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 이메일 함에 놓여있는 편지 한장의 내용입니다.
“가령 말일세, 쇠로 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은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수도 없는 거야. 안에는 깊이 잠들어 있는 사람이 많아. 오래잖아 숨이 막혀 죽고 말 거야. 그러나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옮겨가기 때문에 빈사(瀕死)의 괴로움 따위는 느끼지 않아. 지금 자네가 큰 소리를 질러 다소 의식이 또렷한 몇 사람을 깨운다면, 이 불행한 몇 사람에게 결국 살아날 가망도 없이 임종의 괴로움만 주게 되지. 그래도 자네는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그러나 몇 사람이 깬다면 그 쇠로 된 방을 부술 희망이 전혀 없다고는 말 못하지 않는가?”
위 대화는 루쉰이 글쓰기를 주저하자 계몽잡지 편집자인 그의 친구가 그를 설득하며 나눈 대화입니다. 20세기 초 식민지 열강의 혼란 속에서 루쉰은 이렇게 그의 글을 통해서 잠든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국민들을 깨우는데 자신의 몫을 다하였습니다.
제가 촛불을 드는 이유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304명의 아이가 죽었는데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 희생자 가족을 국가가 폭력적으로 억압해도 침묵하는 사회…저는 이런 사회에서 살고 싶지 않기에 촛불을 듭니다.
제가 촛불을 든다고 루쉰 같은 영웅이 될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작은 촛불이 그 누군가에게 공동체를 생각하는 미세한 희망이 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새로운 촛불로 불타오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면, 그래서 공동체에 무관심한 이 단단한 쇠로 된 마음을 깨뜨릴 수만 있다면 저의 몫은 차고 넘치리라 생각합니다.
2016년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필라에서도 촛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인근 마을 필라델피아에서 벌써 다섯 번 째 촛불을 든다고 하는데, 저는 한번도 가보지를 못했습니다. 저는 누군가에게 작은 희망이 되리라는 생각도, 누군가에게 새로운 촛불을 들게 할 부추김도, 누군가의 단단한 마음을 녹이거나 깨뜨리려는 의도도 없답니다. 그렇다하여도 이 편지를 보낸 누군가의 소망에는 함께 하고 싶습니다.
언제 어느 때나 항상 새롭게 말을 건네시는 성서 속의 하나님께서 2016년 12월 31일 단지 짧은 시간일지언정 필라델피아 챌튼햄 한아름 앞에서 그들과 함께 외치라는 명령으로 받는답니다.
끝내 철들지 못하는 제가 이따금 사랑스럽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