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 다시 성서에게 묻는다

예수는 그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만 남겼던 것이 아니라 일(행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가 행했던 여러 기적들과 치유 행위들 그리고 용서의 행위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예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먼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누워 자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죄(간음)로 인해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울 지경에 처한 여인을 용서하며 살리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의 일하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끝내 침묵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묵한 것들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어떤 평가에 대해서도 일체 묵언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병고침이나 기적 또는 용서의 행위를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죄인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격리, 소외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거센 표현을 하자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이나 물건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한가지 정리를 합니다.

4-16예수 이야기와 얽혔던 사람들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다 죽었습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병을 고쳐서 좀 더 살았든,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을 피해 좀 더 살았든, 아니면 그 당시에 배 두드리며 떵떵 거리며 살았든 모두 찰라를 살다 죽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용서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아픔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따돌림을 당해 소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기적으로 치유로 용서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천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일년이 갓 지난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야만 할 성서적 물음입니다.

4.16 연대 바로가기

돌아가라! – 엘리야 이야기

성서 우리들의 이야기 -13

남북으로 왕국이 갈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첫 임금이 된 여로보암의 죄는 성소에 야훼 제단을 쌓고 거기에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던 일에서 시작됩니다. 여로보암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남왕국 유대와 달라야 한다는 신생국가로써 내세워야 할 국가적 모델이 필요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똑같은 야훼를 섬기지만 남왕국 예루살렘과 다른 형태의 제사 방식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여로보암이 죄를 쌓게 된 배경입니다.

여로보암 이후의 왕들인 나답, 바아사, 엘라, 시므리, 오므리 때까지 북왕국 이스라엘은 이런 모습에서 크게 엇나가지는 않았습니다.

아합왕 때에 이르러 야훼는 철저히 버려지고  이세벨의 신인 바알이 나라의 신으로 섬겨지게 됩니다.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사당이 들어선 것입니다. 또한 아세라신의 목상도 만들어 세워 섬겼습니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엘리야가 갑자기 등장하게 된 것이고, 갈멜산에서 일 대 850 싸움까지 겪게되고 바알신을 섬기던 예언자들을 모두 죽이는 일대 숙청 혁명이 일어납니다. 그 뒷심은 바로 야훼만이 하나님이라는 백성들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일 이후 목숨줄 연명하고자 도망친 쪽은 아합왕이 아니고 엘리야였습니다.

왜? 승자가 도망을 가야했을까요?

초복(初伏)과 감사

내일이 초복이랍니다. 여름 한철 복더위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제가 사는 델라웨어 날씨는 얼추 서울과 비슷하답니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봄, 가을은 짧고, 바다가 가까워서 여름철 습도도 높은 편이랍니다.

이즈음은 찌는 날씨의 연속이랍니다.

cats그래도 복이 시작되었다는 말은 가을이 이미 오기 시작했다는 전주이기도 합니다. 초복은 하지를 기준으로 한 것이니 이미 낮은 밤에게 쫓기기 시작했다는 말이고요, 말복이 지나면 입추이니 여름의 기승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이지요.

해마다 이맘 때쯤이면 몸보신용 음식들을 챙기는 오랜 관습들이 있지요. 삼계탕에서 시작해서 보신탕에 이르기까지 사람에 따라 기호에 맞는 여름 보양식들을 찾기 마련인 때입니다.

제가 사는 곳에도 사람들이 이맘때면 즐겨찾는 음식이 있답니다. 바로Maryland Crabs 또는Blue Crabs이라고 부르는 게찜요리랍니다.

요리방법이라야 별게 없답니다. 살아 꿈틀거리는 게들을 찜판에 올리고 그 위에old bay seasoning이라는 양념을 듬북 뿌려 찜통에 쪄낸 것입니다.

마침 모처럼 아들 딸과 함께 식사를 나눌 시간이 있어(이젠 아이들이 큰 맘 먹고 동시에 이렇게 시간을 내어 주는 일은 매우 드물답니다)  부모님을 모시고 게찜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답니다.

또 한해의 복날들을 건강하게 보내시는 아버님과 어머니께서 저희 부부와 아이들에게 주신 말씀이랍니다.

“그저 감사하며 살아라.”

일본 탄광으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현해탄을 건너서 광부가 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어느 봄날, 부산항 부두.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부둣가 한쪽에 몰려 있다.   그들은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오르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일행에 섞여 인솔자들(일본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부산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일본 땅에 배가 닿자 그 동안 싹싹하고 부드럽던 인솔자들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지고,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돌변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대로 탄광까지 따라 갔다.   일행이 닿은 곳은 후쿠오까(福岡) 지방에 있는 한 탄광촌이었다. 그곳까지 간 조선사람들은 숙소 겸 식당인 <함바(飯場)>라는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광산측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나는 작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탄광 광부가 되어 막장에서 석탄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광부생활이 나로서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갱(坑) 안에 있는 동안 석탄가루가 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어둠이 짙은 야음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japan

오사카

탄광에서 빠져나온 나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대의 인원보충뿐만 아니라, 전쟁하는데 드는 군수 물자 생산과 군사기지건설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조선사람들을 많이 데려갔다.

한데, 같은 일본 땅 안에서도 내가 지내던 그 탄광처럼 특정한 지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제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사카가 그런 곳이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오사카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큐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해저(海底)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인 구레(吳) 요새지(要塞地)를 지나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구레(吳)를 지나갈 때는 승객(乘客)들이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차창(車窓)을 가리고 지나갔다.

하여간 나는 오사카에 도달했다. 앞에 설명했듯이 오사카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숙소와 일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시우쇠를 불려 강철을 만드는 제강소에서 일했다. 용광로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식은 다음, 그것을 떼어 밖으로 운반해 내는 그런 일이었다. 힘드는 일이긴 했지만 탄광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 어느날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그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했는데, 본적지 확인과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 등에 관한 조사를 받으면서 한 주일가량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내가 갇혀 있던 방엔 일본인도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식량을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노동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 생활도 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조사실로 불려갔다. 탄광에서 사람이 와있었다.

탄광에 있을 때, 내가 지내던 함바(飯場)집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와 함께 후쿠오카 탄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

델라웨어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이모티콘)

제가 사는 델라웨어 지방 소식지인 News Journal에 재미있는 기사가 있어 소개드립니다.
B9317996251Z.1_20150709151305_000_GM0BA7K6M.1-0휴대전화 문자메시지(SMS)나 이메일에 ‘이모티콘(emoticon)’ 대신 얼굴 표정이나 사물을 단순화한 아이콘인 ‘에모지'(emoji)라는 것이 있지요.

델라웨어에 사는 사람들을 위한 에모지를 만든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하는 물음과 함께 글쓴이 나름대로 생각해 본 것들을 소개하는 기사랍니다.

델라웨어라는 지역 특성 및 지역 사람들의 특질을 잘 나타내는 상징을 꼽아보자는 것이지요.

글쓴이가 델라웨어 사람들에게 필요한 에모지로 꼽은 내용들이랍니다.

  1. old bayOld Bay – 빨강 파랑 노랑색을 주조로 한 양념통에 담긴 양념 이름입니다. Delmarva(델라웨어, 매릴랜드, 버지니아) 지역 사람들이 즐겨 먹는 것이지요. 주로 해산물(게, 새우 등등) 요리에 사용한답니다. 제 여름 보양식인 게찜에 많이 들어가는 양념입니다.

biden2. Joe Biden – 델라웨어가 낳은 인물이지요. 현 미국 부통령입니다.

 

lifeguard3. Lifeguard – 바다가 감싸고 있는 지역 특성과 여름철을 감안해 꼽은 듯. 물놀이에 필수적인 안전요원과 안전을 강조한 것이지요.

shopping bag4. Sopping bag – 델라웨어주는 판매세가 없는 곳이랍니다. 그래 tax-free shopping을 강조한 것이지요.

seagal5. Seagull – 역시 바다로 쌓인 특성상 흔히 볼 수 있는 꼽은 갈매기입니다. 제 가게가 있는 쇼핑센터도 종종 갈매기 떼들이 몰려와 주차지역을 덮곤 한답니다.

scrapple-header-ll6. Scrapple – 델라웨어 사람들의 흔한 아침메뉴 가운데 하나입니다. 스크래플은 잘게 썬 돼지고기, 야채, 옥수수 가루로 만든 튀김 요리랍니다. 냉동 식품으로 판답니다. 물론 저는 안 먹지요. 차라리 콩나물 넣은 라면을 먹지요.

imagesC7SXMPX87. Marijuana leaf – 델라웨어가 마리화나 애용자들에게는 천국이 될 듯합니다. 약용으로  쓰는 것은 물론이고, 오는 12월부터는 개인당 1온스의 마리화나를 소지하거나 사용하는 게 합법화되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귀 솔깃 하신 분 있으려나?

bluehen8. Blue Hen – 델라웨어주의 상징 동물이자  University of Delaware 스포츠 팀들의 상징이랍니다.  Go! Blue Hen! 아주 흔한 스티커랍니다

capture-20150709-1739209. States – 워낙 주의 크기가 작다보니 조금만 달리면 이웃한 펜실바니아, 뉴저지, 메릴랜드가 된답니다.  때론 미국인들도 모르는 주이기도 하답니다 델라웨어를 크게해서 알리는 에모지가 필요하다는 뜻으로.

horsecrabs10. Horseshoe crabs – 이거 되게 징그러운데 델라웨어 해변가에 널려있답니다. 자그마치  기원이450 million years ago(4억 5천만 년 전)으로 올라가는 바다생물이랍니다.

옥쇄(玉碎) 그리고 궤변(詭辯)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3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옥쇄(玉碎) 그리고 궤변(詭辯)

601311261130211943년 11월 하순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과 처칠 영국 수상과 장개석  중화민국 총통이 이집트 카이로에서 전후(戰後)처리에 관한 회담을 가졌다.  회담의 의제 중엔 한국에 관한 것도 있다.

1945년 2월 초순엔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 수상이 소련 얄타에서 모여 전쟁이 끝난 다음에 있게 될 상황을 다루었는데, 그 회담은 <한반도 분단(分斷)>이라는 시점(始點)임을 알리는 강대국들의 모임이기도 했다. 결국 그 영향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945년 7월 26일엔 미, 영, 중 세 나라 수뇌들이 베르린 교외의 포츠담에서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다. 그 후,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으로 소련도 그 전쟁에 참가했다.

한편, 그 전쟁 때 일본은 전쟁터에서 일본군 전사자가 생기면, 그것을 옥쇄(玉碎)한 것이라고 했다.

그것은 옥처럼 아름답게 깨어져 부서지며 깨끗이 죽는다는 뜻으로 일본군 전사자들의 넋을 그렇게 미화(美化)한 말이다.

일본군 전사자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야기 하나 덧붙인다.

일본에 야스쿠니진자 (靖國神社)라는 것이 있다. 일본 도쿄에 있는 것인데, 일본이 벌인 주요 전쟁에서 죽은 사람들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이다.

<평화로운 나라>라는 뜻이 있는‘靖國’과는 다르게 태평양 전쟁의 범죄자로 처형된 도조 히데키 등의 위패도 거기 있다.

오늘날 아베 일본 총리 등이 그곳에 참배하는 것을 한국과 중국이 반대하는 이유는 지난날 그들이 한국과 중국에 저지른 침략행위 때문이다.

1910년에 일본은 한국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한국을 그들의 식민지로 만들었고, 그러한 일본은 한국을 발판으로 삼아 중국 대륙으로 진출했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저지른 침략행위 내용을 요약해 본다.

1931년에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지방에 그들의 허수아비 나라인 만주국을 세워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1937년엔 지나사변(支那事變)이라고도 하는 중일전쟁이 일어났는데, 베이징(北京), 톈진(天津)을 점령한 일본은 그 범위를 상하이(上海)로 확대시키고, 난진(南京)을 점령하였다.

그 뒤 우한(武漢)을 공략하고 광둥(廣東)에서 산시(山西)에 이르는 여러 성(省)과 주요 도시의 대부분을 점거하였다.

그 전쟁이 일어나던 때에 나는 보통학교(초등학교)엘 다니고 있었는데, 전쟁이 일어난 다음 교실 벽에 중국 지도가 걸려 있었다.

그 지도엔 위에 설명한 것처럼 일본군이 중국 땅을 점령한 차례대로 지도에 일본 국기가 그려져 있었다.  그 당시 학교에서 배운 노래 중엔 일본 군가(軍歌)도 있었는데, 그 중  한 가지를 우리말로 옮겨본다.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不義)를 무찌르는 /  충용무쌍(忠勇無雙)한 우리 군대는 / 환호(歡呼) 소리로 전송 받으며 / 바야흐로 떠나는 나의 조국이여  / 이기지 않고는 결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일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불의를 무찌르는 군대라는 것이다.

하늘을 대신하다니? 그리고 누가?  무엇이 불의라는 말인가?

오만(傲慢)하고 불경(不敬)한 표현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군가를 한국 어린이들도 부르게 한 일본은 어떤 나라인가?

역사의 한 장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중일전쟁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일본군이 중국인들에게 저지른 그들의 만행(蠻行)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중국 부녀자들을 겁탈(劫奪)한 것을 포함한 <난진 대학살(南京大虐殺)> 사건이다.

그런 이야기를 다룬 책이 있다.

78132THE RAPE OF NANKING :  THE FORGOTTEN HOLOCAUST OF WORLD WAR II (Iris Chang, Published in Penguin Books 1998) 이라는 책이다.

나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도서실에서 그 책을 처음 보았는데, 표지 맨 윗 부분엔 THE NEW YORK TIMES BESTSELLER라는 글자가 있다.  10주 동안이나 <뉴욕 타임즈의 베스트셀러>였던 책이다.

일본군의 잔인함은 남경을 점령하면서 달하였다.  1937년 남경에 입성한 일본군은 12월 13일부터 7일간에 걸쳐 시민과 포로 등 약 30만 명을 살해하고 도시를 피로 물들였다. 일본군은 당시 10만 여명의 남경시민과 상해 등지로부터 몰려든 피난민,국민당 정부의 지시에 따라 투항한 군인, 경찰을 총과 칼로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내가 그 책을 읽어본 내용 —–  즉, 당시 난진에 진입한 일본군들이 그곳 중국인들에게 행한 이야기는 인터넷 검색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생략한다.

<중국 영화 – City of Life and Death(南京! 南京!)–Full version ;2시간14분52초>

각설하고,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의 젊은이들은 (특히 가미가제 특공대원들)“야스쿠니에서 만나자”라고 하면서 전쟁터로 떠났다.

야스쿠니진자는 러일 전쟁, 조선 침략, 중일 전쟁, 태평양 전쟁 등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에서 죽은 그들의 군인들을 위한 일종(一種)  의 사당(祠堂)이다.

그런데도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야스쿠니는 미국의 알링턴 묘지와 같은 시설이다.”라고 말하면서,“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을 참배하는 것은 다른 나라와 다를 것이 없다”라고도 한다.

역사의 진실을 감추려고 아베 신조는 그러한 궤변(詭辯)을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제 그 시절에 겪은 나의 이야기를 해 보련다.

부질없음에…

“부질없게도 인간들은 지상의 현상보다 천체의 현상을더 중요하게 여긴다. 마치 자신의 일에 신경쓰는 것보다 이웃의 일에 신경쓰는 것이 더 존경할 만하고 고귀한 일이라는 듯이.

그러나 우리들이 풀어야 할 매듭은 별들의 저 교차점이 아니다.

Men attach a false importance to celestial phenomena as compared with terrestrial, as if it were more respectable and elevating to watch your neighbors than to mind own affairs.

The nodes of the stars are not the knots we have to untie.”

civil지금으로부터 156년 전 매사츄세스 콩코드 강변 숲속에서 당시 마흔 두살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가 써서 남긴 일기 중(Journal 1859. 10. 16.) 한 대목입니다.

오늘 제 고민은 별들의 교차점도 아니고 천체 현상에 대한 것도 아니며 딱히 이웃의 일만도 아닙니다.

제가 살아가는 오늘 현재의 고민일 뿐입니다.

분명 제가 발딛고 서있는 이 땅, 사람사는 일에 대한 문제임에도 많은 경우에 안드로메타의 일을 갖고 헛꿈 꾸고 있다는 소리를 듣곤한답니다.

따지고보면 쏘로우의 글들 대부분이 사실 별들의 교차점에 대한 이야기들이랍니다.

때론 “부질없음”이야말로  진리에 닿는 지름길 일수도.

남북 분단왕국 이야기

왕(王)이 아닌 예언자들의 역사(役事 또는 歷史) – 남북 분단 왕국 이야기 1

예언자 이야기는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를 찾아가는 길목에서 아주 중요한 이정표입니다.

우린 여전히 미국인일까?

연휴로 맞는 주일 아침, 느긋한 마음으로 신문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기사 하나입니다.

7-4-15제가 사는 동네 신문인The News Journal의 고정 기고가인John Sweeney라는 이가 쓴 “우린 여전히 미국인일까?(Are we still Americans?)라는 글입니다.

글쓴이는 해마다 맞는 독립기념일이면 동네마다 퍼레이드를 벌리고 불꽃놀이를 즐기고, 더러는 해변가를 찾아가 여름을 만끽하는 연휴를 보내곤 하는 모습은 올해도 여전하다며 이 글을 시작한답니다.

그런데 매해 시간이 흐를수록 변하고 있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 날이 되면 펄럭이던 성조기의 빨강, 하양, 파랑 색깔은 거리마다 자동차나 침대 등의 광고판에서 더 많이 볼 수 있게 되었고, 성조기는 더 이상 애국을 상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그 뿐 만이 아니라 정치체제도 흔들리고 있고, 어메리칸 드림이라는 말은 농담거리가 되었고, 미국의 역사를 아는 이들도 드물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의 정치참여도도 점점 낮아지고 있고, 정치적 견해들 역시 자기 쪽에만 유리한 방향으로 주장되고 있거니와 상대방에 대해 이해하려는 모습은 찾을 수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또한 그는 정치적 좌, 우파 세력들은(미국에 좌, 우파가 있는지 의문이지만) 각기 자신들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조건들이나 법안들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고치려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글쓴 이는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에서 미국인으로 살려고 하는 것일까?( Do we still make Americans in this country?)”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이런 해법을 제시합니다.

미국이 독립을 이루었던 세대로부터 10세대가 흐른 이 싯점에서 중요한 것은 바로 1987년 교육학자Eric Donald Hirsch가 주장한 “문화 이해 능력을 고양하는 일 또는 문화 문맹 퇴치(Cultural Literacy)”라고 말합니다.

지나간 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것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땅 미국에서 살아가는 현재의 미국인들 끼리의 서로 다른 문화, 관습, 언어 등을 서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오늘날 미국이 여전히 미국이 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주일 아침 John Sweeney의 주장을 읽으며 “어디 미국 뿐이랴”라는 생각과 함께 어느 누가 먼저가 아니라 제 자신이 자신됨을 돌아보는 일에서부터 이웃을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7-4-15a

어제 저희 동네에서 있었던 퍼레이드 사진이랍니다. 이 길은 매일 제 출퇴근 길이기도 하답니다. 사진 속 아이들은 제 아이들이 다녔던 학교 학생들인데, 저런 대열 속에 있었던 제 아이를 찍으려고 사진기 들고 기웃거렸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참 빠름니다. 세월이.

 

게으른 연휴

연휴를 맞아 하루 푹 쉽니다.

쉰다는 게 별거인가요? 그저 천천히 시간을 맞는 것이지요.

0704152113d저녁상을 물리고 앉아있노라니 밖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시작했네!”하는 아내의 소리에 창밖을 내다 봅니다. 동네 4th July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답니다.

집 바로 뒤에 있는 공원에서 해마다 오늘이면 하는 연례행사이랍니다.

미국 어디서건 낮에는 퍼레이드, 밤에는 불꽃놀이로 독립기념일을 기리는 동네 행사지요.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함께 나가 퍼레이드도 보고, 불꽃놀이도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구경하곤 했답니다. 그러다 아이들이 커서 그 퍼레이드에 직접 참여하는 것을 보러 달려 나가곤 했었는데….

이젠 다들 컷다고…

아내와 둘이 밥먹고 앉았다가 폭죽소리에 놀라, “아~ 오늘이구나!”한 것입니다.

창문밖을 바라보다가 앞뜰로 나가 사진 몇 장 찍고는 “아이고, 모기 달려드네…”하며 들어왔답니다.

쉬는 방법도 이젠 게을러집니다.

좋게 표현하여 느긋함이랄지…

뉴스를 보니 Lewis Beach라고 델라웨어에서 제법 유명한 해변 도시에서 있었던 오늘 행사 영상이 있어 여기에 덧붙인답니다.