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書藝)- 2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2

권불십년(權不十年)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揮毫)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휘호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인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 대통령들의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골라서 적어 보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이 길기도 했지만, 하여간 그의 이름이 적힌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자(漢字)를 잘 몰라서인지 눈에 뜨이는 한자 휘호가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중의 휘호가 여러 점 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평생을 붓글씨와 가까이 하면서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체(筆體)를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붓글씨 이야기를 하는 김에 몇기지 더 적고 다음 이야기인 ‘4월 혁명’으로 넘어 간다.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한국에서는 書藝라 하고,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한다.

영어로는 대개 Chinese brush pen writing이라고도 하고, Chinese calligraphy 라고도 한다.   한데, calligraphy 라는 것를 풀이해 보면,  calli [beautiful] + graphy [forms of writing] = beautiful forms of writing 이라는 답이 나온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書>는 시각적인 조형미를 평면에 나타내는 조형(造形) 예술이며, 온 몸과 힘과 정신이 붓끝에 모여 그것이 점(點)이나 선(線)에 나타나도록 심혈을 가울이는 동작이다.

붓글씨는 그렇게 예술적인 감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기록을 위한 하나의 필기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붓글씨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한문이 한국 것으로 소화시키듯이 붓글씨도 그렇다.

예를 들면, 추사체(秋史體)가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서예가) 가 만든 것이다.

  • 추사체는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남의 것을 모방(模倣)하지 앓고 창작한 그의 정신은 본받을만 하다.

한글에도 그러한 점이 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필법(筆法)은 한자를 쓰는 것과 같았으나, 붓을 움직이는 방법을 한자의 그것과 다르게 하여, 선이나 점획이 부드 럽고 단정한 궁체(宮體) 글씨를 만들게 된 것이다.

  •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전해 온 전통적 한글 서체다.

요즈음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육체 단련을 위한 운동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먹는 사람도 있고, 값비싼 각종 보약과 건강식품의 수요가 늘어난다고 한다.

한편,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불안하여 심적 불안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음과 같은 현상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몸에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술울 마시거나, 담배나 마약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다니거나, 무슨 종교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도 있다.

그 밖에, 무슨 오락에 취미를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은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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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손에 붓 한 자루 쥐고, 붓끝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에 글씨를 써보는 것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을 비우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 불안 속에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글씨는 어떻게 쓸 것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글 한 구절이면 더욱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어떤 글씨라도 또는 어떤 모양이라도 괜찮다라는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로든 세로든 간에, 그냥 붓 가는대로 팔을 움직여 보면, 종이 위에 붓끝이 움직이는대로 그 흔적(痕跡)이 남게 된다.

  • 그것은 정신을 붓끝에 집중시키며 붓을 움직여나갈 때, 그 <붓 움직임> 에 따라 까만 먹물이 하얀 화선지에 스며들면서 생기는 필적(筆跡)이다. 

그 필적은 붓에 묻은 먹물의 질이나 양에 따라 달라지고, 종이에 붓을 대는 각도와 붓을 내리 누르는 힘과 붓이 앞으로 움직이며 나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붓글씨는 그래서 쓰는 묘미(妙味)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를 쓰다보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도 생길 수 있으리라 ……   붓글씨를 꾸준하게 쓰면,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도 달라질 것이라는 뜻으로 해보는 말이다.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적다보니, 개칠(改漆)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改漆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개칠은 다시 고쳐 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칠’한 글씨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설프게 쓴 ‘개칠’하지 않은 글씨만 못하다. 붓글씨에 관한 전문가는 개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붓 이야기를 적는 김에 한 가지 더 적는다.

붓(毛筆)은 원래 가는 대끝에 털을 꽂아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려고 만든 물건이다.

하지만 철필이나 만년필 등도 붓이라 하고,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 언론을 ‘붓’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데, 아무리 체계를 갖춘 학문적 지식이나, 능숙한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말이나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면 아니 될 것이다.

말은 진실(眞實)해야 되고, 글은 곡필(曲筆, 어떠한 사실대로 쓰지 않고 거짓으로 쓰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붓>과 <혀>는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인데, 특히 공인(公人) 이나 연장자(年長者)는 사석(私席)에서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항상 조심하여 화(禍)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명상서예(瞑想書藝)라는 말이나 태교서예(胎敎書藝)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필적요법(筆跡療法, graphotheraphy)이라는 것도 있고, 서예치료(書藝治療, calligraphy treatment)라는 것도 있다.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서예(書藝)- 1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3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1

광화문 현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붓글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대개 ‘서예학원’이라고도 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면‘영어학원’이고,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이면‘음악학원’이라고 하는데, 붓글씨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학원들을 서예학원(書藝學院)이라고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을 적어보려고 해본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붓글씨>와 <서예>는 그 개념(槪念)부터가 다른 것이다.  붓글씨와 서예라는 말의 뜻이나 글씨를 쓰는 방법, 즉 필법 (筆法)에 관한 것 등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예(書藝)는 붓글씨를 맵시 있게 쓰는 예술(藝術)이고, 붓글씨는 붓으로 먹을 찍어 그냥 쓴 글씨다.

이쯤에서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공통점은 그것에 쓰여지는 종이, 붓, 벼루, 먹 등이 서로 같음으로 붓글씨와 서예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글씨는 ‘붓으로 쓴 글씨’라는 것에 반(反)하여, 서예는  ‘書藝’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서예는 ‘예술성(藝術性)이 담겨있는 글씨다.’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6.25전쟁이 휴전된 다음부터, 특히 서울지역에서 번창하게 된 것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학원(學院)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엔 여러 가지 외국어를 비롯해, 음악, 미술, 컴퓨터, 웅변, 연예, 자동차운전 등 400여 종의 학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 학원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아니었다라는 말이다. 그러했었는데, 오늘날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본다.   서예학원에 경우, 임시수도(首都)였던 부산에서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람들의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문화생활의 질(質)을 높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수는 날이 지날 수록 늘어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외형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단적(極端的)인 예를 들어본다.

‘강남부자(江南富者)’라는 말도 있고, ‘벼락부자’라고도 하는 졸부 (猝富)들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엔 집안에 무슨 전집(全集)이니, 총서(叢書)니, 대전(大全)이니, 또는 여러 가지 전문사전(事典)들로 채원진 고급 책장(冊欌)을 갖추어 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너무 과장(誇張)된 표현인가?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의 한 부분을 누가 비꼬아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원래 붓글씨의 주요 목적은 실용이다. 필기(筆記)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서예는 실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感賞)할 수 있고, 심미가치(審美價値)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붓글씨와 서예를 구분(區分)할 수 있는 것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폭을 조금 넓혀보기로 한다.

6.25전쟁이 멈춘 다음, 부산이나 그 밖에 남쪽 땅 어디에선가 피난살이를 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 사람도 있었고, 환도(還都)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14334570신촌에서 ‘신촌인쇄소’라는 간판을 걸고 도장포를 겸한 인쇄소를 운영하며 살게 되었는데, 나는 신문에 실린 서예전시회(展示會)광고를 보면, 거의 그러한 전시회장에 가서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예잡지 ‘書藝’와 ‘書通’이 나왔다. ‘書藝’는 서예가인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이 발간한 것이고, ‘書通’은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이 발간한 것이다.

서통나는 1970년대 중엽에 대한민국의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 (東方硏書會)의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모아놓은 ‘書藝’와 ‘書通’ 그리고 동방연서회에서 쓰던 교본(敎本)인 ‘東方書藝講座’와 서예전시회장에 갈 때마다 모아둔 전시작품에 관한

설명서와 그밖에 서예에 관한 책 등을 미국으로 이주할 때 가지고 왔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어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에 관한 것 몇가지 정도는 한국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들을 활용(活用)하고 있다.

미국생활을 한지 10년 쯤 지난 어느날 동내 도서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붓으로  ‘大道無門’을 쓰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책 이름은‘KOREA’다.

한데, 그 사진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東亞日報 [1993.7.12.]에 실린 것을 이 글에 옮겨적는다.

<金대통령은 조찬후 자개농과 문방사우등이 있는 방으로 옮겨 클린턴대통령에게 ‘大道無門’ 휘호를 써주었으며 클린턴대통령 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예장면을 세심히 관찰.  金대통령은 “이 뜻은 어려운 일이 있을때 정정당당하게 자세를 취하면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다는 것”이라고 휘호의 의미를 설명해주자 클린턴대통령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두고 그 뜻을 생각하겠다”고 사의를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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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엮으면서 필요한 것을 대조(對照)해보기 위해 이것저것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중,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President Bill Clinton Watching South Korean President Kim Young-sam prepare a Calligraphy Scroll.   The scroll was later presented to President Clinton, at Blue House in Seoul,       South Korea. 7/11/1993.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

권불십년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2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권불십년

<權>  – <권세 권>이라는 글자다.

위에 적은 <權>의 설명인 권세(權勢)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權力)과 세력(勢力)이다. 한편, 재력(財力)이라는 말도 있고 학력(學力)이라는 것도 있는데, 재력이나 학력이 권력에게 눌림을 당한 때도 있었다.

한글전용그러한 것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엮게 될 ‘5.16 쿠데타’에서 다루기 로 하고, 여기서는 ‘한글전용 정책’ 또는 ‘한글전용법 시행’과 관련이 있는 것을 간략하게 적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70년부터 정부의 모든 공용문서를 맞춤법에 맞게 가로 쓰기 한글전용으로 하도록 규정되어 한글전용 어문정책이 확정 되었다.

그전에 이미 한국을 점령한 미군들이 펼친 그들의 군정(軍政)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독립된 직후부터도 한국정부는 국가정책의 일환 (一環)으로 한글전용 정책을 써 왔다. 하지만 그 실정(實情)은 오늘의 현실과 달랐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에 것>은 ‘한글과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라는 것이고, <나중 것>은 ‘한글만 쓰도록 했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오늘날엔 적지않은 한자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의 막강(莫强)한 권력(權力) 밑에서 이뤄진 <한글전용 정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번 이야기 제목을 <권불십년>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권세가 정확 하게 10년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기보다는, 아무리 강력(强力)한 권력으로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독재(獨裁)를 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못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며 세상을 ‘떡 주무르듯’하고,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권세가 당당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陷穽)에 빠지게 되거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은 신세(身世)가 될 수도 있을 것이 라는 말이다.

사람의 욕심(慾心)이란 한(限)이 없는 것 같다.  권력에 욕심을 가지게 되면, 권력중독증(權力中毒症)에 걸리게 되고, 권력중독증에 걸리면, 제 명에 못 죽게 되는 수도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인 광화문은 1927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옮겨졌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탔다. 그러했던 광화문(光化門)이 1960년대 후반,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로 된 현판을 달았다.

‘<한자>로 된 것이 <한글>로 바뀐었다’라는 것인데, 어느 안전이라고 누가 감(敢)히 그에게 진언(進言)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이다.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비평(批評)을 하다니 ……      그 글씨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 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펼친 어문정책(語文政策)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그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권불십년 이야기는 ‘5.16 쿠데타’ 에서 더 이어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처럼 ‘붓글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적어보기로 한다.

그들은 늘 무모했다. 역사앞에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많은 뉴스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른바 꼴보수 매체에서부터 극좌빨 매체에 이르기까지, 매체 영향력의 크기를 떠나 심지어 저 같은 골방 샌님까지 입가진 자들이 던지는 소리들이 넘쳐납니다.

그 숱한 소리들을 가로지르는 큰줄기가 하나 있는 듯합니다. 바로 이념논쟁입니다. 친일, 종북논쟁이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건 명백한 허구입니다. 지금 왈 논쟁중인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는 이념에 초점을 맞추어 볼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역사학’이라는 학문적 성과도 그렇거니와, 2015년을 살아가는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에게 ‘한국사’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던 싯점은 바로 1970년대였습니다. 이른바 유신시대였습니다. 지금 여왕놀이에 빠져있는 박근혜의 아버지 박정희시대였습니다.

오늘날 이른바 꼴보수들이 말하는 ‘민족주의 사관’이니 ‘민중사관’이니 하며 ‘종북사관’으로 연결지어 매도하는 역사학적 연구들이나 그 결과물들이 대중전파하게된 까닭은 바로 박정희 탓입니다.

왜냐하면 정통성이 매우 취약한 반민주적 정권이었던 탓이었습니다. 그 토양에서 ‘올바른 사관’에 대한 연구와 대중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게 시작된 ‘한국어 사고형 인간들’의 ‘역사 바로보기’가 시작되었던 것인데, 김영삼의 군불때기를 시발로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거치며 그 문제적 ‘사관’이 일반화된 시각이 될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공포수준에 이른 세력들이 일대 반격을 꾀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의 교과서 국정화 문제라는 것은 일개 샌님인 제 발상입니다.

그렇게 박근혜 시대에 이르러 향수에 젖어 옛노래를 부르는 세력들이 기승를 부리고 있습니다.

그 유신의 시대를 돌아가신 리영희선생은 이렇게 정리합니다. 그리고 리영희선생이 말한 세가지 부류의 지식인들 가운데 지난 40년 동안만 끊어서 본다면 아직도 제일부류들의 전성시대임에 틀림없는 듯합니다.

허나 역사의 발전은 분명 제3부류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의 힘에 의해 나아가고 있다고 믿는답니다.

book리영희선생이 <우리의 상황과 실존적 결단>이라는 제목으로 쓰신 “누군가 말해야 한다.(삼민신서, 1984년)”의 서문중 일부입니다.

<1970년대의 이 나라는 이른바 ‘유신체제’와 ‘긴급조치’에 의한 통치시대였다. 명분이야 무엇이었던간에 그것은 민주주의 정치에서는 ‘변칙적’형태였고, 따라서 그 시대는 이 나라 지식인에게 특수한 마음가짐(사상)과 행동(실천)을 요구했던 상황조건이었다.

돌이켜볼 때, 그 한 시기를 살은 지식인에게는 세 가지의 태도가 있었다.(일반 대중의 경우는 굳이 여기서 문제시하지 않는다.)

첫째는 상황에 순응 내지는 적극 호응하는 자세였다. 둘째는 상황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태도였고,  셋째는 그 상황을 과제로 인식하여 그 해결을 모색하는 사상과 태도였다.>

1970년대의 끝무렵였던 1979년 10월, 박정희의 죽음이 그렇게 다가오리라고는 이들, 제일, 제이 부류의 사람들은 차마 생각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1930, 4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1945년 8월을 차마 생각하지 못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즈음 ‘역사논쟁’을 보면서, 이건 단지 1970년대 ‘공주놀음’하던 박근혜가 ‘여왕놀음’하는 2015년 버전이요, 그 주변에서 제 밥그릇 하나 챙기기에 혈안이 된 도적놈들의 날뜀, 그리고 눈먼 백성들의 완장놀음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날 이런 놀음과 완장에 취한 이들 역시 도둑처럼 올 내일이 자기들에게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취해있을 터이지요.

무모하게 역사 앞에서.

8.15 단상(斷想) 5 – , 그리고 끝없는 갈등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1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5 – <공약(公約)>, <공약(空約)> 그리고 끝없는 갈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다음 날 저녁 8시 30분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연설 방송을 했는데,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광복 70년을 뒤돌아보며,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싱겁다 신익희(申翼熙) 장난 마라 장면(張勉)>

slogan위에 나온 표어(標語) 중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앞 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이 내놓은 선거 표어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 ……… 장난 마라 장면[張勉]>은 민주당이 내놓 은 표어를 반박(反駁)하는 자유당의 선거표어였다.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 >

이것은 앞에 이미 적은 것처럼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일단(一團)의 청년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쿠데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힌 6개 항의 혁명공약(革命公約) 중, 한 부분이다.

혁명공약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 (一掃)하고 퇴폐한 국민(國民)의 도의(道義)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淸新)한 기풍(氣風)을 진작(振作)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한데, 그러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했다. 그런 것 뿐만 아니다.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는데,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movie영화 이야기 하나 더 하며  <8.15 – 단상>을 마치고, <권불십년>이라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영화 <자유부인>의 감독인 한형모가 만든 영화로 ‘성벽을 뚫고’라는 것이 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麗順叛亂事件)을 배경으로 한 민족분단 의 비극을 그린 1949년에 나온 작품이다.   영어로는 [Breaking the Wall]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반공영화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념(理念)의 갈등(葛藤) 때문에 생긴 한 가족의 불행한 비극(悲劇)을 그려낸 그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집길과 영팔은 대학 동기동창이자 처남매부 간이다. 그러나 매부 영팔은 공산주의자이고, 처남 집길은 육군 소위이다. 이에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이들은 숙명적으로 맞서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처남은 다시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매부는 처남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처남도 하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까지 이 영화적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관점(觀點) – 국사교과서 논쟁을 보며

제가 이따금 읊조리며 좋아하는 쉘 실버스타인(Shel  Silverstein)의 관점(觀點Point  Of  View)이라는 시입니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똑같은 사건이나 현상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다를 수 있음을 표현한 내용입니다. 칠면조 곧 머리 나쁜 경우를 빗대어 말하는 닭과 같은 목에 속하는 조류입니다. 이런 칠면조가 아닌 사람들의 관점이 저마다 다르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입니다.

사관(史觀view of history )이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이 관점 역시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유심사관(唯心史觀)이나 유물사관(唯物史觀), 식민사관(植民史觀)이나 민족사관(民族史觀), 민중사관(民衆史觀)이나 영웅사관(英雄史觀) 등등은 모두 같은 역사를 보는 다른 관점이 있음을 나타내는 말들입니다.

사람살이가 이렇게 서로 다른 생각들이 있을 수 있고, 그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서로를 존중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마는 서로 부딪혀 싸우곤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무릇 역사란 그 다른 생각들끼리 다투고 충돌하면서 살아온 사람살이의 이야기인 셈이지요.

그 이야기들을 어떤 관점에서 다시 해석하고 기록하여 다음세대들에게 가르쳐 넘겨 줄 것인가 하는 문제 이른바 교육, 바로 역사교육입니다.  다음세대들을 위한 역사교육을 위한 도구 가운데 하나가 역사교과서인데 이즈음 그 교과서 때문에 시끄럽습니다.

혹시 이글을 읽고 계시는 분들 가운데 초중고 또는 대학시절 공부했던 한국사 교재 말고(물론 다 잊어버린 것들이겠지만) 어떤 종류의 한국사책이라도 최근에 읽어 본 책들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또한 최근 뉴스화 되고 있는 국사교과서 문제에 대한 내용들을 접하고 있는 매체들 곧 신문이나 방송 나아가  SNS까지 어떤 성향의 매체들을 통해 이에 관한 소식들을 받아드리는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른바 친일이니 종북이니 누군가에 의해 짜여진 틀에서 벗어나 각자 서로 다를 수도 있는 생각들을 굳히게 된 요인들을 찾아내 보자는 말입니다.

자! 이쯤 제 머리속에 굳은 생각들을 만들어낸 요인들을 먼저 밝혀봅니다. 이른바 제 나름의 사관(史觀)이요, 국사교과서 논쟁을 바라보는 생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30여년 전인 1887년 일본의 동경제국대학(東京帝國大學)은 사학과를 개설하고 조선사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일본이 한반도 침략을 하기 위한 사전 포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 때의 연구를 기반으로 하여 한반도 침략후 일본의 조선총독부는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 하기 위해 《조선사(朝鮮史)》,《조선사료집진(朝鮮史料集眞)》, 《조선사료총간(朝鮮史料叢刊)》 등 역사서를 편찬 발간합니다. 이른바 식민사관의 역사서들입니다.

대단히 애석하게도 이런 역사인식은 경성제국대학으로 이어졌고 해방 이후 남쪽 역사 교육의 큰 줄기를 이루게됩니다.

해방 이후의 긴 이야기는 접습니다.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이런 식민사관과는 다른 역사관이 있다는 소리들이 학계 또는 이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이들에게서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제 정신 가진 사람들이 모인 곳이라면 당연히 있어 마땅한 다른 소리들이 나타났던 시기입니다.

인식그런 소리들을 모아 펴낸 제법 방대한 결과물 중에 하나가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일련의 저작물입니다.

그리고 이런 <해방 전후사의 인식>이라는 관점이 잘못되었다며 세상에 나온 책이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입니다. 2006년도 일입니다.

재인식바로 서로 다른 관점의 차이입니다.

제 개인적으로 <해방 전후사의 인식>의 필자 가운데 몇 분들에게서 교육을 받았고, 또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의 필자 한 분과는 같은 학교에서 함께 교육을 받았고 함께 행동을 했던 경험이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두를 존경하고 서로 다른 생각들 역시 존중한답니다. 물론 제가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지만 말입니다.

사관은 다를수 있고, 다른 것이 존중 받는 동시에 서로 다툴 수 있어야 정상적이고 건강한 사회입니다.

한반도의 남과 북,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가운데 그래도 대한민국에 희망이 있는 까닭은 아직은 서로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민주주의와 인민이 없다는 것은 익히 아는 사실이지만, 대한민국엔 그래도 아직은 민이 살아있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관점의 차이를 인정하는 나라가 건강한 나라입니다.

국사교과서 국정화 곧 단일한 사관을 만들어 다음세대를 교육(세뇌)하려는 대한민국 정부의 모습에서 자꾸 북을 쫓아가려는 종북분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안타까움으로 몇 자 적어보는 것인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오늘의 모습은 130여년 전과 70여년 전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랍니다.

너무나도 제 잘난 무지 탓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