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를 생각함

며칠 전에 오마이뉴스에 <아! 이게 바로 ‘핑크빛 천지개벽’>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었습니다. 대구 비슬산을 분홍빛으로 바꾸어 놓은 진달래천지를 소개한 기사였습니다.(기사보기)

기사에 덧붙여 있는 사진 한장에 매료되어, 오늘 아침에 편지 한장 써서 제 가게 손님들에게 띄었답니다. 편지를 받은 몇 분들께서 좋다고하셔서 여기에도 올려봅니다. (한글번역은 아래에)


While I was reading the on-line edition of a Korean newspaper the other day, one picture captured my attention, and made me look at it for a while. It was this picture which showed the pink colored mountain with flow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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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lowers which changed the color of the mountain into pink are azaleas. In April every year, the flowers can be commonly seen anywhere in the Korean peninsula. They automatically remind me of my hometown where I grew up.

In Korea, it has another name, “Cham-ggot (참꽃),” in addition to an azalea. Its meaning is a “real flower.” Did you say that if there is a “real flower,” there must be a “fake flower”? You are right. There is a “fake flower,” too. They are royal azaleas (Rhododendron schlippenbachii), the name of which are “Chul-zzook (철쭉)” in Korea.

At first glance, azaleas seem to look the same as royal azaleas. However, azaleas are edible, but royal azaleas are not. Korea people make cakes and wines with azalea flowers. The pictures below are those cakes and wi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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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n’t it interesting that people in the old days set the edibility as the criteria between “real” and “fake”?

The appearance of the pink-colored mountain seems to have not changed at all from the sight which I saw in my youth, even though a countless number of things have changed since I left Korea. That was the reason why I looked at the picture for long.

As I fell into the thoughts about ‘things changed’ and ‘things unchanged,’ my mind moved into thoughts about ‘things that should not have changed, but changed’ and ‘things that should have changed, but have not changed.’

It is the last week of April and the feeling of spring pervades every corner around us.

I wish that your life will be filled with things that are good because they have changed and things that are good because they have not changed this week and beyond.


며칠 전 한국에서 발행되는 온라인 신문을 보다가 사진 한장에 사로잡혀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답니다. 온통 분홍색으로 변한 산을 담은 바로 이 사진이랍니다.

산을 분홍빛으로 바꾸어 놓은 이 꽃 이름은 진달래랍니다. 해마다 4월이면 한반도 어느 곳에서나 아주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랍니다. 제가 자랐던 고향 생각을 절로 나게 하는 꽃이랍니다.

한국에서는 이 꽃을 진달래라는 이름 말고도 참꽃 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진짜 꽃”이라는 뜻이랍니다. ‘진짜 꽃’이 있으면 ‘가짜 꽃’도 있겠다고요? 그렇답니다. 가짜 꽃도 있답니다. 바로 royal azalea(Rhododendron schlippenbachii)인데 철쭉이라고 부르는 꽃입니다.

철쭉과 진달래는 얼핏 보면 비슷하게 생겼답니다. 그런데 진달래는 사람들이 먹는 꽃이고, 철쭉은 먹지 못하는 꽃이랍니다.  한국인들은 진달래꽃으로 떡을 만들어 먹기도 하고, 술을 담아 먹기도 한답니다. 사진은 바로 진달래꽃으로 만든 떡과 술이랍니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기준을 먹을 수 있느냐, 없느냐에 둔 옛날 사람들의 생각이 재미있지 않는지요?

온통 분홍빛으로 변한 모습은 예전에 제 어린 시절과 전혀 변함이 없었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았을 때와 지금 사이에 변한 것들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말입니다. 그래서 한참동안 사진을 들어다보게 되었답니다.

‘변한 것들’과 ‘변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생각에 빠져들다보니, ‘변해야 좋은데 변하지 않은 것들’과  ‘변하지 말아야 하는데 변한 것들’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답니다.

온천지에 봄기운이 가득한 4월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변해서 좋은 것들과 변하지 않아서 좋은 것들로 충만한 한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주일아침, 세월호 그리고 시

사람들이 내세웠던 일반적인 예상과는 사뭇 다른 한국 총선 결과를 두고 입달린 이들의 말들이 차고 넘칩니다. 그 며칠 사이에 전해오는 뉴스들의 논조도 많이 바뀌어졌습니다.

이대로 사그러질 것만 같았던 세월호 이야기가 마침 2주기에 맞물려 상당 지면을 차지하고 있음도 그 바뀐 정황 때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론 남쪽의 조선을 자임하는 조선일보 등의 철저한 외면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뉴스를 훑던 눈으로 성서를 들고 성서에게 묻습니다. 마침 주일 아침인 까닭입니다.

성서 구약에 있는 시편 22편입니다.(알기쉽게 번역한 공동번역 개정판으로 읽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 – 22편 1-2절

<나는 사람도 아닌 구더기,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나를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댑니다. “야훼를 믿었으니 구해 주겠지. 마음에 들었으니, 건져주시겠지.”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주신 분, 날 때부터 이 몸은 당신께 맡겨진 몸, 당신은 모태에서부터 나의 하느님이시오니 멀리하지 마옵소서. 어려움이 닥쳤는데 도와줄 자 없사옵니다.> -6-11절

<칼에 맞아 죽지 않게 이 목숨 건져주시고 하나밖에 없는 목숨, 개 입에서 빼내 주소서. 가련한 이 몸을 사자 입에서 살려주시고, 들소 뿔에 받히지 않게 보호하소서. > – 20-21절

시편 22편은 까닭도 모른채 덮쳐온 고통과 고난속에서 신음하며 괴로워하는 이들이, 이웃들의 멸시와 조롱에 시달리기까지 하는 상황에서 구원의 손길을 부르짖는 소리들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 소리 가운데서 지난 두해동안 세월호 유가족들과 그들과 함께 하려고 애썻던 이들이 부르짖던 소리를 듣습니다. 또한 그 세월 동안 부르짖는 소리들을 의도적으로 묵살하고 외면했던 이들의 모습들도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아무런 상관없이 무심히 자신들의 일상에 충실하며 살아가는 대다수 사람들을 떠올립니다. 거의 제 모습입니다.

시편 22편은 울부짖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끝내 이루어질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나아가 확신에 찬 믿음으로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시고 구원해 주시는 야훼 하나님을 고백하는 소리를 전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옥좌에 앉으신 거룩하신 분, 이스라엘이 찬양하는 분, 우리 선조들은 당신을 믿었고 믿었기에 그들은 구하심을 받았습니다. 당신께 부르짖어 죽음을 면하고 당신을 믿고서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 3-4절

<내가 괴로워 울부짖을 때 ‘귀찮다, 성가시다.’ 외면하지 않으시고 탄원하는 소리 들어주셨다.> – 24절

울부짖음과 구원 사이에 어떤 이야기도 담고 있지 않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주고 받는 값이 없습니다. 울부짖음이 있는 현장에 야훼 하나님의 구원이 있습니다. 이른바 무상성(無償性)이요, 조건없음입니다.

그러나 시편 22편은 때론 공허하기만 합니다.

현실은 여전히 울부짖는 소리만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광화문 광장에 일만이 아닌 백만이 넘쳐나도 여전히 “세상에서 천더기, 사람들의 조롱거리,  사람마다 그들을 보고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빈정”거리는 세상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고한 자들이 당하는 고통과 고난이 여전히 이어지는 세상을 향해 시편 22편이 던지는 맺음말은 이렇습니다.

<당신의 이름을 겨레에게 알리고 예배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리니,  “야훼를 경외하는 사람들아, 찬미하여라. 야곱의 후손들아, 주께 영광 돌려라. 이스라엘의 후손들아, 모두 다 조아려라.> 22-23절

<온 세상이 야훼를 생각하여 돌아오고 만백성 모든 가문이 그 앞에 경배하리니, 만방을 다스리시는 이 왕권이 야훼께 있으리라. 땅 속의 기름진 자들도 그 앞에 엎드리고 먼지 속에 내려간 자들도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리라. 이 몸은 주님 덕분에 살고, 오고오는 후손들이 그를 섬기며 그 이름을 세세대대로 전하리라. 주께서 건져주신 이 모든 일들을 오고오는 세대에 일러주리라.>

바로 신앙이요, 믿음입니다.

지금 울부짖는 소리(사람)들과 함께 구원의 소망이 이루어질 것임을 믿고, 그들과 함께 손잡고 확신에 찬 구원의 기쁨을 외치라는 맺음구입니다.

다시한번 믿음이요, 신앙입니다.

여전히 진실을 향한 애타는 소리들과 고통을 벗어나고자하는 애달픈 소리들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한낱 어리석은 소리로 들릴수도 있는 맺음구입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앙이요, 믿음이라고 성서는 다시 다잡아 일러줍니다.

<멸망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이치가 한낱 어리석은 생각에 불과하지만 구원받을 우리에게는 곧 하느님의 힘입니다. – 고린도전서 1장 18절>라고 말입니다.

주일 아침, 신경림 시인의 시를 성서의 눈으로 다시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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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고 우리는 너희를 멀리 보낼 수가 없다

  • 신경림

아무도 우리는 너희 맑고 밝은 영혼들이
춥고 어두운 물속에 갇혀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밤마다 별들이 우릴 찾아와 속삭이지 않느냐
몰랐더냐고 진실로 몰랐더냐고
우리가 살아온 세상이 이토록 허술했다는 걸
우리가 만들어온 세상이 이렇게 바르지 못했다는 걸
우리가 꿈꾸어온 세상이 이토록 거짓으로 차 있었다는 걸
밤마다 바람이 창문을 찾아와 말하지 않더냐
슬퍼만 하지 말라고
눈물과 통곡도 힘이 되게 하라고
올해도 사월은 다시 오고
아름다운 너희 눈물로 꽃이 핀다
너희 재잘거림을 흉내내어 새들도 지저귄다
아무도 우리는 너희가 우리 곁을 떠나
아주 먼 나라로 갔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바로 우리 곁에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뜨거운 열망으로 비는 것을 어찌 모르랴
우리가 살아갈 세상을 보다 알차게
우리가 만들어갈 세상을 보다 바르게
우리가 꿈꾸어갈 세상을 보다 참되게
언제나 우리 곁에 있을 아름다운 영혼들아
별처럼 우리를 이끌어 줄 참된 친구들아
추위와 통곡을 이겨내고 다시 꽃이 피게 한
진정으로 이 땅의 큰 사랑아

‘불편함’속에 희망이…

이즈음 빠져있는 일이 있어 온종일 컴퓨터 화면과 자판에 매달려 보냈습니다. 다루면 다룰수록 컴퓨터란 대단한 물건입니다.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넣어주면(input, 입력) 넣어주는대로 척척 답을 내놓습니다.(output, 출력)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그렇지요,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 말입니다.

보통 사람들도 그렇지요. 일반적으로 배운대로(머리 속에 입력되는 대로) 사고하고, 행하기(출력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컴퓨터와 다른 점은 꼭 짜여진 프로그램에 따라서만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저녁 나절 밀린 뉴스들을 훑다보니 컴퓨터처럼 사는 사람들이 참 많은 듯합니다. 사람들을 컴퓨터처럼 만들려는 세력의 힘도 너무 커보이기도 하고요.

그런 제게 “아니요! 사람은 다릅니다!!”라고 가르쳐 주는 신영복선생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접습니다.


 

shin y. b.

완고한 신분의 벽을 뛰어넘어 미천한 출신의 바보 온달을 선택하고 드디어 용맹한 장수로 일어서게 한 평강공주의 결단과 주체적 삶에는 민중들의 소망과 언어가 감겨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온달설화가 당대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매몰된 한 농촌청년의 우직한 충절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 까닭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가능성은 이처럼 과거를 뛰어넘고 사회의 벽을 뛰어넘어 드디어 자기를 뛰어넘는 비약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평강공주와 함께 온달산성을 걷는 동안 내내 ‘능력있고 편하게 해줄 사람’을 찾는 당신이 생각났습니다. ‘신데렐라의 꿈’ 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당신이 안타까웠습니다.

현대사회에서 평가되는 능력이란 인간적 품성이 도외시된 ‘경쟁적 능력’입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낙오와 좌절 이후에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한마디로 숨겨진 칼처럼 매우 비정한 것입니다.

그러한 능력의 품속에 안주하려는 우리의 소망이 과연 어떤 실상을 갖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기억할 것입니다.

세상사람은 현명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당신이 먼저 말했습니다. 현명한 사람은 자기를 세상에 잘 맞추는 사람인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그야말로 어리석게도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세상은 이런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으로 인하여 조금씩 나은 것으로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직한 어리석음, 그것이 곧 지혜와 현명함의 바탕이고 내용입니다.

‘편한함’ 그것도 경계해야할 대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편안함은 흐르지 않는 강물이기 때문입니다.

‘불편함’은 흐르는 강물입니다. 흐르는 강물은 수 많은 소리와 풍경을 그 속에 담고 있는 추억의 물이며 어딘가를 희망하는 잠 들지 않는 물입니다.

– 신영복선생님의 < 나무야 나무야 > 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