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시간의 향기> – 삶에 있어서 머무름, 기다림, 느긋함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이 담긴 책이름이다.

‘사색적인 삶이 풍요롭다.’라는 명제는 멋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삶’이 시간에 늘 쫓겨 살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물인 내겐 애초 가당치 않는 전제이므로 ‘풍요’ 역시 내가 누릴 몫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사색적인 삶’이란 진짜 가당치 않은 지적 사치일 뿐이다.

딸아이가 모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기다리는 버스가 한시간 반여 늦게 도착하였다. 계획에 없이 딸아이와 함께 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의 직장생활과 향후 계획,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을 묻고 들으며 버스가 늦어지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아내는 때론 아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도대체 닮은 게 무엇이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니와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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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하는 말이다.

내가 딸아이가 타고 갈 버스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자유를 생각한 까닭이다.

기차여행 – 14

요세미티 숲길을 걸어…

요세미티는 엄청난 위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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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택한 진입로인 Tioga Pass 도로는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길이 폐쇄된다고 한다. 눈 때문이란다. 엄청난 위용으로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Tioga Peak의 높이는 고도 11,526ft(3513m)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운전대 옆으로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오금 저리는 절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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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9945ft(3031m)지점에 이르러서야 공원 입장권을 구입하는 입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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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upine Flat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숲길을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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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언덕길 아니면 고작 펜실베니아 Pocono 산(2,133 ft ,650 m) 정도, 그것도 길어야  1마일 정도 걸어본 경험이 전무인 우리들에게 조금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기억컨데 설악산을 마지막으로 오른 이후 산행은 처음이니, 약 35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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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왕복 8.8마일(약 14km) 거리를 걷기로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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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평균고도 8000ft(2440m)라는 고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나이와 평소 소홀했던 운동 탓이었다.

우리는 왕복 4.4마일(약 7km) 거리인 Indian Rock을 오가는 것으로 급히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 수정은 아주 적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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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걸으며 나는 그즈음 가슴 깊은 곳을 짓눌러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주던 내 쓰잘데 없는 걱정거리들을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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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천둥번개는 하산길 도로 곳곳에 낙석을 깔아 놓았다.

비가 개인 후, 요세미티를 등진 하늘 끝에는 무지개가 파스텔화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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