운데 하나는 손전화(스마트폰 또는 핸드폰)없이 사는 내 삶이다. 이런 나를 골동품 취급하는 이들은 아내말고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골동품으로 여기든 촌놈으로 여기든 ‘쓸데없는 고집’으로 치부하든, 아내를 비롯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몫일 뿐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손전화를 전혀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십 수년 전 아직 스마트폰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 모두들 투박한 모양의 핸드폰들을 사용하던 시절에 한 일년여 손전화기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그만 전화기를 없앤 이후엔 손전화기와는 상관없이 살았다. 뭐 큰 이유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단지 편했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내 나이 또래 이상의 노인들 조차 스마트폰을 사용하는게 어색하기는커녕 당연한 세상이 되었어도 나는 그 물건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딴 이유없다. 그저 없이 지내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믿을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지언정 스마트폰은 없이 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편한 삶을 위해서였다.

아내에게 ‘고집세다’는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없이 살았던 내가 마침내 손전화(스마트폰)를 사서 손에 넣었다.

내가 개인컴퓨터(pc)로 사용하는 텔레그램 말고, 스마트폰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카카오톡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카톡도 pc버전이 있지만 아내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에이 할 수 없다’하고 하나 장만한 것이다.

이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고 지금 열공중이다. 나는 이 장난감을 가지고 전화를 주고 받는 일에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업종인 세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카톡 또는 sns등을 이용해 정보를 손쉽고 빠르게 전달해 주는 일이나, 언어문제로 순간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하는 내 늙으막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 함이다.

내 새 장난감으로 하여 아내의 잔소리 가운데 하나는 사라질런지…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