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그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만 남겼던 것이 아니라 일(행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가 행했던 여러 기적들과 치유 행위들 그리고 용서의 행위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예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먼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누워 자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죄(간음)로 인해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울 지경에 처한 여인을 용서하며 살리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의 일하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끝내 침묵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묵한 것들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어떤 평가에 대해서도 일체 묵언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병고침이나 기적 또는 용서의 행위를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죄인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격리, 소외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거센 표현을 하자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이나 물건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한가지 정리를 합니다.
예수 이야기와 얽혔던 사람들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다 죽었습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병을 고쳐서 좀 더 살았든,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을 피해 좀 더 살았든, 아니면 그 당시에 배 두드리며 떵떵 거리며 살았든 모두 찰라를 살다 죽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용서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아픔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따돌림을 당해 소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기적으로 치유로 용서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천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일년이 갓 지난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야만 할 성서적 물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