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8.15 단상(斷想) 4 – 변하는 사회상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0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광복 70년을 뒤돌아보니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변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은 달라졌다.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 국토(國土)와 민족의 분단(分斷) 이라는 소용돌이와, 작게는 일반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世態)도 많이 변했다.

8.15해방의 감격도 채 가시기 전에, 뜻밖에 몰아쳐온 국토분단의 비극, 그런 것에 더하여 동족(同族)끼리 서로 가슴에 총뿌리를 겨눠야 했던 6.25동란(動亂)의 대혼란기를 격었다. 그 뿐만 아니고, 4.19 혁명과 5.16쿠데타 등 정국의 큰 분기점을 이어오는 동안 사람의 마음과 세태가 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해방과 더불어 밀물처럼 쏟아져들어온 서구문명(西歐文明) 과 사상(思想)은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생활풍습 등에 큰 변화를 일으켰 고, 예로부터 전해져온 한민족(韓民族)의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의 가치관 등을 뒤바꾸어 놓았다.

서구문명(西歐文明)과 사상(思想)을 잘못 인식하여 맹목적으로 모방 하고 오도(誤導)한 나머지 방종에 가까운 자유주의사상(自由主義思想) 이 만연되 나가고 있었다. 특히 전란(戰亂)의 소용돌이와 끝없이 계속 되는 정국(政局)의 심한 변화를 겪어오는 동안 소박하기 그지없던 민심(民心)과 세태(世態)가 각박하고 메말라졌다.

광복70년 — 이제 구세대(舊世代)들은 반성의 기회로, 신세대(新世代) 들은 지난 과거를 거울삼아 새로운 지표(指標)와 <삶>의 가치관(價値觀) 를 설정해야 할 시기를 맞은 것 같다.

8.15해방 후 그 땅에서 있었던 사회풍조(社會風潮)의 단면(斷面)들을 간추려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그러한 시대를 겪지못한 사람들에게는 공상과학소설인 TIME MACHINE에 나오는 것과 같은‘과거와 미래의 시간 여행을 한다는 공상적 기계를   타보는 것이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첫째로 미군들이 그 땅에 들어온 다음, 양(洋)자가 붙은 말이 꽤 쓰이게 되었다.

8.15 당시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물에 쓰인 글짜가 오늘날 쓰이고 있는 그러한 것과는 달랐다.  가장 큰 차이라면  그 당시에는 <한자(漢字)가 많이 섞여 있었다.>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글 전용 정책으로 한자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자란 세대들 에게는 별도(別途)로 한자를 배우지 않는 한, 당시 인쇄물들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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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다시 한자교육의 필요성(必要性)을 말하는 사람들 이 있지만, 지금 한국어 글에서는 별로 한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대부분의 학술 서적에서도 한자 사용을 줄이고 있는 편이다.  그러하지만, 나는 이글에 한자를 드문드문 섞고 있다. 한자(漢字)를 배우지 않은 한글세대가 이 글을 다 읽는다면, 이 글을 통해서도 한자 몇가지 정도는 배울 수 있게 될 것                            경향신문 (1950년 6월 13일자)                           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야기의 본줄기로 돌아갈 것이니,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앞에 적은 것처럼, TIME MACHINE을 타고 그 시대를 한번 둘러보시라!

이제부터 [洋]자가 붙은 말 몇가지를 골라 이야기해 보기로한다.

양풍(洋風)이라는 말도 그 중에 하나인데, 여기서는 이야기 내용으로 보아 American style, 즉 ‘미국식’ 또는 ‘미국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불려왔던 그 땅에 8.15 이후 ‘미국바람’이 퍼지기 시작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예의(禮儀)를 잘 지키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한국을 가리켜 이르던 말이다. 원래 한국은 그러한 평(評)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라였었다.

한데 그러던 땅에 왜풍(倭風)이 들어와서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 그 자리에 양풍(洋風, 미국바람)이 들이닥쳤다. 물론 나라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東方禮儀之國과는 아주 거리(距離)가 먼 나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8.15와 함께 미군들이 그 땅에 들어온 때부터 시작하여, 6.25  라고 하는 난리를 겪는 동안, 그리고 <잘 살아보세>와 <하면 된다>라는 것들이 뭇 사람들을 <禮儀之國>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다.”라고 하면 자나친 말이 될까?

이런 이야기를 적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6.25 때 이야기다. 부산에서 살 때, K-9 비행장 근처에 우동교회 (佑洞敎會)라는 피난민 교회가 있었다.  당시박선택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곳이다. 나는 원래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육국병원에 있을 때 같은 병실에서 지내던‘김주찬’이라는 친구를 알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교회엘 다니게 되었다. 한데, 어느 주일예배(主日禮拜) 설교시간에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제시대에는 다꾸앙 냄새나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즘엔 버터 냄새나는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

말속에 뼈가 있다. 그 말을 응용하여 나도 한마디 적는다.

“요즘은 돈냄새 풍기는 목회자(牧會者)도 있더라,”

내 말이 틀렸나?  교역자(敎役者)들 중엔 치부병(致富病)에 걸린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직접 설명하기엔 거북한 말이지만 이왕에 [洋]자가 붙은 말을 꺼냈으니  적는다.

첫째로 <갈보, 양갈보, 또는 양공주>라는 말이 있다. 한데, 그것은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俗)되게 이르는 말이다.

홍등가 (紅燈街, red light district)나 기지촌 (基地村, military campside town) 등에서 생계를 위해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를 지칭하는 천박(淺薄)한 그런 말을 조금이나마 순화하기 위해 창녀(娼女)라고도 하고 매춘부(賣春婦)라고도 하는데, 갈보이든, 창녀이든, 매춘부이든, 여자가 몸을 판다는 점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직설적(直說的)이고 노골적(露骨的)인 표현 대신으로 쓰이는 말이 있다.

<직업여성(職業女性)>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오늘날에는  관공서나 무슨 회사 등에서‘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는 뜻 말고, 주로 유흥업소 등에서 도덕적으로 용납(容納)할 수 없는 퇴폐적(頹廢的)인 일에 종사하는 여성을 완곡(婉曲)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이야기에 나온‘양(洋)이란 서양의, 서양식, 서양 것, 등의 뜻이 있는 말로서, 앞에 적은 양갈보나 양공주를 비롯해 양담배, 양주, 양춤, 양코배기등, 양(洋)자가 붙은 여러 가지 말이 쓰여졌다. 바꾸어 말하자면, 8.15 해방과 함께 그 땅에 불어온 것은 미군들과 함께 상륙한 이른바 서구바람인 양풍(洋風)이었다.

거리에는 앞에 설명한 소위 <양공주>들이 생겨났다. 종래(從來)에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있어 부부들도 함게 거리에 잘 나다니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양공주(洋公主)들이 미군들과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대할 때 몹시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행과 새바람>이란 민감한 것으로 어느새 그러한 것이 사람 들 눈에 익어 자연스럽게 보였고, 한국 젊은이들도 그러한 풍습에 젖어들어 건전(健全)하게 교제(交際)하는 연인(戀人)들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그러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사교춤>이라는 댄스도 미군들과 더불어 그 땅에 상륙한 후, 댄스바람 이 번지고 있었다. 댄스의 열풍(熱風)은 이른바‘자유부인’들을 낳았고, 특히 전란(戰亂) 을 통한 식생활(食生活) 해결의 어려움과 함께 여성들 중엔 정조(情操)를 경시(輕視)하는 풍조(風潮)도 있었다.

나는 6.25전쟁 때 부산서 피난살이를 했고, 휴전(休戰) 후 서울로 되돌아가, 신촌에서 거의 30년을 살았다.

나는 신문에 실린 연재소설(連載小說)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중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1954년에 발표된 자유부인 (自由夫人, 정비석[鄭飛石}작)이라는 소설이 바로 그 작품인데, 그것은 6.25전쟁 이후 일부 계층에 퍼진 서구(西歐) 풍조를 묘사한 소설로, 그 작품이 신문에 연재(連載)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波紋)을 불러일으켰고, 책으로 만들어진 그 작품은 1950년대에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알려져 있다.

download소설 ‘自由夫人’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파문(波紋)을 일으켰고, 사회적 으로 큰 논란(論難)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 들의 비리(非理)를 파헤치고, 국가의 이익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작가 가 치안국(治安局)에 소환되는 일화(逸話)를 갖고 있기도 한 소설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당(自由黨)시절에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춤바람>이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은 그 후에도 흔하게 쓰인 말이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계(政治界)와 경제계(經濟界)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얻으 려고 서로 깊은 관계를 가져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던가?

일제통치 아래`폐쇄(閉鎖)된 사회에서 억압만 받아오던 한국인들은 그러한 자유화(自由化) 물결이 그저 좋아만 보여 무한정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적 사회적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암살(暗殺), 정치세력다툼,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폭력의 난무 등 해방초기의 정국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휴전직후 55년도엔 처녀 70여명을 농락한 세칭‘박인수(朴仁秀)사건’ 이라는 것이 있었고, 각 결혼식장에서는 피로연을 댄스파티로 대체하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었다. 6.25전쟁 때, 국운(國運)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빽>만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뺵의 위력(威力)>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빽>에 약했고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60년대를 돌아본다.

60년대 초부터 경제성장(經濟成長)이니, 국민소득증대(國民所得增大)니 하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말과 함께 생활 수준이 차차 향상 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배금사상(拜金思想), 즉 돈이면 무엇이 든지 된다는 생각은 기업윤리(企業倫理)의 타락과 공무원들의 범죄 행위(犯罪行爲)와 탈세(脫稅)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치성이나 도피성 이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조리(不條理)를 낳았다.

말하자면,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가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식(西歐式) 생활의 모방성향이 늘어남에 따라, <호화 아파트>, <자가용족>, <바캉스>라는 말도 쓰이게 되었고, 극단적 표련으로는 <도둑촌>과  <호화 주택촌(豪華住宅村)>이라는 유행어까지 쓰이게 되었다.

아무튼, 극단적인 빈부(貧富)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식(葛藤意識)과 우열감 내지는 불신풍조(不信風潮) 등이 생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뭇여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향락한 박동명(朴東明) 사건은 배금사상에서 비롯된 부조리(不條理)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것뿐만 아니다. 최고, 제일, 일류, 고급, 그냥 고급은 신통치 않아 최고급이 아니면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최고병(最高病)이나 일류병(一流病)에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병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전념되어, 일류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집을 뛰쳐나가 방황하거나, 나쁜 길로 빠져드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한 배금병 / 배금주의와 일류병은 심지어 한국 교회에도 감염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일류병과 사치병(奢侈病)은 날이 지나갈수록 더욱 나라 안에 퍼지고 있었다.

로렉스 (ROLEX), 몽블랑(MONT BLANC), 나폴레옹 코냑(Napoleon Cognac),   조니 워커(Johnnie Walker), 샤넬 (CHANEL) 등이 아니면 거들떠보려고 도 하지 않는 졸부(猝富)들도 생겼다.

그러한 일류병과 사치병은 교육적으로는 일류학교(一流學校) 지향열 (指向熱)이 만연되어 자식들을 어떻게든지 출세시켜야겠다는 부모들의 과열과 허영으로 이른바 <치맛바람>이란 유행어와 함께 어릴적부터 벅찬 과외활동을 강요하는 풍조(風潮)까지 빚었다.

그런 것에 더하여, 범죄(犯罪)의 대형화 또는 조직화와 인질사건 (人質事件) 등 강력사건의 증가 등도 그러한 갖가지 부조리한 사회풍조(社會風潮)의 외형적 영향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되새겨보는 지난 70년 동안의 사회풍조, 그것은 한국의 내일을 위해  정비(整備)하고 고쳐야 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앞에 적었듯이, 60년대 들어서부터 <경제성장> <국민소득증대> 등의 기치와 함께 생활 수준이 차차 향상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배금사상(拜金思想), 돈이면 무엇이든지 된다는 생각은 기업윤리 (企業倫理)의 타락(墮落)을 비롯해, 공무원 범죄(公務員犯罪)와 탈세 (脫稅) 등, 사회적으로 여러 방면에 부조리(不條理)가 생겼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 작, 상영시간 2시간 5분)

2015년 추석 – 이야기 셋(秋夕三題)

1.

이민생활에서 한국명절은 그저 추억일 뿐일 때가 많습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사는 대도시는 그래도 명절 기분을 좀 맛보는 곳들도 있겠습니다만, 딱히 작정하고 만나지 않으면 한인들과 맞부딛히고 살지 않는 시골에서는 ‘오늘이 추석?’하고 지나치기 십상이랍니다.

다행히 친,처가 노부모님들이 모두 가까이 사시는 덕에 한국 명절이면 인사는 드리고 산답니다. 더더군다나 오늘처럼 일요일이나 여기 휴일이 명절과 겹치는 날이면 당연히 가족들이 모여 밥상을 나누게 된답니다.

그런데 이번 추석은 이런 저런 일들로 그저 ‘오늘이 추석이라네요.’라는 인사로 그냥 지나간답니다.

못내 송구스런 생각에 최근 수년래 제 취미 가운데 하나로 자리매김한 요리에 나서보았답니다. 엊저녁에 손질해 둔 쇠갈비와 사골들로 갈비찜과 사골국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오후에 아버지 어머니와 장인 장모를 찾아 갈비찜과 사골국으로 우리 내외 재롱 잠시 떨다가 돌아왔지요.

제 아무리 백세 시대가 눈 앞이라 하여도 제가 이미 환갑을 지나고보니 부모님들을 뵙고 돌아오는 길,  ‘내년 추석도…’라는 기도는 제법 절실한 것이랍니다.

2.

지난 일년 사이에 만난 벗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알던 친구들도 있지만 지난 일년 사이에 새롭게 만난 벗들과 함께 새로움을 느낀답니다.

딱히 단체라고 이름 지을 수는 없지만 그저 우리끼리 ‘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 사람들’, 약칭으로는 ‘필라 세사모’라고 부르는 모임에서 만난 이들입니다. 제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는 사람들이랍니다.

일테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고 그것을 ‘공명’하려고 애쓰는 이들의 모습 – 바로 제가 배우는 점들이랍니다.

지난 주간 전세계에 으뜸 뉴스들로 퍼진 것들 중 하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미 소식입니다. 교황의 방미 일정 가운데 마지막을 장식한 것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세계 가정 대회’였습니다.

교황의 필라 방문 일정에 맞추어 오래 전부터 이들이 준비해 온 것이 있었답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서  ‘아파하는 이들에게 위로’를 베풀던 교황의 행렬을 되새기며, 2015년 오늘도 ‘여전히 아플 수 밖에 없는 이들’의 소리를 대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어제 백만에 가까운 인파들 속에서 ‘SEWOL’이라는 피켓을 든 채 열명도 안되는 ‘필라 세사모’ 회원들의 기도와 외침은 교황의 행렬 속에서 모기소리보다도 작은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몸짓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쯤, 제 믿음이랍니다.

제게 배움을 주는 이들의 몸짓이 비록 교황에게는 들리지 않았겠지만, 제가 믿는 신 곧  ‘들으시는 하나님’은 이미 들었다는 믿음이랍니다.

이 믿음이 가족을 잃고 두번 째 맞는 추석을 보내는 이들에게도 전해지기를 기도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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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주일입니다. 예수쟁이이므로 성서를 펼쳐봅니다.

‘들으시는 하나님’을 웅변해 주는 성경책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히브리인들이 고백했던 신의 모습입니다.

창세기 16장과 21장에는 비주류였던 하갈의 소리를 듣는 야훼 하나님의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을 무엇이라고 부르든간에(유태, 이슬람, 카톨릭, 개신교)  하나님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외치는 모든 아픈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고 들어주시는’ 신이라는 것입니다.

추석 – 우리들이 조상을 찾는 까닭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거기에 닿아 있는 것입니다.

*** 무릇 역사란  ‘그 들음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는 일일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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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 : 1181- 1226. 10. 3.)의 이름을 자신의 교황명으로 삼은 프란치스코 교황이 미국 방문중입니다.

그의 방미 일정이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로 이어지는 까닭에 제가 사는 곳 델라웨어에도 교황에 대한 뉴스가 연일 이어지고 있답니다.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정말 인간적인 성인이었듯, 그 이름을 딴 프란치스코 교황도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들을 그가 내딛는 곳, 어디서나 보여주고 계십니다.

그이가 제가 사는 곳에서 인근에 있는 필라델피아에 오십니다. 이미 오래 전에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아주 적은 수의 필라델피아 인근에 사는 한인들이 그이의 필라 방문을 맞아 준비하고 있는 것이 있답니다. 바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된 관심인 “가난한 자들”, “소외된 자들”을 함께 기억한다는 외침으로 그 이를 맞이하자는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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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여름 프란치스코 교황이 손을 내밀어 맞잡아 주었던 아프고 소외된 사람들인 세월호 유가족, 실종자 가족들의 신음이 2015년 9월 현재에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외쳐보자는 것이랍니다. 이들의 외침에는 다른 아무 까닭이 없답니다. 

단지 약 천년전 사람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Saint Francis of Assisi)가 썻다는 기도문을 이루고자하는 바램뿐이랍니다.

오, 주님 저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이 있는 곳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오, 거룩하신 주님.

제가 위로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위로할 수 있도록

사랑받으려 애쓰기보다는 사랑할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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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제 고모부, 처고모부, 장모 – 이 세분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답니다. 고향이 북쪽이고 한국전쟁 탓으로 남으로 내려와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중 고모부님과 처고모부님은 모두 세상을 뜨셨답니다. 두 분 모두 북에서 가정을 꾸리시다가 남으로 내려와 새가정을 꾸려 사시다 가셨답니다. 한분은 그 언젠가 북의 가족들을 만날 세월을 낚노라고 낚시에 말씀을 묻고 사시다, 다른 한분은 도수에 상관없이 소주잔 한잔이면 나오는 웃음에 세월을 얹혀 날리시다 가셔, 이젠 뵐 수 없답니다.

그래도 두분에게는 함께 남으로 내려온 혈육이 있었거나, 이북 오도민(五道民) 향우회에서 만난 고향분들이 함께 했던 삶이었지요.

아직 팔순이 안된 제 장모는 그야말로 남으로 내려온 홀로랍니다. 이북 오도민 향우회에 홀로 얼굴 내밀기도 뻘줌한 나이랍니다.

십대 어린 나이에 오빠하고 단 둘이 내려왔던 남쪽살이였답니다. 전쟁통에 고향에 간다며 국군에 입대했던 오빠는 그 뒤로 소식을 들은 적 없이 이북에 있던 가족들과는 영영 이별한 채 살아오셨답니다.

사람살이 길은 늘 열려있다고, 장인 어른 만나 가정을 꾸며 열 아홉에 제 처를, 이어 두 아들을 낳고 키우며 오늘도 기도로 사신답니다. 행여 북에 살아있는 어릴 적 헤어진 가족들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꿈도 버리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해 놓고 있답니다.

오는 10월로 예정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는 남북 각기 100명씩 선정해 만남이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현재 남쪽 신청자들의 반수 이상의 나이가 90대라고 하니 아직 팔순도 안된 창창하게 어린(?) 제 장모에게 순번이 돌아오는 일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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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삼년전 이맘 때, 장모에게 병이 찾아왔답니다. 담낭암이라는 이름의 손님이었지요. 그래 담낭을 떼어내고 전이된 간 일부를 떼어내는 수술을 받고, 항암치료도 받으시고 난 후. 그 언젠가의 세월을 기다리시며 잘 버티고 계셨답니다.

다시 시작한다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 소식이 들리던 이지음 장모에게서 떠났다고 생각했던 손님이 아직도 몸속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다는 판정을 받았답니다.

그래 이 저녁, 모처럼 제 가족을 위해 기도해 본답니다.

“장모(丈母)에게도 기회를…”

노동절과 중산층

월요일이지만 아침을 느긋하게 맞습니다. 늦잠의 여유도 누려봅니다. 노동절(Labor Day)아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영업자 주제에 누리는 혜택이야 전혀 없지만, 월요일 아침을 여유롭게 맞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어 감사랍니다.

커피 한잔과 함께 훑어본 뉴스에 눈에 띄는 기사가 하나 있답니다. 저희 동네 신문인 The News Journal에 실린 소상인 전문 리포터Scott Goss 의 “델라웨어주 노동조합원 숫자 줄다”라는 기사입니다.

지난해 델라웨어주 고용노동자 10명 가운데 1명 정도가 노동조합 가입자인데, 이 수치는 지난 25년 이래 최저치이고 10% 미만으로 떨어진 첫번째 사례랍니다. 전체 수치로보면 델라웨어주내에는 38,000명에 조금 못미치는 조합원 숫자인데 이 역시 1989년이래 최저수치랍니다.

오늘 오후에 윌밍턴 시내에서 벌어질 노동절기념 퍼레이드를 이끌 노동조합 리더인Samuel E. Lathem이 하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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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노동조합이 필요한) 블루칼라의 정의는 새롭게 내려져야한다. 주지사를 비롯한 정치행정관료들은 그들이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했다고 말하지만, 그 일자리들의 대부분은 아마존이나 월마트 등의 저임금 서비스업에 치중되어있고, 그 일자리들은 불만족스럽고 블안정한 것들이다.”

Samuel E. Lathem의 말은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전통적 개념의 일자리들이 변화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이런 문제들은 비단 델라웨어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전국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실제 미국 전체 노동조합 가입자 비율은 11.1%로 최고 정점을 찍었던 1950년대의 30%와 그리고 20%대를 유지했던 1980년대에 비하면 크게 위축된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한때 건강한 미국의 중추 역할을 했던 중산층들은 바로 노동조합을 이끌었던 생산직 노동자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비교적 안정적인  임금을 바탕으로  일일 8시간 노동, 주말휴무, 아동노동법, 최저임금제, 고용 의료보험 등 이루어내며 오늘에 이르렀지만, 지금의 변화는 노동조합이 할 일들이 축소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젊은 세대들이 종사하는 일자리들에서 전통적인 노동조합이 할 일이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비록 현재 노동조합 지도자들이 “이즈음 젊은 세대들은 이전 세대들이 오늘날의 노동조건을 이루기 위해 얼마나 많은 투쟁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거나, “젊은이들은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착취, 그들이 공정한 임금을 누리지 못하는 현상, 그들이 만드는 노동의 가치 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푸념하지만 이즈음 젊은 세대들에게는 공염불일 뿐라는 점입니다.

실제 델라웨어주내 노동 일자리의 변화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1990년 이래 지난 25년 사이에 자동차 생산라인과  Dupont회사의 나이론 제조업체 생산라인의 약 10만개가 넘는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것입니다.(델라웨어 주 전체 인구가 100만이 안된다는 점에 미루어 보면 이 수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노동조합들이 침체 상태에 빠진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공무원노조, 교원노조 등 공공노조들의 조직력과 확장력은 더욱 커져가고 있답니다.

그 까닭을 설명하는 대학교수의 말이 재밌습니다. “자동차업 같은 노동집약적인 산업들은 보따리 싸서 타주나 다른 국가로 이동하면 되지만, 주정부나 학교 등은 이주 불가능하기 때문에….”

철밥통을 위한 결속력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랍니다.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들어온 대목은New Castle County Executive(뉴캐슬 군청장) Tom Gordon의 말입니다.

“노동조합이 미국의 중산층을 형성했지만, 더 이상 미국의 중산층은 없다. The union built the middle class in the country, but that middle class doesn’t exist anymore.”

바로 이 지점에서 갖는 질문 하나랍니다.

모든 정치인들은 “중산층을 위하여!”라고 말한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