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빠져있는 일이 있어 온종일 컴퓨터 화면과 자판에 매달려 보냈습니다. 다루면 다룰수록 컴퓨터란 대단한 물건입니다.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넣어주면(input, 입력) 넣어주는대로 척척 답을 내놓습니다.(output, 출력)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그렇지요,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배운대로(머리 속에 입력되는 대로) 사고하고, 행하기(출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컴퓨터와 다른 점은 꼭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녁 나절 밀린 뉴스들을 훑다보니 컴퓨터처럼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합니다. 사람들을 컴퓨터처럼 만들려는 세력의 힘도 너무 커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제게 “아니요! 사람은 다릅니다!!”라고 가르쳐 주는 신영복선생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접습니다.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한 평강공주의 결단과 주체적 삶에는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감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달설화가 당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한 농촌청년의 우직한 충절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강공주와 함께 온달산성을 걷는 동안 내내 ‘능력있고 편하게 해줄 사람’을 찾는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신데렐라의 꿈’ 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 안타까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한함’ 그것도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 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 들지 않는 물입니다.
– 신영복선생님의 < 나무야 나무야 >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