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그리고 한울
열차는 어둠이 덮힌 네브라스카 대평원을 달린다. 스쳐 지나가는 역마다 안내를 해주던 안내방송도 끊겼다. 어둠속을 달리는 기차안에서 승객들이 편안한 잠을 잘수 있도록하기 위한 배려이다.
나는 Omaha시를 지난 후에야 잠을 청했다. Omaha는 내 아들녀석이 4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모두가 내 욕심 탓이었다. 욕심은 아이 이름을 너무 버겁게 지을 때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한울이라는 이름이 너무 무거웠는지 아이는 좀 늦되게 컷다. 제 자식 착하다하지 않을 애비가 어디 있겠느냐만 아이는 정말 착했다. 아니 지금도 착하다.
다만 아이는 느렸다. 게다가 덩치는 애비의 두배나 되는 녀석이 마음이 너무 여렸다. 중학교까지는 그럭저럭 나무랄 수 없을 정도로 성적표를 받아오더니만,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여러 차례 아내와 나는 학교의 부름을 받곤 했다. 그렇다고 무슨 사고를 치는 것은 아니었고 느려서 다른 아이들을 쫓아가지 못하는 것이었다. 겨우겨우 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나마 대입학력고사인 SAT 성적은 그리 나쁘지 않아 맘먹고 찾아나서면 갈만한 대학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 때 또 다시 내 욕심이 발동하였다. 아이에게 군대를 권한 것이었다. “지금 네 상태로 아무 대학이나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군대를 다녀 오는게 어떠냐?” 내 권유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가 다 내 핑계이지만, 아이가 좀 단단해 졌으면 하는 바램이었다.
착한 아들은 내 말에 순종했다. 아들녀석은 텍사스에서 훈련을 받고 네브라스카 오마하로 배속받아 4년을 근무하였다. 당시는 이라크 파병 숫자가 가장 많을 때여서 가슴을 졸이기도 했다. 몇주 만에 훈련생활을 끝낸 아이를 텍사스에서 만났을 때 내 느낌은 “아이고, 내 욕심이었구나” 였다.
다행히도 아이는 4년 동안 오마하 군생활을 마치고 돌와왔다. 아이의 군 제대를 앞두고 내 욕심은 또 다시 발동했었다. “얘야! 그냥 군생활을 계속하는게 너에게 좋을 것 같은데….” 녀석은 그 때 처음으로 내 말을 끊었다. “아빠! 아빠는 군대가 얼마나 나쁜덴 줄 몰라! 난 제대할거야!”
그렇게 아들녀석이 자신의 황금시간을 보낸 곳 오마하를 지나며 난 잠이 들수가 없었다.
제대후 녀석은 대학을 마치고 일자리를 얻었다. 박봉이지만 자기처럼 늦된 아이들을 돌보는 social worker로 일을 재밌어 한다. 그런데 좀처럼 집을 나가려 하지 않았다. 여섯 살 아래 제 동생이 하는 “오빤 나이 스물 넘은지가 언젠데…”하는 비웃음을 못들은체 하면서까지 좀체 나가서 살려하지 않았다.
그런 녀석이 어느날 부터인가 늦게 들어오기 시작했고, 우리 내외의 말에 건성건성 대답하기 시작하더니 대답과 다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녀석에게 여자가 생겼다. 어느날인가 얼굴 까만 여자 아이와 아들 녀석이 함께 있었고, 얼마 지나지않아 두 아이는 “우리 결혼해요!”라며 우리 부부에게 다가왔다.
나는 많이 아파했다. 처음엔 아이가 내게 만들어준 아픔이라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아픔은 내 욕심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픔의 크기는 커져갔다.
“여기서 아이들을 키우는 부모가 아이들의 배우자를 얼굴 색깔로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며 왈 진보연하며 살아온 내 자신의 모습이 거짓임을 알게 되면서 느끼는 아픔이었다.
얼굴 까만 여자아이는 내 아들녀석을 더 이상 한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냥 Han 이다.
그렇게 오마하를 지나 기차는 달렸다.
나는 새벽녘에 지평선 넘어 떠오르는 해와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오마하를 지나 자정이 넘어서도 잠을 이루지를 못했다.
여행이 끝난 후 하나엄마는 하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 주었다. “여행중에 제가 찍은 사진들을 보니까요, 하늘을 그렇게 많이 찍었더라고요. 내가 왜 이렇게 하늘을 많이 찍었을까? 하고 곰곰 생각해 보니까요, 평소에 바쁘다고 하늘 쳐다보는 일이 없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아름다운 하늘들이 매일 매일 내 앞에 있었을텐데요….”
언제가 나는 얼굴 까만아이에게 말할 것이다. Han이 아니라 한울이라고 부르라고. 비록 또 다시 내 욕심일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