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미니 슈퍼 화요일 경선을 고비로 미국 대통령선거 레이스도 종반으로 접어드는 모습입니다. 공화당의 트럼프와 민주당의 클린턴으로 각당의 후보가 압축되는 듯합니다. 그러나 오늘자 US Today는 아직 게임이 끝난게 아니라는 보도를 하고 있습니다.
“공화당은 숫자 계산 때문에, 민주당은 공약 때문에 이 레이스는 한동안 계속 이어질 것이다. This is going to take a while — for Republicans because of math and for Democrats because of message.” 라는 분석보도는 사뭇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비록 어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오하이오 주에서 이 지역 주지사인 존 케이식 후보에게 패배한 트럼프는 후보 지명에 필요한 대의원 과반숫자인 매직넘버 1237명을 확보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현재 추세대로라면 크게 문제 될 것 없을 듯 한데, 그를 반기지 않는 공화당 주류들이나 반대론자들은 오는 7월 Cleveland에서 열리는 공화당 중재전당대회로 이어지기를 희망하는 듯합니다.
민주당은 힐러리로 굳혀져가는 모양새이지만 버니 샌더스의 지지층들이 워낙 강고한 결속력을 보이고 있어 이 둘 사이에 각종 정책현안들에 대한 이견을 어떻게 좁혀 나갈 것이냐는 문제가 남아 있다는 분석입니다. 공화당과는 달리 슈퍼 대의원제도가 있거니와 그 슈퍼 대의원 숫자에서 일방적으로 밀리고 있는 샌더스가 후보 지명권을 획득하기엔 아무래도 무리일 듯합니다만 결속력 강한 샌더스의 지지자들을 끌어들일만한 정책의 변화가 요구된다는 것입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샌더스의 모험을 실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미국을 위해 좋겠다는 생각이 있기는 하지만, 이미 많은 부분에서 샌더스의 영향 아래 놓여있는 클린턴이 안정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적임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 문제를 풀어가는 면에 있어서 현재 양당을 통틀어 모든 후보자들 가운데 가장 적임자가 아닐까하는 측면에서도 클린턴 지지를 하고 있답니다.
클린턴 지지에 앞서 절대 되어서는 안되겠다싶은 인물이 트럼프입니다. 샌더스보다 더욱 호불호가 강한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만, 이민 일세로 이 땅을 살아가는 저같은 사람에게는 기피대상 일호입니다. 특히 그가 종교를 앞세워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증오대상을 적시하여 표적화하고 시민들의 현실 불만과 채워지지 못한 욕구가 마치 그가 만들어 놓은 증오대상들 때문에 일어난 것처럼 호도하는 정치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원론적인 이유에 앞서 자칫 그가 증오대상으로 쳐놓은 그물에는 내 아이들과 후대들이 걸려들 가능성도 있겠다는 염려는 지극히 현실적인 것입니다.
힐러리의 후보 지명과 당선 보다는 트럼프의 대권 꿈을 막아내는 것이 유권자로서 제 몫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는 이즈음이랍니다.
한국 역시 총선을 코앞에 둔 선거정국입니다. 이민 온후 인터넷으로 세상이 연결되기 전, 십 수년 동안 한국내 뉴스들 특히 정치뉴스는 접할 기회가 없어 거의 잊고 지냈지만, 이젠 안 보려고 하여도 눈앞에 펼쳐지는 게 그 곳 뉴스들입니다.
그러나 떠나온지도 워낙 오래전 일이거니와 선거권 조차 없는 사람이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듯하여 비록 생각이 있다하여도 말하지 않는게 좋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다 요 며칠 사이 뉴스에 자주 오른 두 인물 곧 이해찬과 정청래 기사를 보며 한마디 해보고 싶어 몇 자 적어 본답니다.
제가 한국 뉴스를 실시간으로 볼 수 있게 되었던 무렵 낯설게 다가왔던 직업군들 가운데 하나가 이른바 “정치 평론가”라는 직업이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몇 번 듣다가 “아! 저러고도 먹고 살 수도 있는 세상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을 해 본 때가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여러 평론가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는 편은 아닙니다만 그렇게 처음 몇번 듣다가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인물들 가운데 고성국과 이철희가 있습니다. 사실 이들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제가 들어 본) 평론가들의 논점은 아주 간단합니다. 바로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입니다.
이네들은 (특히 진보연하는 이들) 우선 논평의 대상을 양비(兩非)의 잣대로 재단해서 올려 놓습니다. 그리곤 이기는 놈이 옳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칩니다.
어찌보면 이런 재단과 주장은 정치평론가들만의 것만이 아니라 이즈음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이끌어가는 모든 영역의 이른바 식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도구가 아닌가 합니다.
이야기 폭이 넓어지고 길이가 길어지기 전에 이해찬과 정청래로 마치려고 합니다. 두 인물 모두 소속된 정당 공천에서 배제되었고, 이해찬은 해당 정당을 나와 무소속으로 선거에 나서고, 정청래는 당의 결정에 따르기로 하고 백의종군하겠다는 뉴스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의 결정을 보며 “둘 다 모두 옳은 판단을 하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답니다. 이 둘은 모두 한국사회에 만연되어 팽배한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암묵적 시대정신에 “아니오”라고 반기를 든 것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소속한(했던) 정당의 대표인 김종인은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로 이들을 배제 시켰습니다.
이해찬은 이러한 배제논리를 절차와 명분을 무시하고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고 우기는 “불의”라고 규정하고 평생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불의와 싸우겠다고 언명하였습니다.
반면 정청래는 “비록 당 지도부가 자신을 버렸지만 자신은 당을 버릴 수 없다”며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논리로 자기 이익에 따라 소속당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세태에 일침을 가하며, 지는 것 같지만 이길 수도 있다는 새로운 도전을 하였습니다.
이해찬이 규정한 불의와 맞서 이길런지, 정청래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할런지 그 결과는 모를 일입니다.
결과야 어떻든, 두 사람의 선택을 보며 공자선생께서 말씀하신 정명(正名)을 떠올려보는 것입니다. 정치인이 정치인다운 모습 말입니다.
그 보다 더 모를 일들은 넘쳐납니다. 제가 트럼프 치하의 미국에서 살 수도 있을 터이고, 이해찬과 정청래가 실패한 사회에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한국인들이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트럼프를 구원자와 구세주로 여기며 오늘도 환호하는 미국인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은 것처럼, 정치술사들과 식자들의 놀음에 빠져 오늘도 지역타령으로 날을 지새며 ‘이기는 놈이 장땡’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한국인들의 숫자 역시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사족>
수 년전에 사십년 가까이 벗 삼아오던 담배와 헤어진 이후, 사십년 넘게 소주 – 하드리커 – 와인으로 변하며 제 곁에서 함께 했던 술과도 최근에 헤어졌답니다. 반주 삼아 마시던 와인조차 끊어 버렸답니다. 헤어진 몇 가지 이유들이 있는데 그 중 으뜸은 ‘가는 날 깨끗하게 떠나는’ 준비를 해야 할 나이에 들어섰다는 생각이었답니다.
우리 또래 한국 정치인들 가운데 가장 올곧게 정명(正名)의 길을 걸어 온 것처럼 생각되어지는 이해찬의 새로운 도전이 성공하기를 비는 마음으로 올들어 금주로 절약한 돈이나마 후원하려고 합니다.
이제 정치인다운 정치인의 길로 들어서는 정청래를 후원하는 날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