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단상(斷想) 3 – 장군(將軍)들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9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박노규(朴魯珪)장군1918년 3월 14일 ~ 1951년 3월 3일>은 한국전쟁 때 내가 복무했던 부대인 육군 제2사단 31연대장이었다.

그는  1946년 11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된 후,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현대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1950년 5월 1일 육군중령으로 진급하였고,  한국전쟁 때 춘천 및 홍천 전투, 강릉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1951년 3월 3일 일월산 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을 섬멸하던 중 560고지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4월 27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동시에 육군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현재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47에 안장되어 있다.

전쟁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던 중 적탄(敵彈)을 맞고 33세를 일기(一期)로 이 세상을 떠난 박노규 연대장 … ‘6.25 전쟁’이라는 싸움터에서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해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명복을 빈다.

박노규 장군이 졸업한 <국방경비사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이야기 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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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경비사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다.   영어로는 ‘South Korean Officer Training School’인 그 학교가 생기기 전엔 ‘군사영어학교 (軍事英語學校)’ 라는 것이 있었다.

군사(軍事)에 관한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친 그 학교를   Military Language School이라고도 하는데, 미군정이 생긴 다음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자리에서 개교(開校) 한 그 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학교다.

그 학교의 교육 과정을 마친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인데,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거쳐 대한민국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엔 일제시대 때,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하였다가 훗날 한국군의 별을 단 사람들도 있다.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전사할 당시, 육군 제2사단장이었던 함병선(咸炳善) 장군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한편 태평양전쟁 당시,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이 되었던  사람들 중, 육군종합학교(陸軍綜合學校) 출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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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내가 있던 부대의 이기욱 대위도  일본군  출신이었 다.  계급은 오장(伍長)이었다. (오장은 한국군 하사와 같은 계급이다.)

육군종합학교는 필요한 장교를 빠른 시간 안에 양성하기 위하여 1950년에 설치한 단기군사학교로서, 두세 달 정도의 교육을 시킨 뒤 장교로 배츨하였다.  더 설명하자면, 육종(陸綜)’이라고도 하는 육군종합학교는 6.25 전쟁 때, 한시적(限時的)으로 있었던 <전시사관양성(戰時士官養成) 군사학교>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족한 초급장교들을 속성으로 만들어내는 임시학교였다.

부산 구포초등학교에 있던 육군훈련소에서 전투병(戰鬪兵)이 되기 위한 단기(短期) 군사교육을 받고 전선(戰線)에 배치되었던 나처럼,  ‘육종’ 출신 장교들도 지휘관이 되기 위한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된 초급장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급조(急造)된 장교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속성으로 된 많은 ‘육종’ 출신 장교들이 전투지휘를 하다 전사(戰死)하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되었다.

하여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자가 되거나 전상자가 된  ‘6.25’라고 하는 그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반도가 분단(分斷)된 다음에 생긴 것이고, ‘한반도의 분단’은 ‘태평양전쟁이 끝남에 따라 생긴 것이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時期)를 일본에서는 ‘15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들(일본)의 표현대로 ‘15년 전쟁’ 시기에 살았고, 그런 것에 더하여 ‘6.25’ 라고 하는 전쟁도 겪은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回想)하며 이 글을 쓰는 내 자화상(自畵像)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각설하고, 군대 계급에는 소장, 중장 등도 있는데 보통 <장군(將軍)> 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xx 소장>이나 <xx 중장>이 아니고, <xx 장군>이라는 말이다.

장군(將軍)이란 군대용어(軍隊用語)로서 준장,  소장,  중장,  대장 등 <별>을 단 계급 전부를 한데 묶어 일컫는 말이다.  한데, 장군(將軍)을 ‘장성(將星)’이라고도 한다.

  • ‘장수 장(將)’ + ‘별 성(星)’ = ‘將星’이다.

그러므로 준장(准將)은 一星將軍, 소장(少將)은 二星將軍, 중장(中將)은 三星將軍, 대장(大將)은 四星將軍이라고 지칭(指稱)한다.

한마디로 장성급(將星級)인 장군(將軍, General officer)은 군사(軍士)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더 설명하자면 장군이란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우두머리로서, 큰 규모인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관직이나 칭호다.

앞에 적었듯이 미군정시대 때,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군사영어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쳤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군의 군사용어 대부분도 미국의 군사용어를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앞에 적은  ‘一星將軍, 二星將軍’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Brigadier General (one-star General) = 准將, 별 하나. Major General (two-star General) = 少將, 별 둘.        Lieutenant General (three-star General) = 中將, 별 셋. General (four-star General) = 大將, 별 넷. General of the Army (five-star General) = 元帥, 별 다섯. 공군 원수는 General of the Air Force. 해군 원수는 Admiral of the Fleet  등이다.

어느 나라 군대든지 <장군> 또는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군대생활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한 말은 요즘 세상 이야기고,  6.25 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한국군의 실정(實情) …… 말하자면, 군대의 편제(編制) 등 필요한 인원(人員) 때문에 부득이 젊은 <장군>들이 생기게 되었다. 앞에 적었듯이 ‘군사영어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하고 미군정이 만든 것이다.

한데, 대한민국 탄생과 함께 그 나라의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친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들 이었다. 한국군 최초로 4성장군이 된 백선엽(白善燁) 장군도 만주군 출신이고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그가 4성장군이 될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서른 두 살에 <4성장군>이라 ……      글세올시다 ……

아무튼 야전복(野戰服)차림의 백 장군이 지프(jeep)를 타고 전선을 누비던 때와 오늘날 一星將軍이 될 수 있는 <나이가  50세전후>라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별의 희소가치(稀少價値)가 1950년대, 특히 6.25전쟁 때의 그것 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희박(稀薄)해졌다. 달리 말하자면, 장성(將星)들의 수(數)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닐런지?

기록에 의하면,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군 장성의 수는 육군이 10명, 해군이 1명, 공군이 2명, 모두 13명인데, 당시 최고 계급은  소장 (少將)으로 4명(모두 육군)이었고, 나머지는 준장(准將)이었다.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껏해야 30세 안팎이었을 사람들이 <별>을 달고  군대를 통솔(統率)했다.    아무튼 그 전쟁 때 백장군처럼 속성(速成)으로 된 장군들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 수립과 함께 출발한 군대의 조직편제(組織編制)에 미비(未備) 한 상태에서 전쟁을 겪게 된 때였다는 것을 참고하여 생각해보더라도, 군대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한데, 목숨을 잃은 후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다.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생전의 공훈에 따라  계급을 올리거나 훈장을 주는 것을 추서(追敍)라고 하는데,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그런 사람이다. 박노규 장군은 생전(生前)에 별을 단 적은 없지만 사후(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이다.

해방 이후  전쟁을 치루며 서른 안팎 나이에 별을 달았던 많은 장군들 중엔 박노규 장군 처럼 국가에 공(功)을 세워 사훈(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고, 이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돌이켜 장군이 다 장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