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