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해방 후엔 이런 것도 있었다.
각가지 영어학습 책도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노점에서도 책을 팔았다. 그러한 것 중엔 다음과 같은 책도 있었다.
영어학습에 필요한 최소 어휘만으로 (850 단어만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책도 있었는데, 찰스 오그던 (Charles K. Ogden)의 Basic English가 바로 그런 책이다.
하여간, 8.15 해방 후, 미군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온 것이 영어 뿐만 아니었다. 의약품의 경우 예를 들면, 페니실린(penicillin), 다이아찐(diazine),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디디티(DDT) 등이 8.15 후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그러한 의약품과 함께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이 8.15 전반(全般)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8.15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처럼 단편적인 글이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8.15>라고 하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를 살아왔을 뿐만 아니고, 분단된 그 땅에서 동족상잔 (同族相殘)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6.25 전쟁 … 그리고 총과 칼을 들고 그 전장(戰場)으로 뛰어든 젊으이들 ,,,,,
총이면 총이지, 칼이라니? 그렇다. 대검(帶劍)이라고도 하는 칼을 총신(銃身) 끝에 꽂고 다녔다. 전투 상황에 따라 그 칼이 쓰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적과 맞붙어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이 되어버린 수 많은 전사자(戰死者)들 …
그리고, 적탄(敵彈)을 맞아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전상자(戰傷者) 들의 수는 얼마던가? 한국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국제연합(國際聯合, UN)회원국 군인으로서 그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거나 몸을 다친 군인들의 수는 얼마던가?
그러했던 전쟁 ……… 더 설명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도선에서 일제히 남한을 침공함으로 벌어지게 된 그 전쟁인데, 한국측에서는 그것을 6.25라고도 하고, 6.25전쟁이나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이라고도 한다.
“그 전쟁이 일어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나의 공통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것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 전쟁에 끼어든 중국은 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하는데, <抗美>를 <抗米>로 쓰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들나름대로 쓰는 <6.25 전쟁> 이름이 있다.
그러한 전쟁 이름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마음 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쟁 때 김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中共軍)과 교전(交戰)한 것을 끝으로 내 삶에서 떠나 버렸다.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기 직전이고, 내 나이 스물다섯살 때 생긴 일이다.
이야기 장면(場面)을 앞에서 적은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로 돌려본다. 미군정 때 미군의관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의약품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었던 것처럼, 6.25 전쟁 때에도 그 땅에 미군의관들이 있었다. 미 공군대위, Dr. Feeny 라는 군의관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전투중 중공군의 수류탄 파편으로 졸지에 부상병이 되었는데, 야전병원(野戰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제일육군병원으로 후송 (後送)되었다.
한편 내가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었 는데, 회담 중에도 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입원한 지 며칠 후, 분대장 고광만 하사가 들것에 실려 그 병원에 들어 왔다. 그도 다리를 다쳤는데, 그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 내가 있던 중대에서 전사자와 전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왼쪽 다리뿐만 아니고, 왼쪽 팔목도 다친 나는 팔목에 석고(石膏)붕대 를 하고 지내다가 원호대(援護隊)로 옮겨졌고, 1951년 9월 14일에 나는 명예제대증을 받아 들고 군문(軍門)을 나오게 되었다.
제대한 다음, 그 당시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던 K-9이라고 하는 미군 비행장에 있는 17th Medical Group에 취직이 되어 그곳 입원실에서 가볍고 손쉬운 잡일을 했다.
앞에 적은 Dr. Feeny라는 군의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처음부터 그 군의관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직장에서 얼마동안 지낸 다음에 그는 내가 한국군 부상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는 다른 미군 의사들과 함께 내 상처를 고쳐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고치질 못했다.
그들이 내 상처를 고쳐주진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때 다친 상처 때문에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 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불행 중 다행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