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하루해가 저물고 또 새로운 날이 시작될 시간입니다. 오늘은 아버지 날이었습니다. 어제는 우리 부부가 해로(偕老)한지 만 서른 세해가 되는 날이었습니다. 결혼 이전에 연애기간이 오년이요, 한동네에서 자라 얼굴안지는 그 이전의 일이니 족히 사십 수년은 제 곁에 아내가 있었던 셈입니다.

우리 부부의 33주년 결혼기념일은 아들녀석의 느닷없는 결혼선언으로 엉망이 되어버렸지만, 그 또한 삶의 과정이겠거니 하며 두아이들(아들 녀석과 녀석이 말하는 피앙새)과 시간을 보낸 후, 진짜 늙으신(이미 늙은 내가 늙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을 보면, 아마 구순 팔순이어도 마찬가지 아닐까하는 생각으로 내 입장에서) 두 아버님들(친아버지와 장인)께 그저 치레인사를 드리고 지냈답니다.

그리고 오늘 혼자 지내는 딸아이를 보러 뉴욕 나들이를 했었답니다.

그저 키우는 재미는 딸아이 같습니다. 비록 말없는 아이여도 말입니다.

맨하턴에는 셀수 없을 만큼 나들이를 하였지만 이른바 9.11 테러가 사건이 일어났던 곳에는 가 본 적이 없었는데, 그 까닭은 웬지 보면 아플 것 같아서 였답니다.

오늘 딸아이가 “아빠, 어디 갈래?”하며 던진 물음에 제가 한 응답이 “Ground Zero 한번 가볼까?”해서 나섰던 걸음이었답니다.20160619_143745

그 날을 생생히 기억한답니다. 그리고 이어진 애국주의와 그 이후 오늘의 미국을….

그리고 늦은 밤. 시골 제 집으로 돌아와 하워드 진(Howard Zinn)이 한 말을 곱씹습니다.

이 나라의 모든 국민이 향유하는 공통된 이익이라는 환상을 만들어내는 데 애국주의가 이용됩니다. 국민은 소속된 계급에 따라 이해관계가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애국주의는 공통된 이익을 지향합니다.

국기가 그런 공통된 이익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애국주의는 정부가 흔히 동원하는 그럴듯한 단어와 똑 같은 역할을 하면서 공통된 이익이라는 착각을 조장합니다.

예컨대 ‘국가안보(national security)’라는 단어는 모국을 위한 안전은 하나밖에 없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킵니다.

‘국익(national interest)’이라는 단어는 모두를 위한 이익은 하나뿐이라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국방(national defense)’이란 단어는 우리 모두를 똑같이 지켜주는 것처럼 사용됩니다.

결국 애국주의는 모두에게 균등한 이익을 결코 보장해 줄 수 없음에도 그럴듯한 명분으로 국민을 옭아매는 단어입니다.

개인적 삶이나 공동체적 삶이나 구호란 참 공허합니다.

하여 어떤 세상이어도 가족은 구호가 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