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혁명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4월 혁명

<미완(未完)의 혁명(革命)>이라고도 불리는 4월 혁명은  4.19 학생운동, 4.19 민주혁명, 4.19 의거, 4월 의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의 시각(視角)이나 관점(觀點)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4월 혁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는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엔 4월 혁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혁명,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를 출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으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4월 19일이 절정을 이루었다 하여 <4.19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4월 혁명의 원인은 대략 이런 것이다.

원인의 근본은 원조경제(援助經濟) 위기서 싹튼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접어 두고, 4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승만 1인 독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었다. 특히,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진 자유당은 관권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렇게 조작되어 처리된 3월 15일의 선거 결과, 결국은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산을 비롯해 전국 각처에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란 위에 설명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권 사이에 끼어 있던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한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집권기간(期間)은 다른 어느 대통령들의 재임기간보다도 훨씬 길었다.

제1대 이후 지금까지 11명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70년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5,16 군정 포함) 두 사람이 집권한 기간은 30년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12년이고, 박정희의 군정과 공화당이 18년이다.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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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 제목인 <4월 혁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친 김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성명과 재임기간도 적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적었다.

그러한 <창씨개명>이란 한국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1940년에 일제(日帝)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강제(强制)로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어 짓도록 한 것이다.

♦  내선일체(內鮮一體)란 1937년에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내(內)는 그들이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말인‘내지(內地)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이고, 선(鮮)은 조선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말하자면, 內鮮一體란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다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에 설명한 ‘內鮮一體’뿐만 아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것이며, 같은 조상(祖上)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동근동조(同根同祖))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그러한 당찮은 말을 만들어 내놓은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짓을 했던 것인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강요(强要)한 창씨 개명도 그런 맥락(脈絡)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데 앞에 적은 것처럼 박정희, 최규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도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창씨개명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8.15 광복 후에 태어난 사람은 노무현과 박근혜 두 사람 뿐이고, 그 외는 모두 그 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 아홉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윤보선, 전두환, 노태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다섯 사람은 창씨 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박정희(朴正熙)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최규하(崔圭夏)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  김영삼(金泳三)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김대중(金大中)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 이명박(李明博)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朴正熙의 正,  崔圭夏의 圭,  金泳三의 金,  金大中의 大中,  李明博의 明博 등, 그들은 모두 제각기 한 글자나 두 글자를 살려서 창씨개명한 흔적(痕迹)이 있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에 적은 것처럼 원래의 성명 중에서 한 두 글자를 살렸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것인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에는 ‘朴正熙의 正’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지었는데,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 로 고쳤다고 한다. 박정희의 그러한 창씨개명은 100 퍼센트 일본인화(日本人化)된 성과 이름이다.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에 관한 것은 인터넷 등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적지 않는다.

각설하고, 앞에서도 적었듯이 <4월 혁명>을 화제로 삼아 글을 쓰다보니 창씨개명에 관한 것도 나왔고, 창씨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 이름도 나왔다.

이화장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이승만 박사가 그의 부인(프란체스카 도너 리)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 돈암동 부근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이라는 곳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종로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그곳으로 이사한 이 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화장에서 살았는데, 그 무렵에 나는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얼마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  내가 거기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당시 그 공사를 맡은 제일토건사 (사장 : 金相根, 당시 서울  을지로 사거리 근처 소재)의 김예수(金禮洙) 부사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harlie Kim이라고도 불렸던 김예수 부사장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시 서울 용산 한남동에 있던 13th Engineer Batallion 이라는 미군부대에 취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에 관한 이야기까지 적어야 될 것이다.

USAMGIK, 즉,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한 뒤, 미군 제24군단 (XXIV Corps)이 1945 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다스리던 군사적 통치기관이다.  이 글의 목적이 그러한 미군정(美軍政)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던 설명을 하기 위해 꺼내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적지 않는다.

하여간, 나는 13th Engineer Batallion이라는 미군부대 부대장인 윌헬름  중령(Lt. Col. William E. Wilhelm) 관저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김 부사장을 알게 된 것과 이화장 공사현장에서 내가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사유(事由)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앞에 적었듯이 나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고있던 이화장 개축공사현장에서 얼마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한데, 백발이 성성한 그 분을 가까이에서 살펴본 첫인상은 평범해보이 는 노인이었다. 그는 가끔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면서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아주 자상하고 찬찬해 보이던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인생말년(人生末年)   에 이르러서는 부끄럽고 명예스럽지 못한 길로 가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그 노인의 그러한 삶은 지나친 노욕(老慾)과 분수에 넘치는 과욕(過慾)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 공산당 창건자인 모택동(毛澤東)의 어록 (語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뜻으로 볼때,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반면교사>의 본을 보여주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자리에 있을 당시, 서울 남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데, 4.19 후에 그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半世紀)가 지나갔다.

51년만에 남산 언저리에 다시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런 것이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이화장 개축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를 가까이에서 살펴본 생각이 나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 글에 적어 보는 것이다.

이번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당시에 벌어졌던 선거와 관련된 것 한가지만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를 평(評)한다면, 그의 과오(過誤)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당연히 그가 비난(非難)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90년>이라는 그의 한평생을 두루 살펴보면, 거대(巨大) 한 삶과 꿈이 담긴 그의 생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