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