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에 딸아이가 밥상에서 저의 부부에게 물어본 말이랍니다. “한국식 반찬을 어떻게하면 빠르고 쉽게 만들어 먹을 수 있지?” 아내와 저는 순간적으로 나름 아는 지식을 총동원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주었답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의 응답이 아이에게는 닿지 않는 분위기였답니다.

아무렴 쉽게 살자면야 뉴욕인데, 한국마켓에 가서 사먹으면 간단히 해결될 문제겠지만 그래도 아이가 제 먹거리를 스스로 만들어 먹는 일로 생각하고 묻는게 고마웠답니다.

그래 오늘 아침부터 부산을 좀 떨었답니다. 아이가 먹을 밑반찬을 만들어 보내노라고 말입니다. 콩자반, 장조림, 오징어젓갈을 만들어 조금씩 싸서 넣어주었답니다.

내친김에 농사짓는 친구가 보내준 무우로 석박이와 물김치도 좀 담구었구요.

아마 엊저녁에 제가 “징검다리”를 떠올려 생각한 것은 모두 제 딸아이 덕이랍니다. 그 맘으로 오늘 제 가게 손님들에게 보낸 편지랍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우리 부부의 밥상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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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조촐한 밥상을 함께 나누려 애쓰는 이들을 생각하며…>

예전에는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던 것들인데 지금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그런데  비록 볼 수는 없더라도 그 이름만은 남아서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흔히 사용하는 말들이 있지요. 어떤 것들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 보는 일도 재미있지 않나요?

제가 어릴 적에만 해도 한국에서 흔히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에서없어진 것들 중에  징검다리라는 것이 있답니다. 징검다리라는 것은 거의 없어졌지만 한국사람들은 이 말을 아직도 사용한답니다.

예전 한국의 전형적인 마을 구조를 보면 작은 산 밑에 집들이 몇채 있어 마을을 이루고 마을 앞에 농사를 짓는 논과 밭이 있고, 그 논과 밭 끝에는 작은 개울이 있답니다. 그 개울을 건너면 또 다른 마을이 시작되는 것이고요.

그 개울에는 다리가 놓여져 있었답니다. 지금 “다리”라는 말에 당신이 상상하고 있는 그런 모습의 다리가 아니랍니다.

바로 이 사진과 같은 모습의 다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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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울 위에 큰돌들을 사람들의 보폭만큼의 간격으로 이어놓은 다리랍니다. 이런 징검다리를 거의 볼 수 없지만 예전에는 어느 동네에서건 아주 흔히 볼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비록 징검다리의 모습은 볼 수없지만 “징검다리”라는 말은 아직도 아주 자주 사용하는 말 가운데 하나랍니다.

‘징검다리’라는 말은 이쪽과 저쪽을 이어주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거니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한다라는 뜻으로도 쓰인답니다.

자! 11월 마지막 일요일이고 이틀 후면 12월입니다.

12월은 2015년의 마지막 달이자 2016년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입니다.

올 한해동안 함께했던 기쁨과 즐거움을 내년에도 이어주는 동시에  누군가에게 힘과 희망을 심어주는 징검다리 같은 올 한해 남은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There are many things that could commonly be seen in the old days, but that have almost disappeared nowadays. But, even though they cannot be found easily, their names still remain to be used so often. Don’t you think that it is interesting to think about those things?

Among those things that could commonly be seen when I was young, but that have almost completely disappeared in Korea, one thing came to my mind. It is “Jing-Gum Dah-ri.” “Dah-ri” means “a bridge.” Though it is very difficult to find any of these now, people in Korea are still using the words.

In the old days in Korea, a typical village in the countryside was located at the foot of a small mountain, and had rice paddies and farming fields in front. And at the end of the farming area was a small creek. If you crossed the creek, you would step in a different village. In a word, the creek made a border between two villages.

A bridge traversed the creek. Even though I said a “bridge,” it was not the kind of bridge you might have imagined.

It was a kind of bridge as shown in this picture.

It was a bridge which was made by putting big rocks at the intervals of a person’s stride in the creek. Nowadays, this kind of “Jing-Gum Dah-ri” is very difficult to find, but in the old days, it could be seen in any village.

Even though they have almost disappeared completely, the word, “Jing-Gum Dah-ri,” is still one of the frequently used words.

As its function indicates, it is being used to mean what connects this and that, and also what plays a role to help someone.

There, There! It is the last Sunday of November and December will start in just two days.

December is the last month of 2015 and a “Jing-Gum Dah-ri” to connect 2015 to 2016.

I wish that all of you will have the remaining days of 2015 like a “Jing-Gum Dah-ri” which connects and extends all the joys and happiness in this year to next year and which inspires someone with hope and strength.

이론과 실천을 함께 고민하며 살아온 벗의 이야기 – 1

Thanksgiving day 아침입니다.

모처럼 아이들도 집으로 오고, 온가족이 모이는 날입니다. 아내와 함께 아침 일찍부터 수선을 피웁니다. 칠면조구이는 이제 완전히 제 몫이 된 일입니다. 올해는조금 색다른 레서피를 사용해 봅니다. 야채를 잘 안먹는 아들녀석을 위해 어제밤에vegetable stock을 끓여 푹 담구어 놓았지요.

음식준비를 하면서 올 한해 감사함들을 꼽아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나게 된 일입니다. 필라세사모는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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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만난 이들을 통해 새로운 교회의 모습을 느껴본 한해랍니다.

무릇 신앙의 궁극적 목표라면 구원이 될 것입니다. 한두해 전부터 제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의 같은 소그룹에 속해있는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후 구원 문제에 대한 성서적 이해를 돕기위해 한동안 열심히 성서 이야기를 썻던 기억이 납니다. 그 그룹에 속한 멤버들이 대충 저보다 연상들이었으므로 죽음의 문제가 결코 남의 일로만 여겨지지 않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구원이란 사람들이 살아가는 오늘 현재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죽음 이후에 문제로 국한지어 생각하는 것은 좀 따분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던 차에 필라세사모 식구들을 만난 것이지요. 구원에 있어서 ‘이론’과 ‘실천’은 매우 중요하고 함께 가야만 하는 것이지요. 그런 뜻에서 이들과의 만남은 올 한해 제게 가장 큰 감사가 되어야할 것 같답니다.

그 모임에서 엊그제 대전에서 목회하는 김규복목사를 온라인으로 초빙해 이야기를 들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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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쌍전(文武雙全) 또는 문무겸전(文武兼全)이라고 하는 말이 있지요. 문(文)과 무(武)를 다 갖추고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김목사를 향해 ‘이론’과 ‘실천’을 쌍전(雙全)했다거나 겸전(兼全)했다고 칭송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적어도 구원에 있어 궁극의 목표라고 할만한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일” 곧 “인간성의 총체적인 회복”을 위해 평생을 ‘이론’과 ‘실천’을 함께해 온 사람라고는 말씀 드리고 싶답니다.

그날 밤 김목사의 이야기를 들었던 우리 필라세사모 식구들 뿐만 아니라, 단 한사람만이라도 더 이야기를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몇차례에 걸쳐 그의 이야기를 올리려 합니다.

아내의 원성 소리가 들리기 전에 부엌으로 가야할 시간입니다. 오늘은 짧게 첫번 째 이야기입니다.

조찬기도회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조찬기도회

교회용어사전 (Glossary of Christianity, 서울,생명의말씀사,2013)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예배 및 예식’이라는 제목이 있고, 그 제목 안에 국가조찬기도회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라는 항목이 있다.

우선 조찬(朝餐)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본다. ‘조찬(朝餐)’, ‘조반(朝飯)’, ‘아침 밥’  또는 그냥‘아침’이라고 하는 이런 말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말이다.

한데, 내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조찬(朝餐)’보다 ‘조반(朝飯)’이 낫고, ‘조반(朝飯)’보다 ‘아침 밥’이나 그냥 ‘아침’이라고 하는 말이 훨씬 실감 (實感)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아침, 점심, 저녁 …… 이렇게 끼니 때마다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환경(環境)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해보는 말인데,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 였던 때가 있었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지낸 것이 무슨 자랑거리일 수도 없고, 굶주림을 겪은 것이 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겪었던 사실이니 적어보는 말이다.

일제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6.25 전쟁 때에도 먹는 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채 남북을 막고 있는 철조망은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인데, 그 전쟁 때 반찬 없는 주먹밥을 먹으며 전쟁터를 누비던 때가 있었다. 그러한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하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다 지나갔고 케케묵은 6.25 때 이야기를 궁상(窮狀)맞게 꺼집어내어 들먹일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간에,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에 나온 ‘breakfast’라는 말은 break와 fast의 합성어(合成語)다.

  • Break(깨뜨리다) + fast(음식을 먹지 않음) = breakfast

곧 “밤 사이에 먹지 않은 것을(단식한 것을) 깨고, 음식을 먹는다.”라는 뜻이다.

  • 24시간을 3등분한 여덟(8)시간 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저녁밥을 먹은 시간과 아침밥을 먹는 시간과의 간격(間隔, 시간적인 동안)이 아침에서 점심까지,  또는 점심에서 저녁까지보다 더 길기 때문에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설명이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것을 적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국가(國家)가 무엇인가?

국가는 일정(一定)한 영토(領土)를 가지며, 거기에 거주(居住)하는   다수인(多數人)으로써 구성(構成)되어 하나의 통치조직을 갖는 단체, 즉 나라다.

따라서 ‘국가는 통치권(統治權), 영토(領土), 국민(國民)의 3 요소로써 성립된다.’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해설이다.

이쯤에서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골라서 간략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cats‘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3월 8일 옛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가 모태(母胎)이며, 1976년 제8회 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3년부터 사단법인으로 되었는데, 그 이름부터가 아주 거창(巨創)하다.

“(사)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

그 기도회는 국민화합(國民和合)과 경제활성화(經濟活性化) 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기독교단체에서 해마다 주최 하는 아침기도회다. 그 기도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계의 요인(要人)들과 한국 개신교의 저명한 성직자(聖職者)들이 함께 기도도 하고 아침밥도 먹는 행사다.

위에 적은 것만으로는 그 모임에 관한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신정권(維新政權) 이후 본격적으로 정교유착(政敎癒着)을 하게 된 것이 바로 1966년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그러한 정교유착(政敎癒着)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신정권을 지원하는 형태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政權)을 찬양(讚揚)하는 내용이고, 그러한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형태였다.>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치계와 경제계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치인과 종교인들 중 에도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정교유착을 하는 인사(人士)들은 기독교 성직자로서의 본분(本分)을 망각(忘却)했거나 아니면 저버린 사람들이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개신교)의 경우, 성직자(聖職者)란 ‘종교교단(宗敎敎團) 내에서의 예배<제례(祭禮)의 집행>, 신도(信徒)의 교육, 교단의 운영 등을 지도 또는 담당하는 직업의 사람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그렇다 면, 위 해석에서 말하고 있는 <종교교단>이란 무엇인가?

  • 종교(宗敎)란 무한절대(無限絶對)의 초인간적(超人間的)인 신(神)을 숭배(崇拜)하고, 신성(神聖)하게 여겨 선악(善惡)을 권계(勸戒)하고 행복(幸福)을 얻고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 교단(敎團)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종교상(宗敎上)의 신앙(信仰)과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같이하는 동질적(同質的)인 사회집단(社會集團)이다.

한데 오늘날엔 개신교 성직자들 중,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 들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내면적(內面的)인 것뿐만 아니고, 외형(外形)에도 그런 면(面)이 있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60 ~ 70년대의 물량주의(物量主義)와 권력지향풍조 (權力指向風潮)로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고,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혼돈 상태도 드러나고 있다.>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아주 큰 교회> 라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1만명 이상 되는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 보니,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기도회가 오늘날엔 사단법인 대한민국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로 되어 있고, 그 조직규모가 거창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20조 제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조문(條文)이 있는데, 그것이 논란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서 이번 이야기를 끝낸다.

30년만에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라디오에서 크리스마스 캐롤이 흘러나온지도 벌써 여러날 되었습니다. 이렇게 올 한해도 서서히 저물어 갑니다. 이번 주간엔 한해에 대한 감사(thanks)를 드리는(giving) 날인 Thanksgiving Day를 맞습니다. 한해의 감사를 드려야만 할 대상들을 꼽아보는 일도 제법 뜻이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아침입니다.

제 자신과 가족들이 드려야할 감사의 내용들과 드려야할 대상들을 헤아려봅니다. 꼽자하니 꼬리를 잇습니다.

그러다 올 한해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질 때마다 붙잡아 주었던 옛 선생님의 말씀 하나 떠올려봅니다.

올 한해 동안 제 마음이 자꾸 흐트러져 일상을 벗어났던 까닭은 “내가 이제껏 잘못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 아닐까?”하는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일테면 그것은 제 신앙적 물음이었습니다.

이즈음에 이르러 오만하거나 무지한 자들에 의해 거의 “빨갱이들의 언어”로 규정지어지는 듯한 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민중”입니다. 이 “민중”이란 말은 어찌보면 제가 살아오면서 (비록 가까이 하지도 못했고, 스스로 그 범주에서 자꾸 벗어나려고 애써왔다는 게 솔직한 고백이겠지만) 꼭 붙잡고 싶었던 화두 같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제가 이해하고 믿는 성서의 가르침 탓인데, 올 한해 그 이해와 믿음이 자꾸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를 추스리고 깨우쳐주신 선생님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바로 “민중과 함께 했던 예수”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안병무목사님은(1922-1996) “민중이란 정치, 경제, 문화, 종교 할것없이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이다.”라고 말씀하셨고, “그리고 그 민중이란 오늘이라는 구체적인 현실에서 그때 그때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객관화시켜 절대화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라고 가르쳐 주셨답니다.

바로 2015년 오늘, 소외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바로 민중들이고, 그 소외된 상태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이들이 민중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록 2015년의 제 삶이 민중적인 것이 아니고, 민중과 함께하는 삶도 아니였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이해하려고 흉내라도 낸 까닭은 바로 안목사님의 가르침이 함께했기 때문입니다.

그래 감사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이해와 믿음이 흔들릴 때마다 성서를 손에 들고 질문하게 했던 신앙에 대한 감사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 나그네나 이방인으로 이민자로 살아가는 사람들. – 모두 2015년 감사절에 위하여 기도해야만 할 민중들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30년 넘는 세월동안 흔들림없이 민중들과 함께 하나님나라를 꿈꾸며 외길 걸어온 벗을 소개 드립니다. 저도 30여년만에 이 친구를 처음 만납니다. 헤어져 만난지 30년이 넘었지만,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한결같이 첫 마음 그대로 “어떤 체제로부터 버림받고 밀려난 소외계층”과 함께 하고 있는 김규복목사입니다. 그는 오늘도 함께하는 이들에게 ‘희망과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희망과 소망으로 산다는 것은 오늘 이 자리에서 내일을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자리에 이 글을 읽고 계신 당신을 초대합니다. 뜻깊은 2015년Thanksgiving이 되리라는 생각으로…

김규복목사 초청 온라인

제목 : 한국내 이민 노동자들과 다문화 가정

일시  : 2015 11 24() 오후 9오후11(미국 동부시간 기준)

장소 : 온라인 모임방https://zoom.us/j/6998016922  ) – 당일(11/24) 오후 8시 50분부터 입장 가능합니다. 녹색 글씨 링크를 클릭하시면 됩니다.

필라 세사모에서 당신을 온라인 강의에 초대합니다.

Join from PC, Mac, Linux, iOS or Android: https://zoom.us/j/6998016922

Or join by phone:

+1 646 558 8656 (US Toll) or +1 408 638 0968 (US Toll)

Meeting ID: 699 801 6922

참조 : http://conta.cc/1Lrc3ug

김규복목사 약력보기 (http://www.seomna.or.kr/page/m1s2.html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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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이주민과 함께하는 모임> 사진첩에서

 

Happy Thanksgiving!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제 가게 손님들을 비롯하여 저처럼 구멍가게를 하는 이들의 손님들에게 짧은 편지를 띄우는 일을 계속한지도 제법 되었습니다. 2007년 7월부터 시작해서 이제껏 단 한주도 쉬어본적 없이 이어져 온 일이랍니다.

매번 편지를 쓸때마다 제 맘속에 품는 생각이 하나 있답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라는 생각이랍니다. “단 한사람만에게라도” 제 생각이 이어져 단지 편지를 읽는 짧은 시간 동안만이라도 삶에 대한 푸근함과 감사를 느낄 수 있다면, 제가 하는 일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는 맘으로 이어온 일이랍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 띄울 편지를 이 밤에 마무리지었답니다.

이 편지를 제 블로그에 올리는 까닭은 비단 제 손님들 뿐만 아니라 제가 기억하는 모든 이들, 아니 누군가 제가 모르게 저를 기억해 주시는 모든 분들께 드리는 이 계절의 인사이기 때문입니다. 제 인사를 맘속으로 받는 단 한사람 있다면, 그 분에게 드리는 뜻으로….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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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NS (Social Network Service)는 사람들의 생활을 아주 많이 바꾸어 놓았습니다. 특히 스마트폰 이용자들의 증가와 무선 인터넷 서비스의 확장은 삶의 양식을 빠르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진짜인지 우스개 소리인지 모르지만 바로 옆에 있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도 얼굴을 보며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스마트폰 문자를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는 말도 듣습니다.

이런 삶의 변화는 물론 긍적적인 측면의 것들이 많지만 종종 부정적인 측면도 나타나곤 합니다.

일테면 페이스북 등에 자신의 이야기들을 공유하면서 일반적으로 좋은 것들만 올리다보니, 나이 어린 친구들 가운데 “남들은 저렇게 즐겁게 잘만 사는데…. 나는 뭐지?”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을 비하한다는 뉴스들도 보게되는 것입니다.

그런 뉴스들을 보게될 때면 안타까움이 앞선답니다. 사실 남과 자신을 비교하여 스스로 주눅들어하는 일은 SNS뿐만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도 종종 보게되는 일들입니다.

자! 추수감사절 주간입니다. 약 오천만 명이 가족들과 함께 하려 길을 떠나고, 그만한 숫자의 칠면조들이 가족들의 식탁을 풍성하게 해주는Thanksgiving Day가 있는 주간입니다.

얼핏 이 한주간을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기쁘게만 보내는 것 처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갖고 이웃들을 돌아보면 누구나 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수 있습니다.

함께 모이는 가족들 한사람 한사람들도 마찬가지일것입니다. 가족 구성원 모두가 그저 즐겁고 기쁘기만한 “오늘”을 누리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입니다.

그 누구라도, 어떤 상황이나 어떤 처지에 있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며 즐길 수 있음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어떤 계획, 어떤 모습 누구와 함께 보내시더라도 즐겁고 풍성한 추수감사절이 되시길 빕니다.

SNS (Social Network Services) has changed people’s everyday lives so much. Especially, the explosion of smartphone users and the rapid expansion of wireless internet service have changed their life styles drastically and quickly.

Whether it is a joke or a fact, I’ve heard that people talk to others through texts on smartphones instead of looking at each other, even if they sit side by side.

While this kind of change in our lives brings about many positive aspects, it also gives rise to negative phenomena.

According to news reports, when people post their stories to share with others on SNS such as Facebook, generally they select only good and happy stories to post. So when youngsters see those posts, they think that “other people enjoy such a happy life… Why isn’t my life like that?” and put themselves down.

I feel sorry when I come across such news. As a matter of fact, social phenomena to compare oneself with others and to put oneself down are not limited to the SNS world, but are happening in the real world all the time. But still, that’s very unfortunate and sad.

Well! It is Thanksgiving Day week. About fifty million people will travel to join their families, and roughly the same number of turkeys will make dinner tables become delicious feast.

On a moment’s thought, we may assume that everybody will enjoy this week happily and delightfully. But, looking around with a little bit more caring mind, we will easily know that is not true.

Even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may not be in the same happy and delightful situation. All of them may not be enjoying only happiness “today.”

However, it is still Thanksgiving Day.

Whoever and in whatever situation you may be, it is a day which you can enjoy and celebrate with thankful and happy feelings.

I wish that all of you will have a happy and abundant Thanksgiving Day, whatever plan you may have, whomever you may be with, and whatever circumstances you may be under.

아름다움에 대하여

어제밤 이후 제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한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생각을 하고 있는 제가 그 생각을 무어라 불러야는지 딱히 이름지어 부를 수가 없었답니다. 제 머리속과 가슴을 꽉채운 어떤 생각이 있기는 한데 “그건 바로 이거다”라고 이름지어 말할 수가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월요일 일터에서 일을 하면서도 그 ‘어떤 생각’이 그냥 느낌으로만 뱅뱅 돌 뿐이지, 생각이 영글어 표현에 이르는 지경에는 닿지 못했답니다.

그러다 하루가 지난 이 밤, 옛 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문득 떠올리면서 그 생각을 무어라 이름 지어야 하는지를 찾아내었답니다. 바로 “아름다움”이랍니다.

저는 어제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이라는 온라인 화상 모임에 함께 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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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임에는 한국에 계신 세월호 유가족분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독일 등지의 19개 도시에서 참가하신 약 백여명에 가까운 동포들이 함께 했답니다.

비록 컴퓨터나 휴대폰 화상을 통해 얼굴을 맞댄 것이지만, 마치 실제 한 공간에서 만나고 느끼는 것 같은 시간을 함께 했답니다.

어제밤, 거의 두시간을 넘긴 만남속에서 함께했던 이들은 마치 서로서로 손을 맞잡고 이어진 모습으로 하나가 되었었답니다.

그 순간들의 느낌들을 하나로 엮는 생각이란  바로 “아름다움”이었답니다.

사실 어제밤 함께했던 이들이 함께 나누고자 했던 것은 아픔이었답니다.

그리고 어제밤 모임은 그 아픔이 ‘너’만의 것이 아닌 ‘나’와 ‘우리’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던 동시에 그 아픔을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저들을” 향하여  “끝내 너희들도 우리가 되리라”고 함께 외쳐보자고 만든 자리였답니다.

그렇게 아파하는 자들의 모임이었지만 모임에 참석했던 우리 모두는 웃음을 잃을 수 없답니다.

바로 어제밤, 아파하는 우리들이 함께했던 그 웃음에 대한 생각을 “아름다움이다”라고 말씀하신 이는 함석헌선생님이시랍니다.

<그러나 정말 아름다움은 어디 있는지 아느냐? 도리어 강한 대조에 있지 않느냐? 푸른 잎에 붉은 꽃, 시커먼 구름에 반짝이는 샛별 모양으로. 감격을 하지. 비극이 무엇이냐? 극단의 대조 아니냐?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것을 맞대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나타내는 것이 비극이다.우리 마음은 하나됨을 얻는 때에 가장 즐거움을 느낀다. 그러므로 하나될 수 없는 것을 맞대놓고 거기서 하나됨을 찾으려 하는 때에 아름다움을 느낀다.>

바로 아름다움이었습니다.

세월호에 맺힌 한이 이미 아름다움으로 이어지는 한 “잊혀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아름다운 일들을 이어가는 새로운 걸음들을 이어갈 것입니다.

5.16 쿠데타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5.16 쿠데타

한국 현대사에서‘<4.19혁명>은 이승만 박사를 연상(聯想)할 수 있는 말이고, <5.16 쿠데타>의 주인공은 박정희 장군이다.’라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용으로 만든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이야기의 제목으로 정한 내용을 엮어 나가기 위해, 우선 그런 설명부터 이 글에 옮겨 적고, 5.16 쿠데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한다.

<사일구(4.19) 혁명(四一九革命)>

1960년 4월, 12년 동안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와 3.15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에 항거하여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난 일.

<오일륙(5.16) 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장면 내각을 뒤업고 정권을 장악한 일.

                  (초등학생 학습 국어사전 (주) 교학사, 1999. 7. 10)

위에 적은 것처럼 <5.16 군사정변>이라고도 하고, <5.16 군사혁명 (軍事革命)>이라고도 하는 <5.16 쿠데타>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朴正熙) 소장을 중심으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군사혁명 이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張勉)정권이 무너지고 군사혁명정부가 생겼는데,    2년 동안 그들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5.16군사쿠데타01

다시 설명하자면, <장면 내각(張勉內閣)> 또는 <장면(張勉)정권>이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다음부터 박정희의 군정이 생길 때까지  그 중간에 있었던 정권이다.

이야기를 잇기 전에 World Book, Inc에서 펴낸The World Book Encyclopedia의 1988 판에 실린 박정희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다.

Park Chung Hee (1917-1979) served as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63 to 1979.

He had taken power as head of the nation in 1961 after leading a military revolt against the civilian government.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Park, controversial leader, helped establish many new industries in South Korea and the country’s economy grew rapidly under his rule.

On the other hand,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He declared that harsh rule was needed to guard against attack by North Korea.

Park was born in Sonsan-gun, a country in North Kyongsang Province.

In the early 1940’s he attended military academies and served in the Japanese Army.   (중간 생략)

Park became a Korean Army captain in 1946 and a general in 1953.

After leading the 1961 military revolt, he headed the military government for two years.

In 1963, Park resigned from the army and was elected president by the voters to head a new civilian government.

He was reelected by the voters in 1967 and 1971.

In 1972 and 1978, Park was reelected college made up of persons loyal to him.

위와 같이, 백과사전에 실린 박정희 대통렁이 남긴 행적(行蹟) 중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위에 옮겨적은 설명만으로도, <5.16 쿠데타>의 주인공인 박정희 장군의 인간성(人間性)이 어떠하다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보기드문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혁명공약(革命公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한데,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질(變質)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공약 3번 중,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고, 그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공약 6번은 어떠했나?

<……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 >이라는 공약(公約)을 약속대로 실행(實行)했던가?

박정희 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인 김종필(金鍾泌) 중령 등이 주도 (主導)한 쿠데타 세력은 그들과 합세한 일단(一團)의 병력과 함께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5.16 쿠데타의 주역(主役)인 박정희 장군 …… 이미 앞에 적었듯이 그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이 남달랐고,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진 사람이다.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때,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허수아비 국가인 만주국(滿洲國) 신경군관학교 (新京軍官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 일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것을 맹세했고, 창씨개명할 때 100 퍼센트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던 박정희 —   그는8.15 해방을 맞아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한 다음, 대한민국을 위해 남긴 그의 업적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의 욕망(欲望)을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고, 결국은 한 나라의 독재자가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주도(主導)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유신헌법(維新憲法)>이 라고도 한다.   한데, 그 법에는 긴급조치(緊急措置)라는 것이 있다.

긴급조치(緊急措置)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같은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듯이, 둘러대기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긴급조치>라는 것은 그 당시 박정희가 장기집권(長期執權)의 꿈을 꾸면서,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낸 수단과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말로(人生末路)를 재촉하는 법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도 있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는데, 박정희 —–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World Book, Inc에서 펴낸 1988 Edition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설명을 생각해본다.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 설명문에 나온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the head’라는 표현은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金載圭) 부장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엮으면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등, 저명(著名)한 인사 (人士)들의 이름도 적었다.   한데 그들 중 이승만 박사만 빼고, 그 밖에는 모두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 적고 있는 <김재규(金載圭)>라는 그 이름은 내 마음 속에 늘 있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어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번이나 집권기한(執權期限)을 연장(延長)했고, 유신헌법이라는 것으로 집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데, 박정희 대통령이 휘두르는 그 엄청난 권력을 김재규가 막아낸 것이다.

김재규 …… 그가 어떠한 의도(意圖)로 (예를 들면, 정권 탈취 등) 박정희를 죽였든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건이 생긴 다음, 박정희 독재가 무너졌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역사(歷史)에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엮기 위해 한 가지 적는다. 박정희도 갔고, 김재규도 갔다.   한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 술판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쏜 김재규 장군도 1926년생이다.  5.16 주체(主體)의 한 사람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1926년생인데, 그의 구순(九旬,90세)에 관한 글이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참고 : 위에 적은 <90세>란 한국의 전통적인 계산법에 따른 것임)

1926년생인 그들은 모두 내 나이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나서 적어보는 것이다.

초대합니다.

우리들이 필라세사모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 어느 분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모국이란 말이 너무 크다면 그 말은 접어 두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물음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2016이라는 숫자가 코앞에 놓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손내미면 잡힐듯한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이들에겐 고려적보다 먼 옛날 일이 되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소리는 변함없건만 들으려는 귀 있는 자들도 점점 더 줄어만 갑니다. 오히려 “아직도냐?”, “이젠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정상인듯한, 정말 비정상적인 현실입니다.

BN-CL246_skferr_E_20140419002744자! 이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년 조금 지난 일을 고려적 이야기로 생각하는 세상이니,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이지만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는 일요일은 11월 15일(한국 시간 11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580일이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우리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외치는 300이 넘는 아낙 주례들의 소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55년전 아낙 주례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2015년 오늘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들을 들을 귀는 있답니다.  바로 우리들이 말입니다. 더하여 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를 더 크게 전파하는 울림통이 될 수도 있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

일시 : 2015년 11월 15일(일) 오후 9시 (미국 동부시간 기준)

함께 하시렵니까? [email protected] 으로 문의해 주십시요.

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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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송곳

페친 한분이 웹툰(미국에서는 Webtoon보다는  Webcomic 이라 합니다만) ‘송곳’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실 때만 하여도 제 눈길은 거기 가닿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드라마 ‘송곳’ 이야기가 연이어지면서 티저 영상을 올리셨고, 제가 그걸 보게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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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드라마 ‘송곳’을 찾아 보기 시작했고, 5회까지 보았답니다. 매회 드라마가 시작될 때 똑 같은 자막이 되풀이 됩니다. “이 드라마는 2003년 6월 어느날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자막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제 머리속엔 2003이 아니라 1970년대와 2015년 오늘의 모습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조지송, 조화순, 김경락(이 양반은 1980년대 미국와서 만났지만)목사님들의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인천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이들을 이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내 중반(제가 이민온 이후는 모른답니다)까지 이른바 노동운동에 삶을 바친 이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 어제 송곳 5회를 보다가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이가 있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기억속에 있는 1970년대에 비하면 2015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대한민국 뿐만 아닙니다. 이곳 미국내 동포사회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의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민온 1980대 중반만 하더라도 개밥통조림 사다먹은 이야기가 그냥 우스개소리만은 아닌 때였습니다.

아무리 못입고, 못먹고, 열악한 잠자리라 하더라도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은 가히 천국에 가깝다고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나, 2003년이나, 2015년 오늘에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줄세워 평가하고, 가르고, 나누어 차별하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이 더욱 더 심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쯤,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분 이야기입니다. 조지송, 조화순목사 이상으로 유명세를 탓던 이입니다. 이즈음에도 종종 뉴스에 이름이 오르락하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 결혼식 때 축복기도를 해주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올초에 그 이에 대한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지요. 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그 이에게 물었답니다. “(목사로서) 이거 좀 과하지 않은가?”라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고요.

저는 목사가 최고 고가의 차를 타고 다닌다고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차를 어떤 생각으로 타고 다니고, 그 차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은 2015년 한국인들 특히 60대 이후 세대들의 굳어진 생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을 고민없이(내가 느끼기에) 뱉어내셨을 이 어른이 두 분 조목사님들과 어깨 나란히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니셨던 1970년대에는 분명 성서에 뜻을 두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성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때만 기록으로 남겨졌고, 그 소명을 다했을 땐 소리없이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은 여전히 ‘송곳’같은 예언자들이 요구되는 시대랍니다. 어쩌면 1970년대나 2003년 보다 더욱 절실하게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