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편 대신 만두를 조금 빚었다. 솔직히 ‘송편 대신’이라는 말은 애초 가당치 않은 수사이다. 아무리 미국사람 다되어 산다하지만 노인들이 계시고, 그래도 명색이 추석인데 덕담 한마디로 넘어가기엔 예가 아니다싶어 만두를 빚게되었다.
“어제 막내네가 필라에 장보러 간다고해서 따라갔는데 파는 송편도 없더구나. 다 팔린건지…. 찾는 사람이 없는건지…. 이젠 추석도 없나보다.” 만두를 들고 찾아간 내게 어머니가 건넨 말씀이다. 노모는 손수 만들지는 못할망정 사서라도 송편 몇 점 아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의 추석이 그렇게 지나간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날씨만큼은 내 어릴적 추석날 같다. 창문을 여니 벌레소리가 벌써 가을이다.
무심코 손에 든 책이 아주 오래 전 것이다. <성서와 인간> – 1972년도이니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나온 책이다. 그해 외할머니께서는 내게 손수 한복을 지어 주셨다. 나는 그 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들어 온 대목이다.
“돌이켜 우리는 혼란을 거듭하는 조국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조국의 발전의 길은 지도층의 영웅화를 배제하고 대중이 참되게 계발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일석이조에 이와 같은 과업이 완수될 수는 없지만, 질서화를 위해 암중모색한 소크라테스의 인생관과 그의 논리성은 곧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위 아테네의 영웅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궤변의 논리’를 앞세우는 특권층을 ‘성실의 논리’로 막아냈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매한 대중에 의해 사형당한 아테네의 선량한 평민이었다.”
예전 숭실대 총장을 지내신 조요한(趙要翰)선생님의 글이다. 글제목이 < 혼란과 질서 – 궤변론자들과 소크라테스>이다.
변한 추석풍경과 다르게 여전한 ‘궤변의 논리’들이 무성한 한반도 뉴스들이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성실의 논리’들은 더욱 거세게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는 생각으로 넉넉한 한가위 저녁을 물린다.
따져보니 그 무렵 한복 지으시던 외할머니가 이고 있던 세월의 짐을 내가 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