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와 동양인들
반이민정책을 내세워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도널트 프럼프가 세번 결혼했으며, 영화배우였던 두번째 부인 Marla Maples 를 빼고, 나머지 두 부인들이 이민 1세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첫번째 부인인 Ivana Marie는 스키선수 출신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현재 부인이자 세번째인 Melania는 모델 출신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온 이민자이다. 이즈음 Melania가 불법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정착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와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트럼프측은 부인 Melania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 이민을 왔다는 증거들을 찾아 내놓고 있으나, 그 증거들에 의문을 보내는 비판자들의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뉴스를 타고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일이 비단 오늘에만 있는 일도 아니고, 트럼프만이 반이민정책을 내세웠던 것만이 아니다. 다만 트럼프 경우는 이민정책 뿐만 아니라 다른 구호성 정책이나 그의 삶의 방식 등에 일관성이 많이 결여된 것 같은 내 나름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약 한세기 이전에도 이민자들은 미국이 안고 있던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신천지 미국으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건너서 오는 유럽계 이민자들은 동부 뉴욕에 있는 Ellis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 땅을 밟았다.
반면에 태평양을 건너서 오는 중국인들, 일본인들과 시베리아쪽에서 오는 러시아인들은 서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Angel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에 들어왔다. Angel Island 곧 천사의 섬이다.
얼핏 지역적으로 동쪽과 서쪽이라는 차이 뿐인 것 같지만 그 입국절차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로 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은 비교적 빠르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신천지 땅을 밟을 수 있었으나, 천사의 섬으로 들어온 아시안계 이민자들 특히 중국인들은 입국수속이라기 보다 감금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만한 수용소 생활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들은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거의 이년여에 이르기 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시안계 인종차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첫번 째 대상자들은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중국 본토까지 알려졌던 서부의 골드러시 소식에 황금빛 꿈을 그리며 미국행을 결심한 중국인들이나 서부개척에 노동력이 절실했던 미국 입장에서 중국인들의 미국이민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입국절차에서 황인들은 백인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미국 땅을 밟은 중국인들은 대륙횡단철도 건설노동현장의 주역이 되었다. 철도건설 이후인 1880년 무렵에 이르러 미국은 불경기를 맞는다. 이때 미국인들 사이에는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경기가 나빠졌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1882년 의회는 중국인들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 시킨다. 2016년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백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또 다른 아시안계 이민자들이 있다. 일본인들이다. 일본계들은 중국계와는 다르게 미국사회에 많이 동화되었고 뿌리도 깊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년 동안 캘리포니아 등지의 사막지대 수용소에서 감금되어 살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1942년 2월 19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한다. 이 명령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약 12만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단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몰수 당한 채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 사막지대나 외진 곳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얼핏 미국과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들을 국가 안전상 강제 수용한 것처럼 정당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대다수 당시 일본계 이민자들은 이민 2,3,4세대들로써 이민자라기 보다는 미국에 동화된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명령은 당시 미국 헌법 및 국제법에 반하는 명백히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였다. 훗날 미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이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에서 낳고 자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3, 4년 동안 강제 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되찾지 못하는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이 땅에서 살아갈 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반도 뉴스에 귀기울이곤하는 내 모습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샌프란시스코 일본인촌과 중국인촌은 그렇게 미국땅에 뿌리 내리게된 일본계와 중국계 미국인들의 역사였다.
우리는 일본인촌 식당가에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중국인촌 금문제과점(Golden Gate Bakery) 앞에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반시간 가까이 인내심을 발휘했던 하나아빠의 노고로 우리는 중국 호떡과 빵을 누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케이블 카를 타보아야 한다고해서 그 맛도 보았다.
부두가에서 해물찜을 놓고 한잔하는 맛도 일품이었고
거리악사에게 음악 감상료를 놓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비록 암표장사 같을지라도 그 밤 부두가 거리악사는 색스폰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며 여행의 맛을 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